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친구였던, 내게는 친한 여자 동생과의 통화.
수 개월이 지났지만 내게는 아물어지지가 않는 그와의 시간들이 자꾸만 찔러대서 나는 일부러
그녀와의 통화를 피하고 있었다.
그와 이별 후 거의 내 남자에게 통화하 듯
그녀와 하루의 마지막에 통화를 자주 했고, 술 먹고 집으로 귀가할 때의 내 주사 (전화통화하기)를 이제는 더 이상 그에게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내 주사를 온전히 받아주는 고마운 동생이었다.
하지만 요즘처럼 가을이 깊어갈 수록 내 아픔도,
내 기억들도 더욱 짙어져 그녀와의 통화조차 부담이 되었다.
그랬다가 오랫만의 통화에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 결국은 그의 근황을 듣게 되었다.
앞으로는 그 어떤 여자에게도 잘 해주지 않을 거라고 울면서 얘기하더란다.
무엇이 그렇게 그를 억울하게 했을까?
서로 아낌없이 주었고 최선을 다함에 대해서는 한치의 의심도 없었던 서로였는데 무엇이 그에게 그렇게 옹졸한 말을 하게 했을까?
마음이 또 한 번 아려왔다.
그 또한 많이 아파서 외마디 비명처럼 그렇게 내뱉은 말일까?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동생은 알고 있었다.
그를 사랑했던 내 마음과 이별 후에도 고마워 하고 그리워하고 있는 내 마음을.
그리고 그 또한 나를 많이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도.
하지만 어찌할 수 없는 우리의 한계에 대해서 담담하게 얘기하는 내게 동생은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우리가 못다한 사랑만큼 너는 뒤돌아보지도, 너무 멀리 보지도 말고 지금 최선을 다해서 사랑하고 사랑하라며 통화를 끝냈다.
한 숨이 나왔다.
더 이상 내가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냥 그리워하고 기억하지만 이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
슬펐다.
언젠가는 그에게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어렴풋한 기대를 접고 이제는 어딘가에 버리고 와야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갑자기 휴가를 내었고 그를 버릴 의식을 치르고 내 마음도 정리를 해야겠다는 결심으로 당일 속초여행을 잡았다.
내 자신에게도 이런 의식이 필요하리란 생각이 들었다.
자꾸만 커져가는 미련이, 그리움이
다시 돌아가도 결국은 감당하지도 못할 것을 알면서도 자꾸 그에게 돌아가라는 얘기를 했기 때문이다.
확신시켜 주어야 했다.
안된다는 걸.
서로가 더 버거워질, 더 부담스러워질 뿐인 재회는 꿈도 꾸지 못하도록 그 싹을 이제는 잘라내야 한다고.
맨 뒷자리에 앉아 창 밖을 내다보았다.
잔잔한 가슴 속...의외로 담담하다.
멀찌감치 두 커플이 앉았다.
이른 아침의 시간에 둘의 옷 차림과
주고받는 대화의 음성이 무척이나 들떠 있는 그들의 마음을 말해 주었다.
도란도란 얘기하면서 제법 긴 키스를 나누는 두 사람.
그가 항상 나를 대전까지 배웅해 주던 버스 여행이 생각이 났다.
그와의 따뜻했던 기억들이 다시 이어져 끝이 날 줄을 몰랐다.
눈을 질끈 감고 잠을 청했다.
어느새 친구가 기다리는 가평에 도착해 함께 속초로 향했다.
제법 많은 시간을 함께 얘기를 나누며 사진도 찍으며 담담한 시간을 보낸다.
긴 시간을 달려 도착한 속초.
잔잔한 포구에서 나는 친구와 술잔을 부딪히며 얼큰히 취했다.
맨 정신으로는 그를 버릴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친구에게 말했다.
이제는 진짜 내 인생을 살아보겠다고...
누구에게도 맞춰주지 않고 내 의지대로, 조금은 외롭더라도 혼자서 씩씩하게 살아내 보겠다고 의지를 불태우며 나는 또 한 잔을 삼키려 했으나 되려 울컥하고 눈물이 올라왔다.
포구는 참 잔잔하고 예뻤다.
그와의 추억과 기억과 그를 그 바다에 버렸다가는 금방이라도 큰 파도가 생길 것 같았다.
하지만 버리기로 했다.
그와의 기억들...
그리고 그를 남겨두고 싶어하는 마음들...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다시 버스에 올랐다.
취기가 올랐지만 잠이 올 것 같지가 않았다.
음악에 무심히 빠르게 스쳐 지나는 밤풍경에 이유모를 눈물이 자꾸만 흘러내렸다.
그를 버리기로 한 일은 성공하지 못 한듯 하다. 그가 그리웠고, 그에게 달려 가고 싶은 마음은 더욱 격렬해졌을 뿐이다.
그와 다시 버스를 타고 내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아직은 안 되는 것인가 보다.
아직은 내게서 떠나기가 어려운가보다.
오늘은 그를 버리지 못 했지만 언젠가는 떠나가야 한다는 걸 이젠 알아차렸겠지?
아직은 나도 안 되나보다.
하긴 내가 이때까지 그와의 기억을 하나하나 너무 곱게곱게 잘 보관했다가 한꺼번에 버리기에는 무리가 있었겠지.
아직은 너무 아물지도 않은 딱지를 떼어내듯 이른 것이겠지.
그래...그런가보다..아직은 아닌가보다.
혼자이지만 늘 둘이 지내왔던 시간.
이제 천천히 진정 홀로됨을 연습해야할 시간을 가져야 할 듯하다.
다음번에는 진짜 매몰차게 버리고 와야할 그날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