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102
기우뚱거리는 마음을 토지에 의지했던 날들
선생님께 폐가 될까 전전긍긍하면서도 읽어내는 그 상태가 계속되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평산책방에서 공모한 책친구 독후감에 토지로 응모했다. 회사에 앉아 어지간히도 일이 하기 싫던 날 두 시간 동안 후루룩 썼다. 하고 싶은 얘기는 어느 방향으로도 그득했다. 제한된 페이지 수 안에 미처 다하지 못한 마음이 남을까 이리저리 퍼즐을 맞추듯 페이지를 마무리했다.
상을 탔다.
내 마음을 읽어주셨을까.
읽다가 코가 찡했다는 분들이 꽤 계셨다. 나는 쓰기 바빴는데 내 마음이 전해졌을까.
내 글을 읽고 눈물이 날 뻔했다니... 너무 낯선 감각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게 상보다 더 좋았다. 혼자 나 좋아서 쓴 글에 마음을 보여주시는 분들의 존재가 놀라웠다. 꽤 여러 분이 그렇게 말씀해 주셨다. 환하게 몰려나오는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모르겠는데 동시에 그저 놀랍고 감사하고... 행복했다. 토지의 나비효과는 어디까지일까 했는데 묵힌 마음에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들이 스며든다.
토지를 읽으며 스스로에게 했던 질문들
내 깜냥으로 부끄럽지 말자 해온 다짐들
그것만은 잊지 말아야지.
살면서 부대끼는 순간들이 있다. 그게 한 시점이기도 하고, 돌아보면 한 때이기도 하고 한참 지난 후에 꼽아보니 얼마간 기약할 수 없는 기간이기도 하다. 마음은 속절없이 가라앉고 남들 앞에 내놓기 부끄러운 이 하찮은 고통이 세상의 전부인 것 같아 거리를 두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싶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꿈같은 일이다. 내 몸에 닥친 일을 그저 꾸역꾸역 견디며 하루하루 지나왔는데 이게 정말 끝은 있어? 어떻게 이렇게 매번 새롭게 다시 시작하는 기분이 들까, 정말 전생에 내가 죄를 많이 지었나 한탄을 해보지만 그렇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묵묵히 지나야 했다. 한숨이 나오다 목 언저리로 말려들어가는 것 마냥 사는 일이 참 벅찼다. 그 때 다시 토지를 만났다.
토지는 오래 전 고등학생 시절 야자시간에 읽었었다. 공부 빼고 다 재밌던 때라 휘몰아치듯 몰려오는 평사리 얘기가 너무 재미났다. 평사리 사람들이 간도로 이주를 하고 바뀐 환경에 적응이 어렵던 것처럼 나도 어쩐지 마음이 붕붕 떠 2부를 마저 다 못 읽고 미뤄두었었다. 23년 초, 친구가 같이 토지를 읽어보지 않겠냐 했다. 애기엄마인 친구들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새벽 다섯 시 줌을 켜고 모여 앉아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각자의 토지를 읽었다. 그러다 줌이 끝나는 것도 모르고 화면이 닫히기도 했고 책 읽는 친구들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기도 했다. 시간이 다될 즈음 인사를 하는 날은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토지를 다 읽고도 너무 이른 시간이라 다시 자리에 누워 잠을 더 자는 날도 있었다. 그래도 포기하기는 싫었다.
나는 좀 비겁하게 토지 속으로 도망쳤다. 내 일이 아무리 고단한 들 엄마가 종놈이랑 도망쳤는데 아버지가 죽고 태산 같던 할머니마저 병으로 떠나 길상이 봉순이와 오종종 남겨진 어린 서희만큼의 고통은 아니었다. 스르륵 빠져들었다. 어릴 때 본 드라마 토지 속 인물들이 머릿속에서 자동재생 되곤 했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을까 했던 토지를 한 권 한 권 사 모았다. 스무 권을 다 갖춘 날 마음이 얼마나 든든하던지 지치지 말고 오래 천천히 가자. 같이 가자. 토지는 이미 기둥 같았다.
독박육아를 견디는 친구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소중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박경리 선생님이 풀어내시는 이야기 갈래가 한치 앞이 안보이게 치열했다. 내 일 따위야 일도 아니다. 나를 둘러싼 사건을 잊고, 시간을 잊고, 구한말의 평사리로 밀려들어가 어쩐지 마음을 거둘 수 없는 구천이와 이름도 없는 별당아씨의 이야기가 안타깝고, 첫 마음을 못 잊어 돌아온 월선이의 매일이 그렇게 속이 상한다. 그렇게 아침을 보내고 출근하면 그럭저럭 버티고 하루가 가고 또 울다가 퇴근해도 내일 일어날 이유가 있어 잠들 수 있었다. 봄이 되고 여름이 된다. 시간은 얼마나 정직하게 흐르나. 토지 속 인물들도 고스란히 시간을 걷고 나는 여기서 내 시간을 걷는다. 버틴다. 선생님 저 이런 마음으로 계속 읽어도 괜찮을까요? 어쩐지 죄송해 속으로 자꾸 물어봤다.
읽는 행위만으로도 즐거웠다. 타이밍 절묘하게 한 달에 한 권 토지를 읽고 줌으로 토론하는 모임이 생겼다. 읽다보니 평사리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던 차였다. 김하나, 황선우 작가의 팟캐스트 <여자 둘이 토크하고 있습니다>를 듣는 사람들을 ‘톡토로’ 라고 한다. 톡토로 오픈 챗팅 소모임으로 토지방이 생겼다. 나는 친구들과 아침을 읽고 한 달에 한 번 톡토로님들과 토지를 이야기한다. 마음 안에 뜨거운 것들이 줄지어 밖으로 쏟아진다. 가끔 토지방 비 경상도 권 톡토로님들이 잘 이해 못하는 경상도 사투리를 찰진 내말로 읽어줄 때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른다.
어느새 저 인물들에게 마음을 너무 주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사랑하고 있었다. 하다못해 종으로 태어나 품어선 안 될 마음을 품었던 귀녀마저도. 욕망했으나 신분과 사회가 허락하지 않는 꿈을 꾼 귀녀의 선택이 얼마나 현대적인가 하고 되짚을 만큼. 고등학생 시절 읽던 마음과 이만큼 달라지건 내가 사십대이기도 해서 일까. 내가 살아온 시간을 보태 바라보니 토지 속 인물들이 하나하나 다 개별적 존재인 인간으로 다가왔다. 그저 ‘애기씨 사깜사입시더’ 하는 문장 하나만 남은 그 기억 속 토지가 아니었다.
연이어 토지문화재단에서 하는 토지읽기도 시작했다. 이주에 한권씩 십 개월 동안 개인적으로 감상을 적으며 읽기를 인증하는 프로그램이었다. 23년 한해가 토지로 가득 찼다. 나는 아버지가 하는 작은 사업의 이러저러한 온갖 일들을 하고 있다. 소규모 사업장의 경리들이 대부분 가족인 것처럼 내가 그 경리다. 일이 그럭저럭 굴러 갈 때는 괜찮은데 여러 이유들로 사업이 어려웠다. 거의 매일 울다시피 하루가 벅찼다.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다. 늙은 아버지를 내가 져버리면 하는 마음이 끝내 발목을 잡았다. 부표처럼 어지러운 마음을 토지가 뿌리내리게 해주는 느낌이었다. 어쩌다보니 타이밍이 조금씩 달라 토지를 세 번 읽는 구간도 있었다. 처음 친구들과 읽어온 시간, 톡토로님들과 이야기하고 각자의 생각을 들으며 내가 미처 살피지 못한 시선으로 토지 속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간, 그리고 다시 한 번 혼자 토지를 읽으며 고요하게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 친구가 함께 토지를 읽자 하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이어졌을까. 나비효과가 토지를 타고 어디까지 번져나갈까.
아이들은 자라나고 시대는 점점 더 암흑 속으로 앞이 보이지 않고 일제의 만행은 더해간다. 서희는 길상이와 연을 맺고 봉순이는 타고난 팔자를 따라갔을까 기생이 되고 월선이, 너무 속 아픈 월선이는 홍이를 배 아파 낳은 자식보다 더 귀하게 길러내고 사람들은 떠나온 그곳에서도 살아간다. 살아서 돌아갈 희망하나 품고 살아간다. 나는 어쩌나. 어떤 마음으로 이 책을 읽어나가는가 문득 문득 자주 생각했다. 내 땅의 아픔을 이렇게 녹여내신 선생님은 어떻게 읽어나가기를 바라실까. 토지를 읽는 즐거움이 커질수록 마음을 기댈수록 토지가 거대한 산처럼 앞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든든한 배경처럼 나를 지켜주는 것 같기도 했다. 책을 읽는 독자에게 주어진 시간은 오롯이 독자의 것이고 그 사이로 얻어진 마음들은 독자의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감히 내가 토지를? 박경리 선생님을?? 이미 결말을 알고 있지만 과정도 안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아끼는 사람들이 겪는 고초는 불벼락처럼 너무 아팠다. 어딘가에 평행 세계가 있고 평사리 사람들이 살아가는 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저이들이 옛날처럼 돌아와 복작복작 살아간다 생각하면 저 어려움이 조금은 덜한 것 같기도 했다. 문득, 이렇게 내 마음대로 의미를 두고 이렇게 빚진 듯 얼마쯤 불량한 마음으로 계속 읽어도 괜찮을까. 토지는 이미 그냥 소설은 아니었다.
복잡한 와중에도 여성들의 이야기가 눈에 도드라졌다. 현대문학 속 여성은 타자로 그려지기 일쑤다. 우리 현대문학의 대부분을 차지한 남성 작가의 관념 속 여성이 주인공이 된 경우를 생각해보면 토지 속 여성들은 보다 주관적인 신념을 바탕으로 나아간다. 여자를 기술하는 것도 박경리 선생님은 당신이 지나온 세월 스스로 겪어내신 당면한 문제인 듯 써내셨다. 역사적, 인권적으로 험한 세월임을 고려해도 남성작가의 시선 속 불편했던 여성서사보다는 조금 숨이 쉬어지는 기분이랄까? 타자가 아닌 주체인 여자! 여자로 살아온 내가 토지 속 여자들을 바라보는 마음은 어쩔 수 없이 편파적이긴 하다. 남자로 살아남기도 고단한 그 세월을 여자가 버티기 위해서는 지금과는 다른 관념적 질서가 필요했다. 서희의 결혼이 그렇고, 금녀의, 임명희의 선택이 그렇다. 토지 속에 그려지는 주체적 인간을 향한 여성해방의 서사는 조국해방의 문제와 무게를 달리하지 않는다. 토지 후반부 정치적 사조가 부딪히고 등장인물들 사이 사유가 첨예하게 대립 할 때도 한 고비만 한 고비만 하며 끝내 읽어 지나올 수 있었던 건 그 부분이 크다.
종종 박경리 선생님은 긴 세월 어떻게 써오셨을까 생각했다. 나는 따라가며 읽기만 해도 이렇게 숨이 차는데 저 한 많은 인물들의 매일을 어떻게 버티셨을까. 북녘의 어디로 먼지처럼 사라진 주갑이 같은 사람들이 한둘이었을까. 독립 운동에 나서 이름 한자 기록되지 못한 무수한 그들의 마음을 다 이고서 어떻게 이 글을 한자 한자 밀고 오셨을까. 원주 집 마당 한 편 날아오는 새들에게 밥을 주고 땅을 바라는 마음이 선생님의 생애를 완성하는 생명사상에 닿도록 얼마나 긴 시간 여러 생각의 갈래를 다독이며 지나오셨을까. 나는 감히 선생님께 기대어 이런저런 생각을 편지 쓰듯 23년을 지나 24년으로 지나왔다.
아무리 툭 잘라 들여다봐도 일상은 뾰족한 수가 없다. 그냥 매일이다. 빛나지 않는다. 묵묵히 때로는 나태하게 흐릿하게 그러다 순간순간 반짝하며 공평하게 지나야한다. 나는 그걸 배워야했는지도 모른다. 영광이와 양현이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도 모르는데, 상의가 어떤 사람으로 성장하는지도 너무 궁금한데 느닷없이 광복이다. 그 매일의 어느 한 순간 광복이 왔다. 만세 운동을 이름난 누구의 입이 아니라 ‘만... 만세를 불렀심다’ 하고 짝쇠를 통해 전하신 것처럼 춤추며 들어서는 장서방의 어깨로 광복이 왔다.
토지는 그렇게 끝났다. 끝 앞에서 아무것도 끝이 아닌 걸 알았다. 잘라내어 들여다본들 삶 속에 녹아들지 못한다면 그건 삶이 아니다. 역사가 아무리 이름난 자들의 선택으로 진행되는 것 같아도 동시대를 살아가는 무명의 우리가 함께하지 않는다면 이름난 자들의 선택도 아무 의미가 없다. 모두가 그저 한낱 인간임을 깨달았다. 인간으로써 살아가는 건 얼마나 빛나는 일인가 하는 깨달음도 왔다. 흐트러지지 말아야지, 흔들리다 조금 허물어져도 여기가 처음 마음인 것처럼 들여다보고 돌아오면 된다. 인간으로 살아가는 책임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정리되지 못한 생각들이 불쑥 불쑥 쏟아졌다. 이렇게 내 맘대로 생각해도 선생님께 누가되지는 말아야겠다고 그저 그 생각이 남았다.
내 일상은 여전히 볼 품 없다. 일은 아직도 진척이 더디고 순간순간 끓어오르는 감정은 여전히 조잡하고 궁상스럽고 그래도 지리멸렬해도 버텨 지나야함을 안다. 한 십 년 뒤쯤 뒤돌아봤을 때 지금의 나를 그 때의 내가 어떻게 바라볼지 모르겠다. 그저 묵묵히 매일을 산다. 토지가 끝에 닿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기회가 되면 토지 얘기를 한다. 가파른 매일, 여태 해왔던 생각 어디 쯤 툭 잘라 내 목소리로 기억하는 토지를 이야기 한다. 지금도 가끔 평사리 사람들이 평행세계 어디쯤에서 자손의 자손을 거듭해 살아가고 있을 것만 같다. 내가 사랑하고 마음 준 인물들을 끝내 기억하자. 그들이 걸어온 매일이 모여 하나의 의미였음을 기억하고 나의 오늘에도 닿음을 기억해야지.
통영출신 박경리 선생님은 처음 하동에 안가보고 토지를 쓰셨다고 들었다. 지도 한 장 들고 여기로 가면 구례 지나 지리산이 나오고 이리로 가면 부산이고 그렇게 지도를 앞에 두고 글을 쓰셨다고 한다. 꼭 보아야 아는 것은 아니다. 나도 아직 평사리 들에 가보지 못했다. 정말 토지의 처음처럼 용이가 장구를 매고 서 있진 않겠지만 하동에 가면 꼭 그런 느낌으로 추석이 올 것만 같다. 여러 이유로 친구들과 약속한 여행길에 오르지 못했다. 가보지도 못하고 내내 그립다. 올해 가을걷이가 끝나기 전에 하동에 가볼 수 있을까. 섬진강 물길 앞을 내내 바라보던 봉순이가 떠오른다. 서희는 길상이와 마음을 열고 이야기를 했을까. 나룻배를 타고 월선이가 돌아올지도 모르지. 당장 내일도 알 수 없지만 토지를 읽어오며 닦아온 마음만은 기억하자. 끝끝내 사람으로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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