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구는 욕망을 따라 진화한다

인스타, 유튜브, AI

by ParOn


인간은 본질적으로 갈등 속에서 살아간다. 개인과 개인 사이에, 집단과 집단 사이에, 국가와 국가 사이에 이해관계의 충돌은 끊이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은 그 갈등을 가능하면 회피하려 한다. 이것은 도덕적 나약함이 아니라 진화적 본능이다. 갈등은 에너지를 소모하고, 관계를 훼손하며, 심리적 항상성을 위협한다. 그래서 인간의 뇌는 갈등 상황 앞에서 회피, 합리화, 투사 같은 방어 기제를 작동시킨다. 프로이트가 발견한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 인간의 정신은 불쾌한 현실을 직면하기보다 우회하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것. 고민 또한 마찬가지다.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불확실성과 마주하는 일이며, 그 불확실성은 불안을 수반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본능적으로 사유의 양을 줄이려 하고, 정보 탐색의 한계 앞에서 손쉬운 답에 안주하려 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인스타그램, 유튜브, AI의 폭발적 성장을 새로운 시각으로 읽어야 한다. 이 도구들이 전 세계 수십억 명의 삶에 뿌리내린 것은, 그것들이 단순히 자극적이거나 중독적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것들이 인간이 오랫동안 홀로는 넘지 못했던 한계의 벽에 균열을 내주기 때문이다.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도구는 사라진다. 역사가 그것을 증명한다. 인쇄술은 지식 독점의 벽을 무너뜨렸고, 전화는 공간의 벽을 허물었으며, 인터넷은 정보 비대칭의 벽에 구멍을 냈다. 그리고 지금 이 세 가지 도구는 인간의 고독, 인지적 한계, 사유의 좁음이라는 내면의 벽을 공략하고 있다. 그것이 이들이 고도화되고 확장되는 이유다.

인스타그램의 본질을 비판의 언어가 아니라 인류학적 언어로 다시 읽어보자. 인간은 근본적으로 이야기하는 동물이다. 호모 사피엔스가 다른 인류 종을 압도한 가장 유력한 이유 중 하나로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허구를 공유하는 능력', 즉 이야기를 통해 낯선 타인과 연대할 수 있는 능력을 꼽는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삶을 타인에게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 동굴 벽화는 3만 년 전의 인스타그램이었고, 광장의 수다는 문자 이전 시대의 피드였다. 인스타그램이 제공하는 것은 그 이야기 욕구의 전례 없는 확장판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인스타그램이 개인간 갈등을 우회하게 해주는 완충 공간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직접 얼굴을 마주하면 말하기 어려운 감정을, 이미지와 짧은 글로 표현함으로써 인간은 자신의 내면을 세상 밖으로 꺼낼 수 있다. 슬픔을 게시하는 순간 위로의 댓글이 도착하고, 분노를 투영한 사진에 공감의 반응이 쌓인다. 심리학적으로 이것은 단순한 허영이 아니라 정서 조절(emotion regulation)의 한 형태다. 자신의 감정을 외부화하고, 그것이 타인에게 수용되는 경험은 고립감을 완화하고 자기 효능감을 높인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이 말한 '사회적 연대'의 욕구 —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확인 — 를 인스타그램은 전통적 공동체가 해체된 현대 도시인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농촌 공동체의 두레와 품앗이가 사라진 자리를, 디지털 공동체의 해시태그와 팔로잉이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대체가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 '무의미하다'를 뜻하지는 않는다. 중증 우울을 앓던 청년이 인스타그램에서 같은 경험을 가진 낯선 이들의 공동체를 발견하고 자살 충동을 넘겼다는 사례, 이민자 가정의 노인이 고국의 풍경을 올린 계정을 통해 정체성의 실을 붙잡은 사례들은 통계가 아니라 실존의 언어로 이 도구의 가치를 말해준다. 인간관계의 이상적 형태에 미치지 못한다는 비판은 타당하지만, 그 이상에 접근하는 하나의 경로로서 인스타그램의 기능은 분명히 실재한다.

유튜브는 인류 역사상 가장 평등한 지식 접근의 혁명이다. 이 주장은 과장이 아니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지식은 언제나 권력이었고, 그 권력은 언제나 소수에게 독점되었다. 중세 유럽에서 라틴어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전체 인구의 5퍼센트가 채 되지 않았고, 성경은 교회가 번역을 금지함으로써 신의 언어를 독점하는 수단이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가능했던 것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덕분이었고, 그것은 지식 독점에 대한 민중의 오랜 갈증이 기술을 통해 폭발한 사건이었다.

유튜브는 그 계보를 잇는다. 아프리카 케냐의 농촌 마을 청년이 코딩을 배우고, 인도 소도시의 여성이 법률 지식을 익혀 부당한 대우에 맞서며, 한국의 중년 직장인이 퇴근 후 양자역학을 공부한다. 이것은 과거 어떤 시대에도 가능하지 않았던 일이다. 도서관이 없어도, 학원비가 없어도, 대학 학위가 없어도,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세계 최고 수준의 강의와 정보에 접근할 수 있다. 갈등 상황에서도 유튜브는 강력한 도구가 된다. 직장에서 상사와 충돌했을 때 커뮤니케이션 전략을 찾고, 가정에서 자녀 교육 문제로 갈등할 때 발달 심리학의 언어를 빌려오며, 국제 정세를 이해하고 싶을 때 다양한 관점의 해설을 구한다. 정보의 비대칭이 갈등을 심화시킨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정보 접근성을 높이는 유튜브는 갈등 해소의 잠재적 도구이기도 하다.

철학자 존 듀이(John Dewey)는 민주주의의 토대를 교육에서 찾았다. 시민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을 갖출 때 비로소 민주주의는 형식이 아닌 내용을 갖는다고 보았다. 유튜브가 제공하는 방대하고 다양한 정보 환경은, 그 알고리즘의 편향성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 엘리트 교육 기관이 독점했던 지적 자원을 대중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것은 인류가 오랫동안 꿈꾸어온 지식 평등의 불완전하지만 실질적인 실현이다.

AI의 역할은 그 어느 도구보다 심층적이고 복합적이다. 인간의 사유 능력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우리의 뇌는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이 제한되어 있고, 언어와 문화라는 좁은 창으로 세계를 인식하며, 자신의 감정 상태에 따라 판단이 흔들리는 인지 편향으로 가득 차 있다. 이 한계는 개인적 고민에서도, 조직의 의사결정에서도, 국가 간 협상에서도 치명적 오류를 만들어낸다. AI는 바로 이 한계에 직접 개입한다.

갈등 상황에서 AI의 실질적 기여를 생각해보자. 개인은 분노와 상처로 뒤덮인 관계에서 객관적 시각을 잃는다. AI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상대방의 관점을 물을 때, AI는 감정적 개입 없이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것은 치료사의 역할과 유사하다 — 갈등 당사자가 스스로 보지 못하는 맹점을 외부의 시선이 드러내준다. 가정, 직장, 공동체에서 발생하는 갈등의 상당수는 정보 부족이나 관점의 협소함에서 비롯된다. AI는 그 정보와 관점의 폭을 넓혀줌으로써 갈등의 구조를 다르게 볼 수 있게 한다.

임마누엘 칸트는 '계몽'을 "자신의 오성을 타인의 지도 없이 사용할 용기"라고 정의했다. 그런데 그 '타인의 지도'를 구하는 것이 나쁜 것인가? 칸트 이전의 사상가들, 소크라테스조차도 대화 상대가 필요했다.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은 혼자 이루어질 수 없었다 — 질문을 던지는 스승과 그 질문에 씨름하는 대화자가 있어야 했다. AI는 그 대화 상대의 역할을 무한히 확장한 존재로 볼 수 있다. 밤 열두 시에 혼자 복잡한 문제를 앞에 두고 있을 때, 두려움 없이 어리석은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대화 상대, 모든 언어와 모든 분야를 넘나들며 함께 생각을 전개해나갈 수 있는 존재 — 그것이 AI가 수십억 인간에게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외부 도구에 사유를 의탁하는 것은 인간 진보의 패턴이었다. 문자가 발명되기 전 인간은 모든 것을 기억 속에 담아야 했다. 문자는 '기억의 외부화'였고, 이 외부화가 인간의 두뇌를 더 고차원적인 사유를 위해 해방시켰다. 계산기는 연산의 외부화였고, 그것이 수학자들을 더 추상적인 이론으로 나아가게 했다. AI는 추론과 종합의 외부화다. 이 외부화가 인간을 사유하지 않는 존재로 만들 것인가, 아니면 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해방시킬 것인가는 도구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의 태도와 문화의 문제다.

물론 이 긍정의 서사는 순진하거나 일면적일 수 없다. 앞서 논한 알고리즘의 편향, 비교의 심리적 폐해, 사유의 아웃소싱 위험은 실재한다. 그러나 이 문제들은 도구 자체의 죄악이 아니라 도구의 미성숙함과 사회적 리터러시의 미흡함에서 비롯된다. 자동차가 발명되었을 때 교통사고 사망자가 급증했다. 그러나 인류는 자동차를 금지하지 않았다. 교통 법규를 만들고, 안전 기술을 개발하고, 운전 교육을 제도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인스타그램, 유튜브, AI 역시 같은 경로를 걷고 있다. 알고리즘 투명성의 요구, 디지털 리터러시 교육의 확산, AI 윤리 규범의 형성 — 이 모든 것이 도구의 부작용을 교정하는 사회적 학습의 과정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도구들이 인간의 욕망에 반응하여 진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더 깊은 연결을 원할수록 플랫폼은 더 진정성 있는 상호작용을 설계해야 한다. 더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원할수록 알고리즘은 다양성과 검증을 향해 수정되어야 한다. 더 풍요로운 사유를 원할수록 AI는 답을 주는 기계가 아니라 질문을 심화시키는 파트너로 발전해야 한다. 이 진화의 방향은 인간이 무엇을 욕망하는가에 달려 있다. 도구는 인간의 욕망의 거울이다. 낮은 욕망에는 낮은 도구가, 깊은 욕망에는 깊은 도구가 응답한다.

결국 인류가 인스타그램에, 유튜브에, AI에 매달리는 것은 그것들이 인간의 가장 오래된 결핍에 응답하기 때문이다. 고독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욕망,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싶은 욕망, 지금의 자신보다 더 넓은 세계를 보고 싶은 욕망. 이 욕망들은 플라톤이 말한 에로스(Eros) — 불완전한 존재가 완전함을 향해 나아가는 근원적 충동 — 의 현대적 표현이다. 도구는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강력하게 인간의 삶 속으로 들어온다. 문제는 인간이 도구에 이끌려가는가, 아니면 도구를 이끌어가는가이다. 그 주도권을 갖기 위해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역설적으로 가장 오래된 능력이다 —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왜 원하는지 물을 수 있는 내면의 목소리. 소크라테스가 말했듯이, 검토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 검토되지 않은 도구의 사용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 검토를 위해 우리는 다시, 인간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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