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매 순간 짜릿한 건 행복이 아니라고, 행복과 자극은 다르다는 대사를 봤다. 오금이 저릴 만큼 기분 째지는 일이 매일 있을 순 없다고, 삶은 사실 시시하다는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때그때의 기분이 아니라 현재 자기의 자리와 자신에게 만족하는 상태야말로 ‘행복’이라고 했다. 이 말은 나를 안심시켰다. 얼마 전 누군가로부터 들은 내게 어딘가 우울한 경향이 있어 보인다는 말이 신발 속 모래처럼 남아 거슬리던 때였다. 내가 충분한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사는 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정작 나는 내가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했기에 들었을 당시에는 조금 의아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내 시시한 삶은 정상적이고 삶은 그저 평범한 일상의 연속이라는 것을 확인받고 안도했다.
역시 행복에는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 적당하지 않아서 괴로운 많은 것들 중 하나를 떠올리자면, 나는 오랫동안 그림에게 거리를 두지 못했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그렸는데, 매번 짜릿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매번 짜릿함을 기대했다. 매번 걸작이 탄생하고 감탄하기를 바랐다. 기발하고 대단한 뭔가를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내 그림은 나에게 기대만큼의 짜릿함을 주진 못했다. 작업을 지속하는 건 자신감을 잃어가는 동시에 행복과 재미를 잃어가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나와는 반대로 현명한 예술가 K가 등장하는 <당일치기 여행자>라는 하늘 작가님의 글을 읽고 해결책과 동시에 위로를 받았다. K는 무언가를 온 맘 다해 깊이 사랑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매일의 재미를 추구하는 재미주의자로 묘사된다. 심지어는 K의 전공인 음악에게도 “반쯤의 진심만 걸쳐놓은 듯”하다고 말한다. 그 모습을 본 하늘 작가는 “어쩌면 우리가 음악으로부터, 문학으로부터 원하는 만큼 충분히 사랑받지 못했다고” 느끼기 때문에 반쪽짜리 사랑을 줄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라고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본다. 그리고 K와의 즉흥 여행을 통해 당일치기 같은 K의 사랑법도 진심임을, 긴 여행만큼이나 낡지 않고 오래오래 유지됨을 알아차린다.
미술을 사랑하는 쪽은 항상 나였기 때문에 나는 작가님의 말처럼 반대의 경우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미술이 나에게 주는 사랑 말이다. 글에 등장하는 구절처럼 충분히 사랑받지 못했다는 말이 적절하겠다. 나뿐만 아니라 어쩌면 예술은 애초에 그 누구에게도 완전한 사랑과 안정감을 주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예술가들이 창작의 고통에 허우적대고, 생활고에 시달리고, 심지어 불운하게 생을 마감을 한 사례도 많다는 걸 떠올리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그림을 그렸던 짧지 않은 시간의 경험을 돌이켜보건대 예술은 우리를 조바심 나게 하고 항상 나 자신이 모자라다고, 부족하다고 느끼게 만드는 성격이 있는 것 같다. 오죽하면 대학시절에는 “내 작품의 구림을 잘 참아낼 수 있는 자만이 작업활동을 오래 할 수 있다”는 선배들의 말이 대를 이어내려 왔다. 간혹 마음에 드는 작업이 나왔을 땐 흡족함과 성취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건 잠시 뿐이었다. 그런 순간들은 우연히, 그저 운이 좋아서 일어나는 일 같았고 예술은 나에게 행복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늘 작가에게 K가 있듯이 나에게도 배우고 싶고 자랑하고 싶은 친구 P가 있다. 디자이너인 친구 P는 최근에 한 인터뷰에서 후배 세대에게 한마디를 남겨달라는 요청에 "작업을 하면서 본인이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길 바란다"고 했다. “우리가 예술에 사랑을 쏟고 타인을 즐겁게 하는 만큼 자신도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고 나를 깨우쳐주었다.
미술을 하며 나의 행복해질 권리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매일 바짝 그림을 쫓아갔다. 매 순간이 짜릿함의 연속일 수는 없다고, 시시함을 견뎌내는 적당한 인내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나는 더 오랜 시간을 즐겁게 보낼 수 있었을 것 같다. 그래도 지금 나는 적당한 거리두기를 터득해가는 중이다. 친구 K를 향한 하늘 작가의 사랑 덕분에 나도 K의 사랑법을 배운다.
“깊이 사랑하지 않는 방식으로 깊이 사랑하기”를.
매거진 42 vol.2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