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리사 친구들에게 이 전시를 추천해
“가장 알맞은 것을 고르세요.” 자연 계열의 딸아이가 가장 선호하지 않는 유형의 문제이다. 가장 알맞은 것을 고르라니, 결국 다 맞는 말이라는 얘기잖아. 왜 가장 알맞은 것을 골라야 해? 가장의 기준은 누가 정한 거야? 투덜대는 아이의 말에 웃음이 샜다. 나 어렸을 때 모습을 보는 듯했다. 대학 전공을 따라 패션 디자이너나 엠디가 되지 않고 새롭게 공부해 변리사가 되었던 건 맞고 틀리고의 기준이 분명한 것이 편한 내 성향 때문이었다.
변리사는 법과 과학기술을 저글링하며 일한다. 법과 과학기술은 전혀 다른 학문이지만 묘하게 닮아있다. 엄격하게 정해진 요건을 확인하고, 맞는지를 판단한다. 무질서한 요소들을 요건에 맞게 정리하고 배열해 요건에 맞추기도 한다. 유연할 때보다 경직될 때가 많고, 우회보다 직진을 선호한다. 유연하게 예외를 인정하면 일이 잘못되고, 직진할 수 있는데 우회하면 클라이언트의 불필요한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성향과 적성에 맞는 직업을 찾기도 하지만, 직업이 성향과 적성을 바꾸기도 한다. 오래 꾸준히 변리사 일을 하면 가부의 판단에 민감해지고, 놓치는 부분 없이 꼼꼼하게 챙기고 또 챙기게 된다.
강남 한복판 코엑스 맞은편 건물의 슈페리어 갤러리는 나의 아지트이다. 오늘도 복작복작한 인파에 섞여 걷다 건물 입구로 들어섰다. 익숙하게 지하로 내려가 새하얀 벽면에 여유롭게 걸려있는 작품들을 만났다. 갤러리 입구 자체가 별천지로 들어서는 문이다. 오늘 나의 별천지는 남지은 작가와 조상은 작가의 2인전 <I think, I see, I feel> 전시였다. 남지은 작가의 작품들에는 문이나 창문이 등장했다. 그 문이나 창문을 통해 전혀 다른 두 개의 세계를 직접 보여주기도 했고, 문 뒤편 세상을 우리의 상상력에 맡기기도 했다.
오늘 내 호기심은 거대한 선인장 가득한 숲의 생뚱맞은 나무문에 머물렀다. 까치발하고 있는 고양이의 뒷모습, 팔랑팔랑 나부끼고 있는 나비도 나무문을 열어젖히고 싶은 마음에 응원을 보냈다. 뒷짐 지고 고요히 나무문을 응시하고 있는 새의 시선도 용기를 보탰다. 저 문을 열고 저벅저벅 걸어 들어가면 어떤 세상이 있을까. 상상을 초월하는 유토피아가 있을 수도, 상상만큼 고요하고 평안한 세상이 있을 수도,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세상이 있을 수도 있다. 어떤 세상을 만나든 괜찮다. 낯선 문에 다가서 팔을 뻗고 힘주어 문을 밀고 들어섰다는 경험이 중요하다. 미지의 세상에 다녀온 기억은 딱 맞아떨어져야 하는 경직되고 반복되는 일상에 활력이 될 테니까.
슈페리어 갤러리가 있는 테헤란로에는 특허법인이 많다. 하루 정도는 식당의 상차림 앞에 머무는 대신 슈페리어 갤러리를 방문하는 건 어떨까. 남지은 작가가 지어둔 초록빛 공간을 누비며 그 안의 낯선 문 중 나에게 가장 잘 알맞은 문을 선택하고 간단히 글을 써보자고 권하고 싶다. 배는 덜 부를지 몰라도 시야가 밝아지고 호흡이 맑아질 것이다. 정답 말고 가장 어울리는 문을 골라 글을 써보면 맞고 틀리고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느라 수일 동안 풀리지 않았던 심판 서면이 단숨에 써지는 마법을 경험할지도 모른다.
나에게 보내는 질문 :
나에게 가장 어울리는 걸 골라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