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사귀게 된 친구가 내게 한량, 백수라고 말했다.
한량이라고 말할 때는 나도 함께 웃고 넘겼다. 아직 친하진 않지만 여행 중에 사귄 친구라 날 그렇게 볼 수 있겠다 싶어서. 그런데 다음날은 내게 백수라고 그런다. 그 순간 나는 이 친구의 심리를 알 것 같았다.
'아, 날 무시하고 싶어하는구나.'
사람은 누군가를 무시하려는 본능이 있으니까. 농담조인척, 여유로워 보이는 나를 무시하는 발언을 하며 깔아뭉게고 싶어하는 거다. 연속으로 그러는 건 다 이유가 있다. 이때 가만히 있으면 나는 계속 이 친구를 만날 때마다 무시당한다. 즉각 난 '나 백수 아니야', 라고 말했다. 그가 비실비실 웃으며 그런다.
"뭐, 백수 맞지."
한량, 백수라고 얼마든지 속으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친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입밖으로 꺼내선 안 되었고, 입밖으로 꺼냈을 때 상대가 아니라고 하면 미안하다거나 가만히 있었어야 했다. 백수 맞지, 라고 확인사살하는 게 좀 어이없었다. 내가 어떤 하루를 보내는지, 혹은 내 사회생활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나를 함부로 재단하고, 내 상태를 평가해버리다니. 게다가 우린 아직 서로 잘 모르는 사이잖나.
생각해보니 그랬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는 백수다. 퇴사 후에 번 금액이 얼마 없으니 '백수=돈버는 금액이 지극히 적음'으로 정의내린다면 백수가 맞다. 팩폭(팩트폭행)을 함부로 던지지 말자. 백수로 보이는 사람에게 백수라고 말하면, 상대 백수는 기분 나빠한다.
어쨌든 그날은 티 안내고 헤어졌다.
며칠 후 그가 내게 안부 톡을 보냈다. 내가 상처받은 줄도 모르고 말이다. 해서 나는 그의 약점으로 반격했다. 그가 달성하고 싶은 재능이 아직까지 보이지 않음을 말하며 팩폭했다. 그가 농담조였듯이 나도 농담조로. 나도 내게 아직도 이런 공격 성향이 있는 줄 몰랐다. 나이 먹고 이게 무슨 짓인가. 그것도 카톡으로.
혹시 못 받아들이면 어쩌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사실인데 뭘. 이 말을 못 받아들이는 속 좁은 인간이라면 우리 사이는 깨지겠지.'
그 결과, 우리는 다시는 보지 않을 사이가 되었다.
'아니 친구라며 이런 사실적인 말도 못 받아들이는 거야?'
그건 내 생각이고, 상대는 기분 나빠했다. 팩폭은 언제나 가슴 아픈 일이니, 친한 친구나 가족 사이에도 분위기를 보고 해야 할 말이다.
그런데 '백수'는 사실 게으르단 뜻도 아니고, 그저 상태를 의미하는 말이다. 그 말이 기분 나쁠 이유가 딱히 없다. 친한 친구가 나를 백수라고 놀리면 '야, 난 행복한 백수다, 넌 불행한 직장인이지?' 라고 놀려주고 만다. 우리 사회에 백수를 대체할 다른 말이 딱히 없다. 취업준비생? 그런 말은 웃기잖나. 나는 취업 준비를 안 하고 사는데. 아무래도 괜스레 유치한 심리 싸움을 한 것 같다.
'자존감이 낮아졌나', 나를 점검해봤다.
*
가끔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한없이 누군가를 무시하고 싶다.'
이런 생각이 들 때는 내 자존감이 가장 낮았을 때였다. 헌데 아무리 고갤 돌려봐도 주변에 사람들은 다 각자 잘난 면이나 좋은 면이 있고, 따지고 보면 다 존중받아야 할 사람이다. 나랑 갈등을 겪었던 사람도 어딘가에선 나름 괜찮은 척 살고 있겠지. 나도 친구들에게 대개 좋은 친구이듯이. 그러니 사람의 인연을 생각하면 누가 누구를 무시하겠나. 사람 중에 무시 받을 사람 하나 없다.
누군가 나를 무시하려 입방정을 떨면 속으로 생각한다.
'너는 자존감이 바닥이구나.'
길거리에서 술 취해 젊은 여성에게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사람들은 노숙인이나 행색이 초라한 장년층인 경우가 많다. 자라면서 '남자가 말이야!' 소리를 듣고 자랐을 세대의 남성. 그렇게 자랐는데 남자의 자존감이 바닥이니 본능적으로 무시할 사냥감을 찾는 거다. 나도 몇 차례 겪었다. 지나가다 난데없이 성추행도 당했다. 젊은 여성 외국인에게 고래고래 소리질러서 빨리 도망치려고 하니 손목을 붙잡는 남성 노숙인도 봤다. (주변이 말려서 여성은 풀려났다) 이런 사람들이 장애인 시위 욕하고, 흑인을 흑형이라 놀리고, 페미니스트는 싸그리 꼴페미라 부를 확률이 높다. 그들은 이런 심리를 갖고 있을 것이다.
'날 세상이 무시하는 것 같다. 평소 무시해도 되었던 애들마저 치고 올라오는 게 반갑지 않다.'
미국 저소득층 백인 남성이 극보수에다 백인우월주의 트럼프를 찍는 이유다. 그들은 자존감이 바닥이라 한없이 무시할 대상을 찾는 자들이다.
난 자존감이 떨어질 때 키보드 워리어가 된다, 합법(?)적으로.
자존감 떨어질 때 괜히 주변 사람을 괴롭히거나 질투하며 더 자신의 자존감이 바닥인 걸 확인하지 말자. 이럴 땐 SNS 하지 말자. 유튜브를 켜서 성폭행범, 강간범, 보이스피싱범 등 우리 사회의 최악 벌레들 영상을 찾는다. 그 아래에 키보드워리어가 되자. 성경에 두 사람 이상이 기도하면 하느님이 들어준다는 문구가 있다. 두 사람 이상이 저주를 내리면 하느님이 들어주실 거다. 우리의 티끌 같은 신들이 모여 그 x는 분명 천벌을 받을 거라 믿는다.
'부산 돌려차기 사건' 영상을 보고 다들 분노했을 것이다. 당신의 분노조절장애를 북돋우는 영상. 가령 그 영상 아래에 이런 댓글을 달면 어떨까. 세계 평화를 위해.
'2심에선 무기징역이나 최고 형벌을 받기를 바란다. 아니 감옥 안에서 남들에게 돌려차기 콤보를 받고 떨어져 죽기를 바란다. 살아서 나오면 내가 아는 태권도 유단자 동생들 풀어서 공중 돌려차기 세 바퀴로 죽여주마.'
너무 길면 짧게 쓰자.
'쳐죽어라, 새끼야!'
한없이 무시 받아도 싼 인간이 세상에 아예 없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