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은 로로피아나를 입고 S는 폭스바겐을 탄다

by 발걸음

이걸 쓰는 이유는 글쓰기에서 나를 자꾸 밀어내는 것들, 이를테면 핑계, 집착, 만남, 말하자면 지금 당장 쓰지 않아도 될 이유'를 발명하는 나의 놀라운 재능을 파악하기 위해서이다. 처음에는 분명 넌픽션이었다고 주장하고 싶지만, 주장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수상하고, 어쨌든 어떤 형식이 있었고 주제를 드디어 찾았다고 착각했고, 그래서 바로 시작했는데, 시작하고 나니까 넌픽션이라는 게 생각보다 위험했고, 위험하다는 건 결국 내가 감당할 수 없다는 뜻이라서, 그래서 슬쩍 비틀었고, 오토픽션이라는 말 뒤에 숨으려고 했는데, 픽션이란 단어가 한 번 들어가니 걷잡을 수 없이 거짓말투성이로 흘러가고 있어서, 지금은 내가 뭘 쓰는지는 몰라도 픽션이라는 건 확실한데,


주인공 S는 처음에는 나와 거의 같았고, 이니셜을 봐도 그렇고, 경험, 재능, 취향, 외모, 이런저런 게 거의 나와 판박인 것이, S에 후추 뿌리듯 나를 여기저기 뿌리며 혼자 손뼉을 치며 웃고 울다 몇 주를 보냈는데, 문제는 그렇게 만들어 놓은 S가 점점 못마땅하고 불편해졌단 말이다. 내가 이렇게 문제가 많고 매력은 1도 없는 인간인가 싶어서, 이대로 가다간 S를 음주운전자가 들이받아 죽여버리거나, 돈을 못 받은 납치범이 열받아서, 높은 절벽에 데리고 가 등을 밀어버릴지도 모르니, 그러면 새로운 주인공을 만들어야 하거나 소설이 중단되는 황당한 사태가 벌어질 거고, 그러면 나는 절망에 빠질 테니, 그리하여 S는 점점 나와 다른 낯선 사람이 되었다.


이야기는 2025년 12월 5일, 예술의 전당에서 시작되는데, S는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보러 가고, 실제로는 내가 친구와 갔지만 이 이야기에서는 친구를 없애버렸고, 이유는 둘이 있으면 대화를 해야 하고, 대화를 쓰는 건 너무 귀찮기 때문이고, 사실 그건 거짓말이고 진짜는 대화를 어떻게 쓰는지 몰라서이고, 게다가 S는 M이라는 남자를 우연히 만나야 하니 친구가 있으면 거추장스럽고, 그렇다고 친구더러 먼저 집에 가라고 하면 첫 장면부터 비호감 주인공이 될 것 같아서, S는 혼자 간다.


나는 12월에 짧은 단발을 하고 있었는데, S는 치렁치렁한 머리를 하고 있고, 어차피 공짜니까 염색도 살짝 시켜줬고, 나는 갈색 부츠를 좋아하는데, S는 괜히 검은 롱부츠를 신었고, 빨간 타탄체크 치마를 입혔으니 검은색이 어울리지 않을까 했는데, 사실은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입혔기에, 결국 나는 S의 의상을 대충대충 넘어간 거고, 그러니 S는 치렁치렁한 머리에 길거나 짧거나, 주름이 있거나 아니거나 한 미정의 타탄체크치마를 입고 검정 부츠만 신었으니 벗고 다닌다고 놀림받기 딱 좋은 모습이니,


물론 그렇게 될 리는 없고, S는 옷을 잘 갖춰 입고, 혼자 가니까 화려한 건 피하고, 메이드인이태리 롱부츠까지 신고, 차를 운전해 예술의 전당에 가는데, S는 내가 아니니 다른 차를 운전할 거고, 차는 S 소유이지만 다 내가 사줘야 되기 때문에, 시장 조사 차 괜히 외제차를 검색하다 빈티지 차까지 넘겨다보고, 그러니 30분은 족히 날아가고, 마침내 브리티시 그린 미니로 할까 고민하다가, 아 참, 내 정신 좀, 나중에 등장할 캐릭터인, KBS 기자 C가, S의 애인이 될지도 모르는 데, 그가 정작 그린색 미니를 모는 걸 깜박하다니, 게다가 C는 그 차에 S를 태우고 부암동까지 갈 텐데, S는 그 차가 귀엽다고 촐싹거릴 텐데, 만약 두 사람이 똑같은 차를 운전한다면, S가 완전 따라쟁이가 되는 거고, 관능적인 로맨스가 라니라 자본주의 풍자 코미디가 될지도 모르니, 이제는 더 이상 생각하기가 귀찮고, 그냥 어디서 본 적 있는 폭스바겐 폴로를 사주게 되는데, 폴로라는 모델명도 몰라서 구글에서 검색해서, 중고로, 왜냐하면 S는 결코 부자가 아니고, 혼자 돈 벌어 사느라 갑갑할 때가 많고, 하지만 천만 다행히도 새것에 목매지 않기 때문에, 적당히 겸손한 걸 고르느라 그렇게 된 거다.


S는 다섯 시간짜리 공연을 야심 차게 혼자 보겠다고 가고, 옆자리에 남자가 앉아 있고, 시선이 자꾸 가는데 이유는 모르겠고, 사실 실제로도 나는 어떤 남자 옆에 앉았지만 지극히 평범해 보였고, 다만 옷감은 예사롭지 않았고, 혼자 왔기에 호기심이 일 수는 있고, 인간은 원래 궁금하면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아마 그랬을 거라고 지금 와서 적당히 쓴다.


2막에서 트리스탄의 목이 쉬는데, 가장 중요한 장면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고, 이건 그날 실제 사고에서 영감 받았고, 가수는 누구나 오고 싶어 하는 한국에 온다고 주변의 부러움을 사며, 따라오겠다는 여자친구를 만류하고, 귀찮게 할 게 뻔하니 혼자 9시간 비행기 타고 왔는데, 노래를 못하게 된 셈이고, 그래서 현실의 나와 어차피 같은 공연을 관람하는 S는, 불운의 테너 때문에, 점점 안절부절못하고, 답답해지고,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어지고, 그래서 결국 옆의 남자에게 말을 걸게 되는데, 문제는 그 남자가 30년 전의 연인 M이라는 설정을 넣어버렸다는 거다.


M이 전남친이 된 이유는, 현실의 내가 그 몇 주 전에 근황을 모르는 대학 때 전남친이 생각났고, 헤어진 후로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도 모르니, 생사 정도는 최소한 알아야 될 것 같아서, 구글 검색을 했는데, 병원 홍보 사진에서 흔히 볼 만한, 의사들이 팔짱 끼고 옆으로 비스듬히 서 있는 그런 포즈로 찍은, 전 남친 사진이 나왔고, 그걸 보니 좀 부끄러웠고, 그 사진은 링크드인으로 연결되었고, 그리하여 이래저래 안녕, 하게 되었고, 그가 안녕, 한 때가 하필 트리스탄과 이졸데 공연 중이었고, 소설 속 S도 어차피 그 공연에 갔으니, 에라, M을 30년 전 남자친구라고 일단 적었는데, 재미있을까 조금 궁금한 마음으로, 그렇게 쓴 후부터는, 웬걸, M이 자기 혼자, 내 도움 없이 행동하기 시작하고, 그래서 점점 낯선 사람이 되어갔고, 이야기는 되돌릴 수 없는 방향으로 가게 된다.


사실상 M은 첫 장면 외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데, 그래도 명색이 M을 만든 나는 그를 잘 알아야 하기에, 어느 소설 작법 지침서에 그렇게 되어 있더라, 키 몸무게 외모 학력 성격 배경 직업 결혼유무 취미 재산 병력 휴가 첫사랑... 이런 걸 하나하나 만들었는데, 막상 첫 장면에서 M의 머리가 긴지 짧은지, S인척 하고 글을 쓰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짧으면 군인 같고, 길면 노숙자 아니면 락밴드가 떠올랐기에, 대충 중간 길이라고 썼는데, 남자 머리를 중간 길이라고 할 때, 일반적으로 어느 정도를 말하는 건지 고민하다가, 감이 오지 않는데도 귀찮아서 그냥 그걸 고수하고, 그다음엔 옷도 입혀야 하는데, 이건 첫 장면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라서, 왜냐하면 S가 M의 옷감에 꽂히기 때문이고, 옷감이 좋으려면 명품이어야 말이 되기에, 너그럽게 비싼 옷을 입혀주는데, 로로피아나 캐시미어 스웨터에 같은 브랜드 바지, 회색에 벽돌색으로 세련되게 코디하면서, M의 연봉이 10억 정도 되면, 세금으로 반은 날아가서 5억이라 치면, 부담 없이 로로피아나를 살 수 있나 생각하다가, 물론 내가 이 브랜드와 친한 건 아니고, 입어본 적도 없고 만져본 적도 없고, 다만 동생 친구가 그 회사에서 일해서 패밀리 세일 때마다 90% 할인가에 사라고 했는데, 동생은 귀찮아서 안 갔고, 나중에 엄마가 왜 안 샀냐고 타박했고, 나라도 소설에서 써먹으면 덜 아쉽지 않을까 싶었는데, 사실 그것도 거짓말이고, 남자 옷 생각하는 게 따분해서 대충 그렇게 입혀준 셈인데, 현실에서 나는 명품을 좋아하는 속물근성의 남자는 싫어하지만, S는 나와 취향이 다르니 괜찮겠지 싶고,


오늘 오전에는 분명히 오페라 2막 장면을 다듬으려고 앉았고, 초반에는 목표가 있었는데, 친구가 카톡으로 옷 사진을 보내면서 골라달라고 하고, 나는 휴대폰을 저 멀리 거실에 두고 방으로 들어왔고, 나름 뿌듯했지만 얼마 못 가서 곧바로 친구에게 답장 안 하는 건 의리 없는 행동 같기에 쇼핑을 도와주다가, S한테도 스타일 있는 옷을 입혀야 하니까 쇼핑몰을 조금 헤맸지만, 정작 S는 유행을 따르는 걸 싫어하는 타입이니, 그렇담 빈티지를 좋아할 테고, 결국 빈티지 둘러보다가 정신을 잃고 샌들을 하나 지른다.


겨우 다시 돌아와서 앉고, 음악회 장면을 다듬기 위해 바그너를 검색하고, 니체가 바그너에 대해 뭐라 했는지도 찾아보고, 요 단어들을 버무려서 문장을 만들기 시작하는데, 어쩐지 술술 막힘 없이 맞춤표도 없이 몇 줄이나 계속되고, 순간 대단한 문장이라고 좋아하다가, 다시 읽어보니 가식 투성이라서 지우니 두 줄밖에 남지 않고,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유튜브로 음악을 틀어놓고, 2막 3막을 듣다 보니 한 시간이 넘게 지나가고, 이제는 어느 음악학자가 뭐라고 했는지 떠올리려고 애를 쓰는데 당연히 기억날 리 없고, 대신 시간만 사라진다.


어깨가 굳어서 담배를 피우러 나가고, 금연 중이라는 사실을 잠깐 잊고, S는 인터미션마다 담배를 피우고, 연기를 내뱉을 때마다 과거를 기억하는 인간으로 설정해 두었는데, 이쯤 되면 너무 골초 아닌가 싶지만 이미 두 쪽이나 썼으니 늦었고, 그 정도로 예민한 인물이라면, 담배를 끊을 생각도 해야 하지 않나 싶다가도, 나도 못 끊었는데, S한테 금연하라 하는 건 좀 비겁한 것 같은데


이렇게 시시한 것들과 씨름하다 보니 결국 오늘도 시시한 문장 몇 줄 겨우 썼고,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렇게 쓰고는 있지만, 이게 과연 소설을 쓰는 일에 필요한 작업인지는 잘 모르겠고, 어쩌면 이 연재 자체가 소설을 쓰지 않기 위한 가장 정교한 방법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고, 그 생각이 꽤 그럴듯해서 더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