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분노의질주 Mar 07. 2022

나는 특별하지 않아

<애나 만들기 Inventing Anna>를 보고

  나는 특별할까? 특별하지 않을까? 어떻게 생각하는 게 나를 위한 걸까?


  넷플릭스의 새로운 드라마 <애나 만들기 Inventing Anna>를 보다가 이마가 탁 쳐지는 장면이 있었다. 만삭 상태로 애나를 취재하던 비비안이 애를 낳다가 고통에 못 이겨 그만하고 싶다고 말할 때 남편 잭이 비비안의 손을 잡으며 소리를 지르는 장면이었다.

“사람들은 들에 쭈그려 앉아 낳기도 해. People squat in fields. 넌 특별하지 않아 You're not special.”

비비안은 뭔가 알아들었다는 듯이 끄덕이더니 “I’M NOT SPECIAL”이란 문장을 대문자로 필사적으로 외치며 아기를 낳는 데 성공한다. "난 특별하지 않아"라니, 세상에 갓 도착한 아기를 환영하는 데 이보다 의아한 문장이 어디 있을까.


  잠깐, 이 장면만 보고 잭을 너무 나쁘게 생각하진 말자. 그는 예정일이 다가오는데 아기 안전장치나 베이비 모니터도 없고, 아직 아기를 맞이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걱정하는 자신에게 비비안이 안심시키려고 한 말을 재인용했을 뿐이다. 비비안은 그런 물건들 없이도 아기는 낳을 수 있다고, 중요한 것은 아직 아기는 태어나지 않았고, 쓰던 기사를 끝내는 것도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해야 할 준비니까 자신은 그것을 하겠다고 말한다. 비비안에게 애나에 대한 기사를 완성하는 것은 단순히 투두 리스트를 완료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자신감을 되찾는 일이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는 게 부모가 되기 전에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준비라는 말이었다.


  이렇게 멋진 사람에게, 잭이 외친 “너는 특별하지 않아 I’m not special.” 라는 문장에는 어떤 힘이 있어 포기 직전의 사람을 정신차리고 다시 힘을 내게 만든 걸까.

  자기 암시의 효과라는 이론이 있다. 원하는 바를 지속적으로 되뇌면 그 말이 무의식까지 길들이고, 내 행동에도 변화를 주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도록 돕는다는 이론이다. 출신지를 속이고 상속녀 행세를 하며 거대한 사기행각을 부린 애나는 어디에도 없던 공간과 커뮤니티를 만들 거라고, 스스로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항상 같은 말을 되뇌었다. 무일푼이었던 애나가 그렇게까지 목표에 근접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자기 암시의 효과라고 생각한다. 될 때까지 부딪혀보라는 뜻의 “Fake it till you make it”이라는 문장처럼, 자기 자신까지도 작정하고 속이는 사람에게 속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으랴. 하지만 누구나 알듯이 먼 목표를 머릿속으로 되뇌기만 해서는 현실이 바뀌지 않는다. 꿈의 코앞까지는 갈 수 있었지만 실현하지 못한 애나에게 부족한 건 현실감이었다. 애나도 자신이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고 더 현실적이며 단계적인 계획을 세웠더라면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인정하기 부끄럽지만 나 역시 언젠가부터 내가 특별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정말로 특별할 건 아무것도 없는데, 그냥 믿는 구석이 필요해서였을 것이다. 그런 말이 아니면 나 자신을 믿기 어려우니까. 마치 뛰어난 암기력이나 언어의 융통함, 세련된 취향을 자신의 천재성과 특별함이라고 여기며 뉴욕의 사교계와 월스트리트 은행가에 무일푼으로 덤볐던 애나처럼 말이다. 실제로 그것 외엔 가진 게 없으니까 더욱 그 믿음에 강하게 기대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애나처럼 내 능력이라고 믿었던 것, 내 특별함이라고 믿었던 것이 정말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심지어 애나처럼 4개 국어도 못하고 포토그래픽 메모리도 없는걸.) 더 중요한 것은, 그 믿음이 나에게 도움이 될까?


  그런데 내가 특별한 사람이라는 믿음이 빠뜨리는 가장 큰 함정은 현실적인 설계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도, 게으름을 피우게 만드는 점도 아니다. 바로 평가를 두려워하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만약 특별하지 않은 걸로 밝혀지면 어떡하지? 사람들이 실망하면 어쩌지? 사실 나는 평범보다도 못한 사람이면 어떡하지? 이런 불안은 평가받는 자리에 놓이는 것을, 시도하는 것을 무서워하게 만든다.

  비비안의 주문은 이런 사람에게 용기를 준다. 못하면 뭐 어때, 내가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말이야. 하고 넘기는 것이다. 이런 빠른 인정이 해야 할 일을 해내고 앞으로 나아가는 데 더 도움이 되기도 한다. 여기서의 "You are not special"은 너라고 특별하지 않으니 남들처럼 이걸 해내는 수밖에 없어라고 강하게 푸시하는 동시에 남들이 해냈으면 너도 할 수 있어 라며 용기를 주는 강력한 한마디다.


  드라마를 모두 보고 나니 <애나 만들기 Inventing Anna>는 천재적인 사기꾼 한 명을 조명하는 게 아니라, 포기하지 않는 여성들을 여러 각도로 다룬 드라마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끈질긴 노력형 사기꾼 애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와중에도 고집스럽게 취재를 포기하지 않는 비비안, 의리 없는 친구라는 욕을 듣지만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맞서 싸우는 레이첼, 그리고 그 옆에서 “You’re a bad bitch.”라는 또 다른 자기 암시의 말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응원하는 케이시까지 말이다.

아기 낳는 것을 중도 포기하고 싶을 만큼의 고통스러운 순간이 내게 오진 않았으면 좋겠지만 포기하고 싶을 때, 맞서기 두렵고 요행을 바라고 싶을 때 나도 이 문장을 외쳐봐야겠다.

"나는 특별하지 않아 I'm not special."

  이제 불평은 그만하고 할 일을 하자라는 다짐과 다들 해낸 거면 나도 할 수 있다는 용기가 벌써 샘솟는 기분이다.





매거진 42 vol.2에 기고한 글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나에게 상처주는 세상을 지지하는 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