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영화 <어나더 라운드>
어릴 때부터 덩치는 호랑인데 마음속에는 햄스터가 살았다. 별 일 아닌 것에도 쉽게 긴장하고 불안해했다. 지금은 그나마 많이 나아졌지만 어릴 땐 정말 심했다. 낯선 환경에서 또는 낯선 사람들과 밥을 먹을 때면 종종 체했고, 낯선 곳에서는 쉽게 잘 수 없었고, 친척들에게도 낯을 가렸고, 누군가 갑자기 나를 툭 치거나 부르면 소스라치게 놀라는 일도 잦았다.
20대가 된 이후로 밥 먹다가 체하는 일이나 바뀐 잠자리에서 잠 못 드는 일은 줄었지만, 나머지는 여전했다. 작은 일에 잘도 심장이 졸아들었다. 발표를 해야 한다거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할 때면 바들바들 떨었다. 익숙한 상황이나 낯익은 소규모의 사람들 앞에서의 나는 여유도 있고 사려도 깊고 재미도 있는 사람인데, 반대의 상황에서는 녹슨 깡통 로봇같이 굴었다.
성인이 되고도 늘 절절매며 사는 내가 너무 싫어서, 아침마다 술을 살짝 마시고 학교에(또는 회사에) 갈까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매일 아침마다 술을 마시며 하루를 시작하는 20대라니 구제불능 알코올중독자처럼 느껴져서 몇 번쯤 생각만 하고 실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의 상상이 아주 허황된 것은 아니었는지, '핀 스코르데루'라는 노르웨이의 철학자는 “인간은 혈중알코올 농도가 0.05%쯤 부족한 상태로 태어났기 때문에 이를 유지해 주면 더 느긋하고 개방적이며 대범해진다.”라는 가설을 제시했다고 한다.
영화 <어나더 라운드>는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는 중년 남성 넷이 이 가설이 참인지 거짓인지 직접 생체실험을 통해 증명해 보이며 전개된다. 그리고 주인공인 마르틴은 실험 초반부터 실험 덕을 톡톡히 보는 인물로 나온다. 분명 영화 초반엔 재미도 없고 표정도 없는, 가정에서도 일터인 학교에서도 존중받지 못하는 가여운 아저씨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교실을 날아다니며 초롱초롱한 학생들의 눈빛을 받고 집에서는 부인에게는 로맨틱한 눈빛을 발사하며 저녁을 차려주는 사람이 되어있다.
그러나 이렇게 이대로 해피 에버 애프터~* 하면서 영화가 끝났다면 <어나더 라운드>가 칸 영화제의 후보로 오르는 일은 없었겠지. 적당히를 모르는, 우리의 꾸러기 아저씨들은 핀 스코르데루의 가설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응용 실험에 돌입한다. 그와 함께 영화는 본격적으로 절정을 향해 비틀비틀 걸어가고 관객들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들의 실험 결과를 기다리게 된다.
마음 같아서는 실험 결과를 이야기하며 조잘조잘 떠들고 싶지만, 맥주는 김 빠지면 맛없고 영화는 스포 하면 재미없으니까 여기에서 줄이기로 한다. 그럼 이만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