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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분노의질주 Mar 09. 2022

골목의 얼굴들

2020년 겨울의 기록

   

   내일은 치즈의 포획 날이다.

   우리 사무실 앞 골목에는 치즈와 고등어가 산다. 노란 고양이와 회갈색의 줄무늬고양이를 구분하는 말일뿐 치즈와 고등어에겐 이름이 없다. 치즈를 포획하는 이유는 치즈가 발을 크게 다친 것 같기 때문이다. 얼마 전부터 한쪽 앞발 바닥을 계속 물어뜯더니 지금은 아예 땅도 짚지 못하고 세 다리로 총총 걷는다. 치즈가 사는 골목 주변에는 음식점이 많다.


   치즈 어머니는 치즈가 어느 음식점에서 설치해놓은 쥐 끈끈이를 밟은 것 같다고 했다. 치즈 어머니는 골목 앞에서 우연히 만난 치즈의 약 3개월 차 보호자다. 나는 어떤 좁은 골목의 두 고양이의 안부에 대해, 오로지 그것에 대해서만 이야기 나누는 그런 사이를 무어라 정의해야 할지 몰라 이분의 연락처를 ‘치즈 어머니’라고 저장했다(이때만 해도 고등어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우리는 치즈의 앞발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했다. 끈끈이를 떼려고 물어뜯다가 발바닥 패드가 찢어진 건 아닐지, 발을 못 쓰니 그루밍을 잘 못 해서 애가 꼬질꼬질해진 것 같다는 이야기 등등. 긴 대화 끝에 우리는 치즈를 병원에 데려가는 게 좋겠다고 결론 내렸다. 그래서 내일은 치즈의 포획 날이다.

   그러나 이것은 길고양이에게 베푸는 선의나 낯선 고양이를 사랑하게 된 두 사람에 대한 글은 아니다. 이것은 얼굴에 관한 이야기다.


   어느 날 밤 치즈와 고등어의 골목에 다른 고양이가 방문했다. 침입자에게 집도 먹이도 빼앗긴 것을 본 치즈 어머니는 골목에 경쟁자가 생긴 것 같다며 경고해 주었다(다른 고양이들을 미워하는 것은 아니지만 먹이를 두 배로 놓고 간다든지, 집을 더 마련해둔다든지 등의 대비가 필요했다). 우리는 침입자가 언제 오는지 얼마나 자주 오는지 틈틈이 지켜보기로 했다. 어느 저녁 퇴근 후 골목을 확인하니 치즈의 집 위에 치즈가 앉아있었다. 때마침 치즈어머니에게 오늘은 침입자가 오지 않았는지 묻는 메시지가 왔다. 침입자 역시 치즈라는 말과 함께. 마찬가지로 노란 털의 고양이라는 뜻이다.


   나는 치즈의 집 위에 앉은 노란 고양이가 우리의 치즈인지 내가 알지 못하는 치즈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나에게 치즈는 귀여운 찐빵같이 납작하지도, 요염하고 도도하지도 않은 보통의 고양이의 얼굴로 기억됐다. 치즈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창피했다. 어쩌면 살을 맞대고 살지 않는 동물의 주먹만 한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게 당연한 걸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우리 집 송아지와 옆집 송아지를 구분하는 게 어려울 수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치즈어머니에게 “치즈의 얼굴을 못 알아보겠어요”라고 말할 순 없었다. 나는 골목이 어두워 치즈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했다!).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에 또 다른 출근길 치즈를 만났을 때 나는 치즈의 얼굴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또 보았다. 이제는 해가 지지 않았을 때라면 어떤 치즈를 만나도 내가 아는 치즈의 얼굴을 구별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조금은 붙었다.


   사실 나에겐 요즘 치즈 외에도 골목골목마다 익숙한 얼굴이 생겼다. 올해 새로 다니게 된 회사와 집이 모두 같은 동네에 있어 한 곳 중심으로만 활동해서인지, 그런 능력이 새롭게 생긴 건지 잘 모르겠다. 어쩌면 엄마의 능력을 닮아가는 걸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몇 번 보지 않은 사람의 얼굴도 곧잘 기억하고, 방문 횟수와 상관없이 단골이 되어버리는 그런 재주가 있다. 어렸을 땐 물건을 고르거나 계산을 하면서 곧잘 대화를 이어가는 엄마가 의아하거나 성가실 때도 있었는데.


   나의 반가운 얼굴들은 편의점과 문방구의 사장님이나 직원일 때도, 골목의 발렛 기사님일 때도, 매일 같은 테라스 자리에 앉아 광합성을 하는 가게 사장님일 때도 있다. 우리는 날씨나 장사에 대한 얘기를 나누거나 커피 한 잔이나 초코파이 등의 간식을 주고받는다. 혹은 우리는 서로 알지 못하고, 매일 그곳을 지나치거나 창문 건너로 바라보는 나만이 속으로 반가워할 때도 있다. 때론 '얼굴'이 아닌 것으로 인사를 해온다. 햇빛이 닿는 위치에 놓인 의자나 가게 앞 같은 자리에 주차된 오토바이, 먹다 만 사료가 남아있는 그릇 같은 물건 일 때도 있다.


   아무튼 나같이 꽤나 심각한 방향치, 길치가 어느 지점에 무엇이 있다는 것, 있을 거라는 걸 안다는 건 신기한 일이다. 마치 헨젤과 그레텔처럼 골목마다 기억을 뜯어 놓고 온 것 같다. 동시에 어느 곳을 지나며 무언가를 마주치기를 기대하는 것은 설레면서 두려운 일이기도 하다. 기대한 장소에서 그들이 보이지 않았을 때 왜 오늘은 보이지 않는지 궁금해하거나 걱정해야 하고, 오랫동안 혹은 완전히 사라졌을 때는 그 빈자리를 더 크게 느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미래에 올 아쉬움보단 오늘의 반가움이 더 크기에 나는 내일도 골목을 지나며 나의 아는 얼굴들이 잘 있는지 열심히 눈길을 줄 것이다.


*업데이트: 골목의 반가운 얼굴 치즈는 동물 병원에 접수하면서 이름이 생겼다. 나는 이제 치즈의 얼굴뿐만 아니라 이름까지 알게  됐다. 병원에서 돌아온 레오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그땐 정말 죄책감이 클 것이다.

**업데이트: 치즈어머니가 치즈를 입양했다. ‘치즈어머니’는 정말로 치즈 어머니가 되었다. 치즈는 이제 골목의 반가운 얼굴이 아니라 누군가의 현관문 뒤의 반가운 얼굴이 되었다.







매거진 42 vol.1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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