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흐르면

시간에 속지 않기로

by 박율


시간은 도망치는 게 아니다.

우리가 그저 달려가는 것이다.

누가 우리를 쫓는 것처럼.

아니면 어디로 가야 한다고 끝없이 재촉하는 것처럼.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흐르는 건 우리가 붙잡지 못한 순간들이다.

아침에 흘린 커피의 향기,

서랍 속에 묻어둔 편지의 먼지,

편지를 쓴 나와 그 편지를 읽던 누군가의 얼굴.


시간 속에서 잃어버린 기억들은

어디론가 녹아들어 우리의 숨결과 표정,

잊었다고 믿지만, 시간은 그런 걸 허락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 어른이 된다고 했다.

하지만 어른이 되는 건

이유 없이 꾹 참는 법을 배우는 일이었고,

조금 덜 기대하고 덜 실망하는 연습이었다.

그게 꼭 좋은 일인지 누가 말해줬던가?


시간은 사실 굴레 같은 건지도 모른다.

계속해서 ‘흐른다’고 믿게 하면서,

계속 ‘지금’이라는 이름의 방 안에 갇히게 만드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미래를 향해 달리게 하고,

끝내 지나간 과거를 뒤돌아보게 만든다.


시간이 흐른다는 말을 이제 그만두면 어떨까?

흐르는 게 아니라,

늘 거기 있었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시간은 흐른다기보다 우리를 껴안고 있는 것이라고.

과거와 미래는 손을 맞잡고 지금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그렇다면 시간 속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도,

잃어버린 적이 없었던 것이 된다.


그러니 이제 시간에 속지 않기로 하자.

‘흐름’이 아니라 ‘존재’를 살기로 하자.

우리가 어디로 향하든,

사실 어디에도 가지 않을 우리 자신을 살기로.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게 새로워질 거라 믿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이미 충분히 새롭고,

이미 충분히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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