뱁새도 재즈를 듣는다

음운의 변동 - (1) 버즈와 째즈

by 조뱁새

"자, 표준발음법 제1항. '표준 발음법은 표준어의 실제 발음을 따르되, 국어의 전통성과 합리성을 고려하여 정함을 원칙으로 한다.' 알겠니? 전통성은 옛 언어습관을 그대로 이어받는다는 거고, 합리성은 나름대로 규칙이 존재한다는 이야기야~ 표준발음법에는 예외가 많은데 예외는 외워야 해. 시험에 나오니까."



나는 매일 아이들에게 '규칙'을 가르친다. 국어 문법에는 예외는 있을지언정 모호함은 없다. 밑받침 'ㅎ'이 모음으로 시작하는 어미와 결합하면 탈락한다. 이것은 약속이다. 내가 일하는 학원이라는 세계도 마찬가지다. 커리큘럼은 정해져 있고, 진도는 계획대로 나가야 하며, 학생들의 성적은 그래프로 산출된다. 오차 없는 세계, 정답만이 존재하는 세계. 이것이 나의 낮이다.


하지만 나의 안에는 '조뱁새'라는 자아가 산다.


"필명이 왜 조뱁새예요?"


"아, 새도 좋아하지만... 그게 재즈랑 관련이 있는데요..."


사람들은 이 대답을 들으면 고개를 갸웃한다. 뱁새랑 재즈가 도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럴 때면 나는 속담 하나를 인용하곤 한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 가랑이 찢어진다는 말 있잖아요. 저한테는 재즈라는 황새가 있어요."


하지만 내 삶의 보폭은 재즈보다는 '버즈(Buzz)'에 가까웠다. 나는 학창 시절 노래방에서 핏대를 세우며 민경훈의 바이브레이션을 흉내 냈던 '쌈자' 세대다. 버즈의 노래는 명쾌하다. 잔잔한 도입부를 지나, 감정이 고조되는 브릿지를 건너면, 어김없이 터져 나오는 폭발적인 후렴구. 거기엔 배신이 없다. 우리가 기대하는 딱 그 타이밍에, 기대하는 만큼의 감동을 준다.


버즈의 음악은 내가 가르치는 교과서와 닮았다. 기-승-전-결이 확실하고, 주제는 명확하며, 결말은 교훈적이다. 모범답안처럼 깔끔하게 떨어지는 삶. 나는 그런 '뱁새의 보폭'으로 종종걸음을 치며 살았고, 아이들에게도 그게 정답이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딱 떨어지는 정답'들이 숨 막히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틀린 답을 말하면 빨간 펜으로 가차 없이 빗금을 긋는 내 손길이 혐오스러워질 때. 인생이 객관식 문제처럼 1번 아니면 2번으로만 나뉘는 것 같아 답답할 때, 나는 재즈같은 삶을 동경한다.


재즈는 버즈와 다르다. 아니, 정반대다. 재즈는 규칙을 싫어한다. 피아노가 멜로디를 치다가 갑자기 드럼이 끼어들고, 베이스가 제멋대로 리듬을 쪼갠다. 불협화음인가 싶었는데 들어보면 묘하게 어울린다. 때문에 재즈에서는 '틀린 음'이 없다. 연주자가 실수로 잘못 누른 건반도, 다음 연주자가 어떻게 받아주느냐에 따라 멋진 '텐션(Tension)'이 된다.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강의실을 벗어나, 실수가 음악이 되는 세계로 도망치는 것. 하지만 나는 태생이 뱁새라, 그 자유분방한 스윙을 완벽하게 타지는 못한다. 나는 아무래도 월급이라는 게 필요하고, 나는 아무래도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싫어하고, 나는 아무래도 돈을 버는 것이 좋다.


그래서 서른이 넘은 나의 필명은 더 이상 '조째즈'가 아니다. 꽤나 오랫동안 '조째즈'라는 필명을 사용했는데... 어쩌다 보니 <모르시나요>를 부른 '가수 조째즈'가 유명해지게 되면서 검색창에 조째즈라고 치면 온통 수염 난 아랍상 아저씨만 나오니... 뭐 그런 이유도 있고 해서 나는 이참에 필명을 바꾸게 되었다. 이제부터 나는 조뱁새가 되었다. 째즈보다는 조금 귀엽기도 하고, 황새의 걸음을 흉내 내다 가랑이가 찢어질지언정, 그 자유로움을 쫓아가고 싶다는 의미도 대충 담겨있는 거 같고...


버즈가 가르마를 곱게 탄 단정한 모범생이라면, 재즈는 레게머리를 하고 찢어진 청바지를 입은 자유로운 영혼이다. 버즈는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아?"라고 직설적으로 외치지만 재즈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If you have to ask what jazz is, You'll never know."

(만약 당신이 재즈가 무엇이냐고 물어야 한다면, 당신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루이 암스트롱의 말처럼, 재즈는 정답을 떠먹여 주지 않는다. 나는 그 불친절함이 좋다. 내일 출근하면 나는 다시 "이 문제의 정답은 3번이야"라고 확신에 차서 말해야 한다. 뱁새처럼 종종거리며 진도를 나가야 한다. 그러니 적어도 퇴근길 이어폰 속에서만큼은, 그리고 글을 쓰는 이 순간만큼은 황새처럼 긴 보폭으로 정답 없는 세계를 유영하고 싶다.


익숙한 세계에서 낯선 세계를 동경하는 것. 매일 오지선다형 시험지를 채점하면서도, 인생이란 즉흥 연주임을 잊지 않으려 애쓰는 것.


그것이 짧은 다리를 가진 자가 이런 글을 쓰는 이유라 해야겠다.


(여전히 노래방에 가면 재즈 대신 버즈를 부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