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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rty noodle Jun 11. 2024

마침내, 미결 사건을 해결할 결심

2023년 1월, 영화 <헤어질 결심>

당신은 헤어진 사람과 친구로 지낼 수 있나요?  


저는 아니에요. 헤어진 사람과는 친구로 지내는 건커녕, 가끔 안부를 묻는 사이로 남는 것도 어려워요. 쿨하지 않다구요? 아, 그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 저는 사랑이나 연애에 있어서는 쿨하지 못한, 아니 상당히 찌질한 사람이죠. 하지만 헤어진 연인과 친구로 지낼 수 없는 이유가 단지 저의 찌질함 때문만은 아니에요.


그동안 지나온 사랑의 역사에서 이별은 대체로 제 손에서 시작된 적이 많았어요. '이 사람이랑 계속 사귀다간 미래의 내가 행복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관계를 지켜보다가 먼저 마음 정리를 한 뒤에 일방적으로 헤어지자고 말하는 식이었죠.


그런 처지에 어떻게 '우리 헤어지더라도 친구로 지내자'라거나 '가끔 얼굴도 보고 안부 인사라도 물으면서 지내자'라고 말하나요. 헤어짐을 받아들이는 쪽이 원해서 먼저 말해주는 거라면 모를까, 어떻게 통보하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하겠어요. 그건 너무 주제넘고 부당한 일이죠.  


친구로 남고 싶은 사이였다면 애초에 불행을 상상하거나 헤어지자는 말도 하지 않았겠죠. 저는 남자와 여자는 결국 이성적인 호감을 배제하고 순수하게 친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제 연애의 궁극적인 목적은 오랫동안 사랑과 우정을 쌓으며 함께 살아갈 결이 비슷한 친구를 찾는 것이니까요.


그러니 탐색 과정에서 상대가 그 목적에 어긋나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굳이 계속 만날 필요가 있나요? 서로가 서로에게 원하는 것을 줄 수도 없는 관계가 되어봐야 서로 시간 낭비만 하지. 그럴 바엔 하루라도 빨리 각자 원하는 사람을 찾아 떠날 수 있도록 얼른 헤어지는 것이 최선 아니겠어요?  


그래서 헤어져야겠다는 결심이 서면 나름대로 마음을 독하게 먹고 감정을 정리하기 시작했어요. 방법은 나의 애인이 나 아닌 다른 사람과 손을 잡는 상상, 다른 사람을 껴안는 상상을 하는 것이에요. 유치하다구요? 그래도 실제로 해보면 글로 읽을 때와는 다르게 꽤 효과가 있어요.


처음엔 그런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끔따끔하고 눈물이 찔끔 나오거든요? 그런데 힘들다고 거기서 멈추면 안 돼요. 마음을 굳게 먹고 그가 다른 사람과 입을 맞추는 상상, 알몸으로 한 침대에 나란히 누워있는 상상을 하더라도 무덤덤해질 수 있는 시기가 올 때까지 조금 더 단련해야 해요. 그 단계를 넘겨야만 상상을 마치고 현실에서 이별을 고할 수 있어요. 이 사람을 내 삶에서 완전히 지워도 괜찮은 때가 온 것이나 다름없으니까요.


모질게 들린다구요? 하지만 믿어주세요. 얼마를 만나든 결국 무엇 때문에 헤어지든, 헤어짐을 고하는 저 역시도 이별은 늘 슬퍼요. 마음이 아파요. 사귀는 동안만큼은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나와 긴밀한 관계였던 사람을 한 순간에 떠나보내는 일이니까요. 관계의 종말을 선언한 뒤에는 2, 3주쯤 잠을 설치기도 했어요. 좋았던 추억이 불쑥 떠올라 눈물이 나기도 했고, 그 역시 이 이별을 잘 견뎌내고 있을지 궁금해지기도 했지요.


하지만 먼저 연락하고 싶을 만큼은 아니었어요. 그러니 복잡한 감정을 꾸욱 누르고 눌러 시간이 지나게 두었죠. 우리의 이별을 완전히 수용하고, 가끔씩 떠오르는 미화된 추억에도 가슴 아픈 눈물보다는 아련한 미소를 지을 수 있도록.


여기서 시간이 지나면 그 사람은 내 인생에서 정말로 영영 볼 일이 없는 사람, 내 마음속에서는 마치 죽은 사람이 되어버려요. 영문도 모르고 차인 데다가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죽은 사람 취급까지 받게 된 구 남자친구들에게는 뒤늦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군요. 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이별한 지 수년이 지난 어느 새벽에 "잘... 지내..?"하고 미련이 잔뜩 담긴 카톡을 받는 일보다는 차라리 깔끔하게 잊히는 것이 훨씬 낫지 않나요?


죽은 사람 취급보다는 느닷없는 연락을 받는 편이 더 낫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네요. 누군가와 헤어지고 '언제 어디에서 이 사람과 재회를 하게 될지도 몰라'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되면 이별을 깔끔하게 받아들이기가 힘들거든요, 저는.  


그러므로


지나간 관계를 자꾸만 뒤돌아보지 않기 위해서는, 나 없이도 그 사람의 세계가 멀쩡히 돌아간다는 사실에 괴로워하지 않기 위해서는, 자꾸만 그의 근황을 필사적으로 찾지 않기 위해서는, 어쩌면 우리가 다시 만나 이전보다 성숙한 사랑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몹쓸 착각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차라리 내 마음속에서만큼은 당신이 죽은 사람이어야만 해요.


오랜만에 헤어짐을 겪고 보니 정말로 그렇다는 걸 새삼 깨닫고 있어요. 최근에 마주한 이별은 갑작스러운 거짓말 같기도 하고, 너무 오랜만에 한 이별이라 저만의 방식을 잊어버렸거든요. 준비 없이 맞이한 이별에 적응하느라 그 사람을 마음속에 살려둔 채 몇 번이나 섣불리 그를 잊은 척, 그립지 않은 척했더니 벌써 1년이 다 되어 가도록 이 이별과 싸우고 있어요. 시간이 충분했는데도 사실 실패한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뒤늦게나마 제가 늘 하던 방식으로 다시 헤어짐을 준비하려 해요. 제 마음속에는 저어기, 양동이를 한 손에 쥔 당신이 보여요. 저를 등지고 바다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가고 있네요. 우리의 기억은 아무도 찾지 못하게 저 멀고 깊은 곳으로 던져 버릴게요. 당신은 그 길로 계속 걸어가 줘요. 올해는 마침내 이별에 성공하고 말 거예요. 이젠 정말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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