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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태리 Oct 21. 2024

남자친구가 생긴 기쁨에 기부를 시작했다.

승가원 소액기부입니다.

그 유명한 시트콤 프렌즈를 몰아보고 있다. 넷플릭스에서 10월 31이면 서비스가 종료된다는 공지를 보았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문장을 따라 하면서 봐서 한편 보는데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덕분에 3년째 보면서도 시즌9까지 밖에 못 봤지만 오히려 프렌즈 모든 주인공들에게 무척 정이 들어버렸다.

오전 내내 프렌즈를 보던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챈들러랑 모니카네도 재밌잖아!!'


시즌 7의 마지막에 챈들러와 모니카가 결혼하면서 나도 모르게 이제 로스랑 레이첼만 재밌겠다는 생각을 했나 보다. '공주와 왕자는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동화처럼 그 뒤는 기대할 게 없다고 느꼈던 듯싶다. 그래서 갑자기 결혼 8년 차 아줌마로서 지금 나는 남편과 재밌게 살고 있는가라는 고민을 하게 됐다.




우리의 시작은 2012년 5월이다. 아이들 생일 말고는 기념일을 전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나라서 잊어버리고 살고 있었다. 그러다 승가원 직원분과 100번째 기부와 관련해 인터뷰를 하면서 기부의 시작이 2012년 5월인걸 알았다. 나는 취업을 2013년에 했다. 그러니까 취업도 안 한 백수가 정기 기부를 시작한 거다. 그때 특별한 건 딱 하나밖에 없었다. 남자친구가 생겼다.


남자친구 그러니까 지금의 내 남편은 내 첫 남자친구다. 내 나이가 그때 24이었으니 첫 연애치고 늦은 편이다. 무척 기뻤었나 보다. 지하철역에 있던 승가원 홍보 부스를 보고 신나게 다가가 최저 금액 5천 원으로 기부를 시작했다. 그때부터 취업, 결혼, 아이출산 등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금액을 올려서 지금은 3만 5천 원을 정기 기부 중이다. 복직하면 조금 더 올려야지 싶다.


우리는 그러니까 아주 평범하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부부들처럼 로맨틱하거나 사랑이 넘치는 그런 거 말고 같이 있으면 편하고 웃기다. 서로 엄청 안 맞는데 또 잘 맞는다. 예를 들어 남편은 피자, 스파게티 이런 걸 좋아하면 나는 한식 파다. 하루에 한 끼라도 쌀밥을 안 먹으면 힘이 없다. 밥은 2 공기도 거뜬하지만 피자는 1조각도 겨우 먹는다. 여유시간을 보내는 것도 무척 다르다. 아이들이 잠들고 나면 남편은 게임을 하고 나는 유튜브나 만화를 본다. 남편은 만화를 싫어하고 나는 게임을 싫어한다.


그런데 유머코드, 좋아하는 분야가 비슷하다. 덕분에 영화나 드라마도 같이 자주보고 유튜브 알고리즘도 비슷하다. 무엇보다도 서로가 하는 일을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간다. 막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고 응원해주진 않는데 그냥 잘 노는구나 하고 내버려 둔다. 이래서 별로 투닥거릴 일이 없나 보다. 남편은 매주 토요일마다 운동을 가고 평일 오후에도 하고 싶은 일 하고 들어올 때가 많다.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나지 않는다. 그냥 오늘도 잘 지냈나 보다 생각할 뿐이다. 주위에선 내가 좋은 와이프라고 하지만 남편도 내가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내버려 두는 건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은 내가 하루종일 뭘 하는지 모르지만 남편은 정확히 알고 있다. 집안일에 신경 쓰기보다 영어공부, 노무사공부, 학교행사준비, 브런치 쓰기 한다고 바쁜걸 다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다. 노무사 준비하려고 인터넷 강의를 신청해도 되냐고 물어봤을 때 그런 건 물어보지 말고 하고 싶으면 하라고 해서 조금 많이 감동받았다. 남편은 내가 공부할 거라고 온갖 생색을 다 내다가 책은 발치에 두고 소파와 한 몸이 되어 유튜브를 보고 있었도 신기해할 뿐이다. 가끔 그렇게 공부해선 못 붙는다고 그냥 같이 놀자고 할 때 좀 찔리긴 한다.


남편이 얼마 전에야 이야기 해 준게 있다. 처음 내 글씨를 보고 글씨를 정말 못쓰는구나 글씨를 이렇게 대충 쓰는 거 보면 성격 진짜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내 글씨를 보고 좋게 생각한 사람은 없을 거라고 믿었는데 그게 남편이라니 나름 로맨틱한 거 같다.




쓰다 보니 더 별게 없다.  아이들 앞에선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하는데 남편과 둘이 있는 시간은 완전 반대가 된다. 책 읽는 모습, 부지런한 모습, 온화한 미소 짓는 얼굴을 하려고 하지 않고 그저 있다. 그래서 그런가 남편이 벌써 나이가 38살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 나도 내가 35이라는 게 이상하다. 대학교 때랑 별 차이가 없는 거 같은데 조금 있으면 중년이라니 신기하다.


우리도 그저 모니카랑 챈들러처럼 서로 이해하면서 잘 지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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