영화 '시'는 <오아시스>,<박하사탕>,<밀양>등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창동 감독의 다섯 번째 작품이다. 제63회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할 정도로 그 작품성을 검증받은 이 영화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계속해서 관객들의 가슴 한 켠에 무거운 벽돌을 얹어 올린다. 제목만큼 결코 서정적이고 가벼운 영화가 아니라는 뜻이다. 감독은 영화에 노인문제, 물질만능주의, 정신적 가치의 파괴, 성폭행 등의 각종 사회문제적 이슈들을 압축해 담았고, 이 때문에 영화라기보다는 사회고발적 성격을 띈 다큐멘터리 한 편을 보는 것과 같은 불편함을 자아낸다. 이런 불편함이 긍정적인 이유는 영화를 보고 난 이후에 그만큼 자신과 이 사회를 되짚어 볼 수 있는 시간을 던져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영화의 첫 장면은 새파란 강물이 흐르는 강가에서 시작된다. 근처에서 놀고 있던 어린아이들 중 한 아이가 물살에 떠내려오는 여학생 시체를 발견한다. 죽은 그녀는 ‘아네스’라는 세례명의 평범한 여중생 희진이었는데, 학교에서 집단 성폭행을 당하고 그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 끝내 자살한 아이였다. 주인공 미자(윤정희 역)는 치매 초기판정을 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딸을 잃고 실성한 희주의 엄마를 보게 되면서 이 사건을 처음 마주한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자신의 손자 욱이에게 이것 저것 물어보지만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욱이는 내내 시큰둥한 표정으로 일관한다. 이 무렵 미자는 시를 쓰고 싶은 마음에 동네 문화원에서 시 창작 수업을 듣게 된다. 강좌가 끝날 때까지 시 한편을 완성하기 위해 미자는 부단히 사물과 풍경을 관찰하고, 간병일도 꾸준히 나가며 조용한 일상을 보낸다. 그러나 이런 그녀의 일상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한다. 가해 학생들 중 한명이 바로 미자가 끔찍이도 아끼던 손자 욱이였던 것이다. 가해 학생들과 그 부모들은 한 집당 오백만원씩 총 삼천만원의 합의금으로 일을 무마시키려 하고 그 와중에 미자는 오백만원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미자의 오백만원까지 합쳐져 합의금 삼천만원이 모이고 이로써 일은 조용히 마무리 된다. 그러나 미자는 시낭송회에서 만난 한 형사에게 손자의 범행을 신고하고, 다음 날 욱이의 엄마인 자신의 딸을 집으로 부르지만 그 어디에도 미자는 없었다. 그 때 한적한 풍경 위로 미자가 쓴 시 ‘아네스의 노래’가 읊혀지며 영화는 끝이 난다.
이기적인 어른들의 세계 속 미자
미자는 66세라는 고령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소녀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여자이다.
정부가 지원해주는 기초생활금과 간병일로 버는 짜투리 돈으로는 손자와 함께 살아가기 조금 빠듯한 생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세상이 마냥 아름답고 예쁘기만 하다. 흰 레이스가 달린 원피스와 챙모자, 차분한 목소리와 곱게 화장한 얼굴은 그녀에게서 세월의 흐름조차 감히 느끼지 못하게 한다. 가해자 아버지들이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만든 모임에서 미자는 자꾸만 회피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시 쓰기에만 몰입한다. 관객들은 순수함을 넘어선 그녀의 눈치 없고 바보 같은 모습에 답답함을 느끼거나 현실감각 없는 캐릭터라 비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자의 이런 행동은 영화 속 등장하는 현실적인 인물들과 대비되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왠지 모를 불편함을 일으킨다. 영화 초반 여자아이의 엄마가 아이의 죽음으로 인해 실성하는 것을 목격한 미자가 근처 슈퍼에서 그 죽음에 대해서 물어보는 장면이 있다. 슈퍼 여자는 물론, 주변 사람들도 그 여자아이의 죽음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모습을 보인다. 아이들의 부모님은 어떨까. 아이들의 잘잘못을 논하기는 커녕, 죽은 희진의 외모와 집안 형편에 대한 모욕까지도 일삼는다. 그리고는 모여서 어떻게 사태를 덮을 건지 논의하지만, 그 방법은 오로지 돈이었다. 아이들은 어떨까. 가해자인 욱이와 아이들은 자신들의 잘못으로 인해 한 생명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자살 소식을 듣고 나서 모르쇠로 일관하고, 되려 떳떳하다는 듯 한 소녀의 죽음을 침묵한다. 가해자가 당당하고 피해자가 고통 받는 주객이 전도되어버린 현실, 돈이면 다 될 것이라는 어른들의 편협한 사고, 굳어버린 양심과 죄책감은 오늘날 이 사회의 한 단면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이런 어른들의 세계에서 순수함과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미자는 다소 괴리감을 안겨주지만, 그렇기에 어른들과 아이들의 계싼적이고 비인간적인 모습이 더욱 극대화되어 보여지는 장치임에 틀림없다.
작품의 결말과 아네스의 노래
사실 시의 결말부분을 두고는 다소 엇갈리는 견해가 있기는 하나 영화 시작부분에서 흐르는 강물을 비추던 화면이 결말부분에 다시 한번 등장하는 것은 미자의 죽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때 카메라 프레임은 다리 난간을 붙잡고 서 있는 한 소녀를 비춘다. 물론 프레임 안에는 죽기 직전 소녀의 뒷모습이지만, ‘아네스의 노래’를 읊는 목소리가 희주에서 미자로 바뀌는 것을 통해 동일시 되는 둘의 모습을 확인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결말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창동 감독의 필모그라피를 살펴보면 대게 영화 밑바탕에 ‘죄와 구원’,‘용서’라는 주제가 깔려있다. <시> 역시 마찬가지이다. 영화 결말부에 와서도 끝끝내 감독은 아이들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사실 이미 파괴되어버린 손자의 양심을 회복하기란 어렵다. 또한 이미 죽어버린 희주에게 용서를 구할 기회조차 없다. 돈으로는 죄를 씻어내지 못한다는 걸 아는 미자는 끝내 자신이 끔찍이 아끼는 손자를 제 손으로 경찰에게 넘긴다. “잘못한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하잖아요.” 그 와중에 경찰서에 가는 욱이를 뒤로 형사에게 하는 미자의 이 뼈굵은 한 마디는 추악하고 이기적인 어른들의 세계 속에서 아이 같이 순수한 모습의 그녀가 던지는 일종의 경고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그녀가 죽음을 택한 데에는 복합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시낭송회에서 음담패설을 일삼는 형사에게 ‘시는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것’이라고 외쳐대던 미자가 사실 자기 자신도 그렇게 아름다움을 노래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좌절감이 클 것이다. 또한 손자의 타락해버린 도덕성을 지켜보는 자신, 그로인해 오는 무능함 등이 그녀를 더욱 고통스럽게 했을 것이다. 어찌되었건 미자의 죽음은 스스로 땅에 떨어져 밟히고는 다음 생을 준비하는 ‘살구’처럼, 죽은 희주처럼 세상의 부조리함과 더러움을 자신이 다 끌어안고 가겠다는 의지를 내포한 채 자신을 내던진 것으로 보여진다.
아네스는 ‘순결’을 상징하는 성녀의 이름이다. 어린 나이에 자신의 순결을 위해 정혼자들의 구혼을 거절하다 미움을 받게 된 그녀는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다 끝내 사형을 당하는 인물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희주의 세례명은 ‘아네스’였고 미자는 이런 희주를 위한 시를 짓는다. 강압으로 인해 몸이 더럽혀졌지만, 그녀는 그 누구보다 순결하고 깨끗함을, 그리고 억울하게 죽은 한 소녀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그에 따른 죄책감과 슬픔이 담긴 애도(금전적인 보상이 전부라 생각하는 진정성 없는 애도가 아닌)를 표한 것이라 보았다. 또한 미자가 앓는 병은 조금씩 단어를 잊어버리고, 그러다 언젠가 이 끔찍한 일마저 잊어버리고 마는 치매였다. 이 안타깝고 억울한 한 소녀의 죽음을 잊지 말자고 세상에 내놓은 미자의 마지막 유언같은 것이라고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시(詩)의 의미
<시>에는 실제 시인이기도 한 김용택 시인이 문화원 시 강사인 ‘김용탁’으로 등장한다.
다음은 시 창작 교실의 첫 수업 장면이다.
김시인
"시를 쓰기 위해서는 잘 봐야 돼요. 우리가 살아가는데 제일 중요한 것은 보는 거예요.(칠판에 큰 글씨로 ‘본다’라고 쓴다) 본다. 보는 거죠. 우리는 뭐든지 보고 살잖아요? 세상의 모든 것을 잘 보는 것이 중요해요. 자, 내가 여기 하나 준비해온 게 있어요. (주머니에서 사과 하나를 꺼내 들어 보인다) 이게 뭐죠?"
수강생들
"사과요."
김시인
"예, 사과지요. 사과. 내가 일부러 이것을 준비해왔어요. 아주 준비성이 많은 선생이지요. (사람들 웃음) 다른 선생님들은 절대 이걸 준비해오지 않아요."
(…중략…)
김시인
"자, 이 사과! 여러분들 지금까지 이 사과를 몇 번이나 봤어요?"
수강생들은 말이 없다.
김시인
"천 번?"
(누군가 작은 소리로 ‘만번’이라고 말한다)
"만 번? 백만 번? (수강생들을 바라보며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다) 틀렸어요. 여러분은 지금까지 사과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한번도!"
무슨 소린가 하고 열심히 쳐다보는 수강생들.
김시인
"지금까지 여러분은 사과를 진짜로 본 게 아니에요. 사과라는 것을 정말 알고 싶어서, 관심을 갖고, 이해하고 싶어서, 대화하고 싶어서 보는 것이 진짜로 보는거예요. 오래 오래 바라보면서 사과 그림자도 관찰하고, 이리저리 만져보면서 뒤집어보고, 한 입 베어 물어보고, 사과에 스민 햇볕도 상상해 보고, 그렇게 보는 게 진짜로 보는 거죠. 무엇이든 진짜로 보게 되면 (가슴에 손을 얹으며) 뭔가 자연스럽게 게 느껴지는 것이 있어요. 샘에 물이 고이듯이. 종이와 연필을 들고 그 순간을 기다리는 거예요.(…)"
위 장면에서 김시인은 ‘시’를 쓰려면 오감을 이용해서 일상 속 사물을 바라보고 관찰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수업 이후로 미자는 길가에 핀 꽃도 들여다보고 싱크대에 가득한 설거지 그릇들도 유심히 들여다보며 세상의 아름다움을 시로 표현하려 열심히 노력하지만 시는 쉽게 써지지 않는다. 이에 미자는 시 낭독회 술자리에서 만난 김시인에게 동그랗게 눈을 뜨며 묻는다.
“선생님 어떻게 해야 시를 쓸 수 있을까요?”
그러나 이 때 그토록 써내려가기 어려웠던 시가 추악한 현실과 맞닥뜨리게 되면서 완성된다. 미자에게 시 쓰기가 어렵게 느껴졌던 이유는 ‘시는 아름다워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그런 아름다움만을 관찰하고 보려 했었기 때문이다. 현실을 회피하던 미자에게 소녀의 죽음은 결정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으며 현실과 세상을 제대로 보게 되는 하나의 계기였다. 이쯤에서 이창동 감독의 ‘세상의 아름다움이란 그냥 아름다움 자체로만 존재할 수 있는게 아니고 우리 삶의 고통, 더러움까지 껴안아야 탄생한다’ 는 말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던 소녀의 마음에 대해 누구보다 귀 기울이고 이해하려 했던 미자이기에 그렇게 온몸으로 아파하며 부딪쳐 써내려간 한 편의 시는 다른 어떤 시보다 더욱 더 아름다울 수 밖에 없다.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시의 의미는 무엇일까. 사실 극중에서 미자가 그토록 좋아하는 ‘시’는 시인에게조차 냉대 받는 처지였고, 시를 사랑한다며 모이는 동호회 사람들에게는 친목의 수단이자 유희도구일 뿐이었다. 술자리에서 ‘시 같은 것은 죽어도 싸’라고 외치는 한 시인의 말처럼 이 시대는 시가 죽어가는 시대이다. 우리가 미자를 답답하게 느꼈던 것 처럼 이런 시대에 시를 쓴다는 것은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정신적인 가치가 등한시 되어 타락해버린 우리 사회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시’는 살아남은 하나의 양심이자,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는 가치있는 존재라는 점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자문을 던지게 하는 영화임에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