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쟁이가 글을 쓰게 된 이유

그림과 글

by 파로브


세상엔 표현의 자유가 있다. 그리고 누구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하게 된다. 나는 글보단 그림으로 나의 감정과 생각, 관점들을 세상의 사람들에게 전달하려는 그림쟁이다. 브런치란 플랫폼은 글쟁이들의 전유물이라 생각했다. 그런 내가 브런치를 통해 그림과 글을 써보기로 했다. 나의 작품 세계는 아주 긴 시간이 소요되는 전통적인 방식을 추구하고 있다.


태평소 부는 사람, 나무에 단청기법, 40x16.5x20cm, 2021


100년이 넘은 참나무 장여가 쓰임새를 다하고 손에 손을 통 해 작가의 손에 들어왔다. 장여의 반대쪽은 빛바랜 단청이 흐릿하게 남아있었다. 16.5cm의 좁은 폭 안에 무엇을 그려야 할지 꽤 오랜 시간을 고민하다가 장여의 갈라진 틈 사이사이 묵은 먼지와 세월을 털어내고 반대쪽에 태평소를 부는 사람의 옆모습을 그려 넣기로 하고 작업을 시작했다. 장여 위에 양청과 분, 황을 바탕으로 도채하고 금분으로 꾸밈을 더한 뒤 먹선을 그어 마무리하였다.




여기 하나의 작품이 있다. 작품 소개를 간략하게 적어 두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나는 100년 넘는 참나무 장여를 얻기 위해 전라남도 화순까지 유랑을 떠났다. 국가무형문화재이신 000 단청장 님께 부탁을 하고 연락을 기다린 지 석 달만이었다. <파로브의 팔도유랑기>의 시작이다.


흐릿하게 남아있는 단청 문양 반대쪽에 새것을 그려 넣기로 했다. 쓰임새를 다한 장여는 세월의 힘을 견뎌내지 못하고 갈라지는 중이었다. 혹시라도 상처라도 날까 보자기에 싸서 집으로 돌아와 며칠을 방에 두었다. 이리도 돌려보고 저리도 돌려보고 어디에 어떻게 무엇을 그릴까. 브런치 글쓰기 첫 페이지처럼 고민스럽기만 하다. 더욱이 그리고 마음에 들지 않거나 실패하면 다시 그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나무 위에 완벽한 하나의 작품을 올리기 위해 수 십 번을 스케치를 하고 색을 칠해본다. 어느 정도 이미지를 완성시킨 뒤 장여 위에 타초 작업을 하고 단청 작업을 하는 방식 그대로 단청 대신 2020년 완성시켰던 <태평소 부는 사람>을 입혔다. 마무리로 금분까지 더해 준 뒤 먹선을 그려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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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소 부는 사람, 나무에 단청기법, 40x16.5x20cm, 2019년 어느 날 첫 스케치를 시작해 무려 2년 하고도 5개월이란 시간이 걸려 완성할 수 있었다.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을 이야기지만 그림에는 표현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나는 브런치에 글을 더해주기로 했다. 작품을 완성시키기 위한 작은 유랑기를 써보기로 한 것이다.


익숙하지 않은 플랫폼에 연필과 스케치북 대신 타자를 두드리는 것이 무척 낯설기만 하다. 전시나 아트 페어를 준비하는 것만큼 떨리고 설렌다. 좋은 기회를 준 브런치에게도 고마움을 전하는 동시에 부족하지만 글을 읽어주실 브런치의 작가님들께도 첫인사를 드리고 싶다.


반갑습니다, 그리고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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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소개>


파로브

풍물잽이, 풍물놀이, 씨름 등 한국적 주제의 표현, 나만의 독창적인 표현 방식을 찾기 위한 긴 여정의 끝은 의외의 곳에 있었다. 오랜 시간 타국을 떠돌며 보낸 시간 내내 찾고자 했던 답, 결국 귀국 후 떠난 유랑길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세월이 흘러 낡고 바래진 고찰(古刹)에 도착하니, 새 단청 작업이 한창이었다. 긁히고 상처 입은 고목들과 빛바랜 단청에 새 옷을 입히니 언제 그랬냐는 듯 활기가 넘쳐났다. 새로운 생명력으로 다시금 숨을 쉬게 된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고요하고 응축된 힘을 지닌 나무와 단청, 전통적이며 아날로그적 감성을 지닌 재료와 소재에 주목했다. 이것이야 말로 남들과는 다른 나만의 것이 될 수 있음을 직감했다.


기존의 규격화된 기준에서 벗어난 '날것(Raw)', 그중에서도 나무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주변에 버려지거나 거들떠보지 않는 나무들을 구해 집으로 가져다 상처를 치유하고 다듬어 그림을 그릴 화판으로, 때로는 화판을 감싸는 액자 틀로 새로운 쓰임새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전통 소목(小木) 방식의 짜맞춤으로 작업을 한다. 나의 작품 안에는 이처럼 묵직함을 지닌 무언의 존재, 나무가 있다. 마치 소목장(小木匠)이 된 듯 나무를 다듬는 과정을 통해 작품의 뼈대를 만들어 나간다. 나무가 뼈대라면, 단청 작업은 살을 붙이는 과정이다. 작품의 주제인 풍물놀이 속 풍물재비와 광대의 놀음, 씨름판 등을 직접 구경하고 그것을 토대로 이미지를 스케치한 뒤 출초, 타초 과정을 통해 준비된 나무 화판 위에 도채를 한다. 풍물재비나 씨름 선수들이 입는 복장, 샅바는 단청 고유의 오방색을 바탕으로 하기에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한국적 주제의 표현에 완벽하게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이 번 작품들은 팔도 유랑을 통해 얻은 스케치를 바탕으로 작업한 작업물 중의 일부이다.


세월이 지나도 변함이 없는 나무의 성질처럼, 갖은 시련과 모진 풍파에 상처가 생기고 아물기를 반복하면서도 다시금 회복하는 나무의 성질처럼 앞으로도 꾸준히 작가만의 방식을 고수하며 한국적인 아이덴티티가 담긴 작품을 그려내고 싶다. 나아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전통 소목(小木)과 단청(丹靑)의 아름다움과 역사적 가치를 그림으로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