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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분노의질주 Apr 05. 2022

쓴소리의 역효과


  코트를 벗지마. 영어로 어떻게 말할까요?

  유튜브 프리미엄 이용자가 아니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이렇게 시작하는 영어교육 서비스의 광고를 보았을 것이다. 얼마 전 SNS를 보다가 타일러가 출연하는 이 광고 시리즈가 불쾌하다는 글을 여럿 마주쳤다. 나도 유튜브에서 볼 때마다 묘하게 광고 건너뛰기 버튼이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꽤나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특정 상황에서 말하고 싶은 문장을 영어로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 문제를 던지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 광고는 답이 무엇일지 고민하기도 전에 “삐익-”소리가 난다. 오답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타일러도 “삐익-” 또는 “땡-”을 외치고, 이어지는 문장은 “아니에요.” “이상해요” 또는 “틀렸어요”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동시에 손으로 x표시를 긋는 4단 콤보를 맞아야 한다. 그렇게 말하면 상대방이 불쾌해해요. 상대방이 당황하거나 이상하게 생각할 거예요. 내가 한 대답도 아닌데, 이미 망신을 당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외국어 회화 실력 향상의 첫 번째 조건은 두려움을 갖지 않고 말하는 것이라 들어왔는데, 실수가 두려워 입을 떼긴커녕 원어민을 보면 도망부터 가야 할 것 같다.


  UX 라이팅 분야에서는 한 때 자주 사용되었던 ‘confirmshaming ’또는 ‘manipulink’ 접근법에 대한 의문이 몇 년 전부터 제기됐다. ‘shaming’이나 ‘manipulate’와 같은 단어와의 조합에서 알 수 있듯이 이는 사용자의 죄책감과 불안감을 건드리는 방식으로 심리를 조종하여 원하지 않는 행동에 동의하게 만드는 기술을 말한다. 어떤 딜이나 오퍼를 제안하는 화면에서 혜택을 무시하고 창을 닫으려고 할 때 평범한 닫기나 아니오 버튼 대신 “됐어요, 혜택을 놓칠래요” “기회를 놓칠래요”와 같은 문장이 적힌 버튼을 눌러야만 창을 닫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절약을 돕는 서비스라면 “그냥 돈 안 모을래요” 라던지, 언어 향상을 도와주는 서비스라면 “더 잘하고 싶지 않아요”와 같은 문장이 들어가는 식이다. 지금 하는 당신의 선택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러한 접근법이 유행한 이유와 단기적 효과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이러한 방식은 사용자와 긍정적인 관계를 쌓는 방향이 아니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사용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은 사용성을 높이는 것뿐만 아니라 사용자가 긍정적(!)인 경험을 얻고 유대감을 쌓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유튜브 광고가 단기적으로는 궁금증을 유발하고 더 정확한 표현을 공부해야겠다는 자극을 줄지는 몰라도, 장기적으로 긍정적인 경험이 될 수 없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활동을 잠정적으로 중단한 브이로거 Emma Chamberlain을 조명하며 직업인으로서의 유튜버의 고충과 유튜브 생테계의 문제점을 분석한 영상을 재밌게 본 기억이 있다. Colin and Samir의 해당 영상에서 소개된 엠마는 1190만명의 구독자를 지닌 6년차 브이로거인데, 최근 갑자기 영상을 올리지 않아 많은 사람들의 걱정과 궁금증을 샀다. Colin과 Samir는 매주 영상을 올려야하는 꾸준한 생산성의 압박과 유튜브가 모든 인플루언서 활동의 기반이 되기 때문에 발생하는 반강제성 등에 주목했다. 그 중에서도 크리에이터들이 채널을 관리하고 통계를 확인할 수 있는 서비스인 ‘유튜브 스튜디오’의 UX가 갖고 있는 문제와 그 부작용을 꼬집었는데, 창의성과 생산성의 자극이 목적인 툴이 어떻게 반대의 효과를 가져오는지가 흥미로웠다.

  유튜브 스튜디오에서는 약 2주동안 영상을 올리지 않으면 대시보드의 아이콘들이 초록색에서 회색으로 변하고 “지난 영상을 올린지 00일이 됐어요. 영상 업로드가 줄어 시청률이 감소하고 있어요” 등의 알람이 뜬다고 한다. 내가 올린 지난 영상들과 비교해 최근 업로드한 영상의 성과가 좋으면 콘페티가 터져나오고, 지난 영상들보다 조회수가 잘 나오지 않으면 줄어든 시청자수에 대한 경고성 문구가 뜬다고 한다. Colin과 Samir는 이 모든 세세한 언어적, 시각적 장치들 -아이콘 색깔의 변화와 축하하는 모션의 그래픽, 개인화된 노티 등-이 크리에이터를 자극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오히려 심적 부담감과 중압감을 높이는 장치로 작용한다고 말한다. 생산성의 지속성을 끈질기게 강조하는 이 플랫폼을 들여다보고 있는 한 아무도 스스로 쉴 수 없기 때문에, 죄책감 없이 휴식을 갖고 싶다면 유튜브 스튜디오를 아예 켜보지 말아야할 정도라고 이야기한다. 동기부여와 자극을 위한 커뮤니케이션이 긍정적 경험을 방해하는 또다른 예이기도 하다.

  

  위 유튜브 스튜디오의 동기부여 장치는 오늘의 나(또는 내가 만든 결과물)와 과거의 나와의 끊임없는 ‘비교’가 핵심이라 생각하는데, UX분야에서는 이런 비교를 통한 자극은 여러 곳에 활용된다. 대표적으로는 타인과의 비교인 사회적 증거 (social proof)가 있다. 사회적 증거는 다른 사람들의 선택-클릭, 좋아요, 댓글 등의 행동을 보여줌으로써 다수의 선택을 따르고자하는 심리를 이용해 행동을 촉구하는 방법이다. 처음 ‘사회적 증거’라는 단어를 알게 됐을 때 바로 떠오른 사이트는 부킹닷컴과 호텔스닷컴 같은 숙박업체 예매 사이트였다. 현재 몇명이 나와 같은 방을 보고 있는지, 마지막으로 결제된 예약은 언제인지 알려주는 알림때문에 쫄아든 마음으로 예약을 황급히 서둘렀던 기억이 분명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회적 증거 역시 반드시 효과적인 것 만은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부정적 사회적 증거(negative social proof)의 한 예는 “작년 투표율이 00%밖에 되지 않았다.” 와 같은 비교 수치를 투표율을 장려하기위해 선거 캠페인에 사용하는 것이다. 투표를 유도하길 기대했지만 연구 결과, 낮은 투표율의 공개는 투표율에 대한 기대치를 낮춤으로 인해서 오히려 유권자들에게 동기부여가 되지 못했다고 한다. 또, 패션이나 음악 등 취향에 관해서는 대다수의 취향과 겹친다고 말하는 것이 비효과적일 수 있다고 한다. 자기 표현(self expression)과 독자성, 개성을 찾는 고객들은 너무 대중적인 것에는 끌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상품의 구매자 수나 인기도를 표현하는 것이 꼭 모든 사람에게 효과적이진 않다는 뜻이다. 개성 추구때문은 아니지만, 나도 다수의 선택을 피하고 싶은 때가 있는데 바로 채용 필드에서다. 링크드인의 채용글 목록을 보면 해당 포지션에 지원한 인원수를 가장 상단에 하이라이트하여 “100명, +200명이 지원했어요” 하고 알려준다. 수많은 지원자수에 본능적으로 넘겨버린 나는 이걸 보고 지원하는 사람은 정말 대단한 용기를 지닌 사람이겠다 생각했다.

  나 자신과의 비교든 타인과의 비교든 비교를 통한 자극이라는 건 양날의 검인 것 같다. 잘 사용된다면 행동을 촉구하지만, 잘못 사용된다면 오히려 금방 포기하게 만들기도 한다. ‘비교’라는 것의 성질의 본질이 본래 그렇기 때문일거라 생각한다. 약과 독이 동시에 될 수 있는, 자극이 되거나 질책이 될 수 있는 이중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의 죄책감을 건드리든 승부욕을 건드리든 우리는 왜 화면 속 아주 짧은 문장에도 상처를 받고 행동에 영향을 받을까? 건너뛰기 버튼을 누르고, 알람을 닫고, 스크롤 해버리면 그만인데 말이다. 무시하고자 하면 쉽게 지나칠 수도 있는 찰나의 문장인데. 바로 지구 상에서 말을 하는 생명체가 인간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때문에 사람들은 그게 물건이든 형체 없는 목소리나 텍스트든지 간에 일단 언어로 말을 주고받으면 무의식적으로 인격체로 인식한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조금 바보 같고도 이보다 더 단순할 수 없는 원리다.

  우리는 앞으로도 대화를 통한 서비스 경험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광고는 점점 시청자 개인에게 맞춰지고, 날씨 앱을 켜거나 타이머를 맞추는 대신 시리에게 말을 건넨다. 핸드폰만이 아니라 앞으로 인공지능이 발달함에 따라 인간이 대화를 주고받는 사물은 점점 다양해질 것이다. 영화 <듄>에서 주인공 옆을 맴도는 빛나는 구 같은 게 우리 곁을 따라다닐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들이 다중인격처럼 보이지 않도록, 혐오와 차별의 말을 하지 않도록, 그리고 그전에 가장 기본적으로 무례한 상대가 되지 않도록 말을 다듬고 주시하는 것은 인간의 역할이다. 언어를 확립하고 말을 다듬는 일에 전문성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미국 공영 라디오 방송국인 NPR의 브랜드 가치 중 하나는 ‘존중’이라고 한다. 누구든지 품위와 연민으로 대우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매체로서의 정확성이나 책임감 등이야 포함되는 게 마땅한 가치들인데, 존중하는 태도로 커뮤니케이션하라는 점이 핵심가치로 포함되어있는 게 어딘가 당연하면서도 신선했다.

  

모든 처음은 매끄럽지 못하다. 처음부터 네이티브 같이 자연스러울 수 없는 영어 회화처럼 말이다. 잘하고 있다고, 좋은 기회는 언제든 다시 돌아오니 이번에 놓쳤어도 괜찮다고, 생산성을 잠시 내려놓아도 큰일나는 건 없다고 말해주는 건 나를 데이터로 바라보는 상대에게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걸까. 종종 잊어버리곤 하지만 결국 서비스라는 것도 인간의 창조물인 걸 생각하면 사람이 사람에게 바라는 것을 충족해주기를, 나를 존중해주기를 바라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참고자료: <마이크로카피>(킨너렛 이프라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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