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굽이

by 유재은


누군가 한 분야에서 20년 넘게 일해왔다고 하면 그만이 가질 수 있는 전문성과 그것을 지켜나가는 마음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정작 21년을 같은 직업에 종사하고 있는 나는 무력감에 빠졌다. 일로서는 가장 큰 성과를 거두기 시작했지만 공허함은 점점 커져갔다. 아직 일할 수 있음을 감사히 여겨왔는데 대책 없이 쉬고 싶다니. 처음으로 일요일 오후가 되면 마음이 무거워졌다.


어린 시절 나는 빨강머리 앤의 친구, 다이애나 같은 아이였다. 조용하고 성실하며 어른들이 좋아할 것 같은 아이. 숙제는 일찌감치 해두고, 하지 말라고 하는 것에는 호기심조차 지워버리며 딱 노력하는 만큼의 결과를 얻었던 학생. 방학이면 세계 명작 동화와 위인전 속에 뒹굴고, 어찌나 말이 없던지 학원 선생님이 목소리 좀 들어보자고 했던 꼬마.


내향적인 그 아이의 마음속에는 앤이 숨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작은 아씨들>의 조용하고 따뜻한 베스를 좋아하면서도 자기만의 색이 분명했던 조의 꿈과 삶을 동경했다. 어른들이 좋아하는 아이는 마음이 아픈 아이일지도 모른다고 하던데 나도 그랬을까.


얼마 전 앤의 책을 다시 읽었다. 그곳에는 어린 시절에는 보지 못했던 앤의 모습이 있었다. 어릴 때 나는 앤이 지닌, 언제나 밝고 에너지 가득하며 불의에 맞서는 용기와 열정이 부러웠다. 그런데 성인이 되어 다시 만난 앤은 여느 십 대처럼 외모에 대한 열등감을 지니고 있으며 어릴 적 부모를 잃고 여러 번 파양 된 상처 많은 아이였다. 하지만 앤은 자신의 결핍과 좋지 못한 상황을 풍부한 상상으로 버텨낸다. 공상은 앤으로 하여금 현재의 고난을 견딜 수 있게 해 준 것이다. 슬픔도 기쁨도 다른 사람보다 더 깊이 느낄 수 있기에 힘겨울 수 있는 삶이었지만, 수많은 말들로 스스로를 다독이고 감정을 고스란히 표현함으로써 현실을 인정하며 자신만의 길을 정해 나아갈 수 있는 앤의 지혜.


앤이 퀸스에서 돌아와서 거기 앉았던 날 이후,
앤의 세계는 좁아졌다.
하지만 앞에 놓인 길이 비록 좁다 해도,
그 길에 조용한 행복의 꽃이 필 것이다.
성실한 노동과 고귀한 열망과 따뜻한 우정이
앤에게 기쁨을 안겨주리라.
어떤 것도 앤이 공상할 권리와
꿈꾸는 세계를 빼앗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길에는 언제나 굽이가 있다!


모든 것이 완벽했던 날은 오래가지 않았다. 행복은 불행이 시작되기 전 그것을 견디게 해주는 힘으로 찾아오는 것일까. 언제나 말없이 자신의 편이 되어주던 매슈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후 무뚝뚝한 다정함을 보여주던 마릴라까지 눈이 멀 위기에 빠지자 앤은 그토록 바라던 대학 진학과 장학금을 포기하고 마릴라와 에이번리 집을 지켜낸다.


기꺼이 자신의 꿈을 접는 앤이 안쓰러우면서도 그 작은 아이에게서 참사람의 모습을 배운다. 앤은 현실에 굴복하여 꿈을 포기한 것이 아니다. 길에는 언제나 굽이가 있음을 아는 앤은 작아진 세계 속에서 조용한 행복의 꽃을 보는 혜안으로 또 다른 꿈을 향한 공상의 권리를 지켜나간다. 지나치게 밝은 재잘거림 속에서 한 소녀가 걸어온 길의 굽이들을 간과하고 있었는데, 앤은 절망의 순간들에 좌절하지 않고 자신이 지켜갈 수 있는 것들로 또 다른 길을 만들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봄 내내 일이 끝나면 무너져 내렸다. 꿈을 향해 집중하고 싶은데 생업을 포기할 수 없는 상황이 내 길에 또 하나의 굽이를 만들었다. 할 수 없음에 집착하는 마음이 잘하고 있는 현재를 흔들었다. 어느새 햇볕 가득한 여름이다. 더 이상 꿈을 향한 열망이 내 삶을 무너지게 할 수 없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책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아 안 하던 일도 했다. 드라마 몰아 보기도 하고 계획 없는 하루를 보내기도 했다. 아직 내게는 굽이를 공상으로 세울 힘이 모자라지만 이 굽이에도 끝은 있을 것이다.


좋아질 수 없는 것들에 얽매여

'좋아질 수 있는 것'들을 잃지 않기.


뜻대로 할 수 없는 일에 매달려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놓치지 않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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