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방송계에서 '식빵'이라는 욕은 엄청난 금기다. 프로그램 장르에 상관없이, 누군가 지상파에서 무심코 '식빵'을 구웠다가는 엄청난 악플과 함께 당사자는 프로그램에서 퇴출되고 담당 PD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양복 차림으로 불려갈 것이다.
그러나 그 '식빵'이 지상파를 타는 게 용인되는 단 한 가지 예외가 있다. 바로 스포츠 국가대항전 중계다.
세계적인 센터 김연경은 이 장면 하나로 '식빵언니'가 되었다.
경기가 잘 안 풀릴 때면 선수들은 식빵을 외치며 전의를 다진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오랫동안 쉽게 중계방송에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그런 모습이 절묘하게 전파를 피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중계차에서 화면들을 적절히 배합한 게 아닐까.
내가 기억하기로는 국가대표 경기 중에 '식빵'이 송출된 건 2006년 독일 월드컵 때부터였다. 물론 그 이전에도 상대 선수와 싸우다가 욕하는 장면은 간간이 나오긴 했다. 하지만 식빵을 굽는 선수의 클로즈업이 화면을 가득 채우는 문화충격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김진규는 2004년 아시안컵 때 이란 선수들에게 가운뎃손가락을 날리다가 국내 팬들에게 호되게 혼난 적이 있다.
2006년 독일 월드컵 토고전. 한국이 이천수의 골로 토고에 1대 1로 맞서던 70분이었다. 송종국이 여유로운 상태에서 골문 앞으로 오른발 크로스를 띄웠다. 조재진은 넘어지면서 머리를 갖다 댔지만 공은 골대 왼쪽으로 빗나갔다. 조재진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외쳤다.
"아- 시익-빵."
지상파 3사에 식빵이 생중계로 나가는 역사적인 순간
하지만 조재진이 식빵을 구운 지 1분 만에 안정환의 그림 같은 역전골이 터지고 한국이 첫 승을 거두어 조재진의 식빵은 그 역사적인 의미에 비해 많은 주목을 받지 못했다.하지만 열흘 뒤 스위스와의 경기에서는많은 한국인의 심금을 울린 바로 '그 식빵'이 터져나오게 된다.
2006년 6월 23일 밤, 독일 하노버.
한국은 스위스에 두 골 차로 끌려가고 있었다. 주심 오라시오 엘리손도(Horacio Elizondo)는 14분엔 김남일의 돌파를 몸으로 막고, 53분엔 파트릭 뮐러가 페널티지역에서 범한 핸드볼 반칙을 못 본 채 지나갔다. 이윽고 72분에 아직도 논란이 되는'오프사이드 번복' 판정으로 알렉산더 프라이의 골이 인정되자 한국 선수들(과 팬들)은 평정심을 잃기 시작했다. 이제 16강 진출을 위해서는 토고가 프랑스를 상대로 비기거나 이겨야 했지만, 토고 역시 무기력하게 0:2로 지고 있었다.
82분, 한국은 코너킥으로 기회를 잡았다. 이천수는 오른쪽 코너에서 오른발로 휘어 올라가는 크로스를 올렸다. 조재진은 알렉산더 프라이와 파트릭 뮐러의 이중 마크를 이겨내고 머리로 공을 떨궜다. 골대를 등지고 있던 이호는 그 공을 바로 눈앞에 서 있는 김진규에게 밀어주었다. 김진규는 지체 없이 오른발 안쪽으로 강슛을 날렸다. 세 번의 코너킥 기회를 소득 없이 놓친 한국이 드디어 만회골을 넣나 싶은 순간이었다.
이 순간 그 누가 김진규를 욕할 수 있었으랴.
그러나 이호의 뒤에서 김진규를 향해 달려나온 필리프 데겐이 공을 향해 몸을 날렸다. 찰나와 같은 순간에 공은 데겐의 다리를 맞고 크로스바를 튕기며 위로 넘어갔다. 주심은 한국의 코너킥이 아닌 스위스의 골킥을 선언했다.김진규는 돌아서면서 있는 힘껏 세상을 향해 한 마디를 내질렀다.
아! 식빵!
팀의 경기력에 비해 유난히도 터지지 않던 골운, 오늘따라 석연찮기만 한 주심의 판정, 그리고 실점 순간에 오프사이드였더라도 부심을 믿지 말고 끝까지 공을 따라갈 걸 하는 후회... 스물한 살 수비수의 '식빵'은 그 모든 것을 담은 마음의 소리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경기를 보던 모든 한국 팬들의 심정이기도 했다. 사상 첫 원정 16강의 꿈이 무너져 내리는 데 72분이 걸렸다는 것. 그리고 골킥이 선언된 그 순간 동점골에 대한 희망 대신 찾아오는 패배의 직감. 2006년 6월 24일 한국의 새벽은 그렇게 외마디 '식빵'과 함께 조용해졌다. 싸늘해진 분위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태양만이 야속하게 광장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2006년의 김진규는 한국 축구 최고의 수비 유망주였다. K리그에서 날아다니던 동갑내기 박주영의 유명세에 다소 가려진 감은 있었지만, 그는 박주영보다도 먼저 성인대표팀 무대를 밟은 선수다. 김진규는 2004년 아시안컵에서 무릎을 다친 김태영을 대신해 겨우 열아홉 살의 나이로 주전 수비수로 뛰었다. 그해 말 독일전에서는 발락, 슈바인슈타이거, 람, 쿠라니가 포진한 전차군단을 상대로 풀타임을 뛰며 기적같은 완승에 이바지했다. 가끔 나오는 실수들로 팬들에게 욕을 먹기도 했지만, 강한 완력을 바탕으로 한 그의 터프한 수비는 본프레레와 아드보카트 감독을 모두 만족시켰다. 그의 주특기인 대포알 같은 장거리 프리킥은 덤이었다. 비록 8년에 걸친 국가대표 경력 중 단 한 번 터졌을 뿐이지만, 상대는 중국이었고 천금같은 동점골이었다는 게 중요했다. 마침내 그는 유경렬을 밀어내고 한국 팀의 주전 수비수로 낙점받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세계열강을 맞은 김진규의 플레이는 팬들의 기대치를 넘어서지 못했다. 그는 백전노장 최진철과 함께 분투했지만, 아차 하는 순간 재빠른 상대 선수들은 뒷공간을 파고들기 일쑤였다. 프랑스와의 경기에서는 김영철에 밀려서 벤치를 지켜야 했다. 그러나, 16강을 향한 마지막 승부처인 스위스전에서 그는 다시 아드보카트 감독의 중용을 받았던 것이다. 누구보다도 잘하고 싶었겠지만 마음대로 안 될 때 터져나온 그의 식빵을 감히 아무도 욕할 수 없었으리라.
독일 월드컵 이후에도 김진규는 이듬해 열린 아시안컵까지 팀의 주축으로 중용을 받았다. 그러나 핌 페르베이크('베어벡'으로 알려진) 감독이 사임하고 허정무 감독이 부임하면서, 그는 강민수와 조용형, 이정수 같은 선수들에게 밀려 큰 무대를 밟지는 못했다. 하지만 프로 무대에서는 FC 서울의 리그 우승과 AFC 챔피언스리그 준우승을 이끌며 선명한 발자취를 남겼다. 2018년 은퇴한 그는 FC 서울 U-18팀 오산고 코치를 거쳐 올해부터는 FC 서울의 1군 코치로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다.
2020년 8월의 어느 주말.
나는 무심코 온라인 중고장터를 보다가 2만 원짜리 매물에 마음이 혹해 또 충동구매를 했다. 빛이 바래 후줄근해진 옛날 국가대표 유니폼이었다. 2006년부터 2007년까지 입었던 하얀색 유니폼. 이 디자인은 출시 당시엔 '한국의 멋을 살렸다'며 호평을 받았지만 정작 대표팀이 월드컵과 아시안컵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내지 못하자 저조한 인기를 보이며 사라졌던 유니폼이다. 지금도 중고장터에선 새 제품을 출시 당시보다도 싼 가격에 구할 수 있는 흔하디 흔한 셔츠다.
하지만 이 물건은 예사롭지 않았다. 팔에는 보기 드문 패치가 붙어 있었다. 등에 새겨 있던 선수 이름도 '박지성'이나 '이영표', '안정환' 같은 흔한 스타플레이어가 아니었다. 나는 심상치 않은 옷임을 직감하고 빛의 속도로 카드를 긁었다. 배송은 빨랐다. 배달이 일상의 필수요소가 된 코로나 시대임을 감안해도, 하루 반나절 만에 택배가 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판매자는 빛이 바랬다고 했는데, 막상 받아보니 다행히 황변이 그리 심하진 않았다.
오늘의 주인공 김진규의 셔츠. 뒷면 아래쪽이 망사 재질로 된 '월드컵 버전'이다.
택배봉투 속에는 2006년 월드컵 때 김진규 선수에게 지급된 유니폼 셔츠가 고이 접힌 채 들어 있었다.이 옷이 김진규 선수가 실제 입은 옷인지 아니면 예비용으로 라커룸에 있었던 옷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누군가 이 옷을 여러 번 입었던 것만은 분명했다. 군데군데 올이 나가고 얼룩이 지고, 왼팔에 붙은 태극기 패치는 반쯤 지워져 있었다.
나이키 로고는 자수인데 대한축구협회 마크는 프린팅이다. 빨래만 돌려도 찢어지고 떨어져 나가는 재질로 수집가들 사이에 악명이 높다.
2006-08년의 대한민국 대표팀 유니폼은 전무후무하게도 매우 다양한 버전으로 생산되었다. 판매용은 '투혼' 글씨가 오른쪽 허리에 인쇄된 것(2006년 생산)과 인쇄되지 않은 것(2007년 생산)으로 구분되었다. 선수지급용은 '투혼' 글씨의 위치, 밑단의 본딩 처리 여부, 등허리 부분의 망사 재질 여부로 나뉜다.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버전들이 있었다(정확하다확신할 수 없으니 아시는 분은 말씀해 주시길 부탁드린다).
1. '투혼' 글씨가 오른쪽 허리 뒤에 달린 것. 2006년 3월부터 5월까지 입음.
2. '투혼' 글씨가 옷 안쪽으로 숨고 허리 뒷부분이 망사 재질로 된 것. 2006년 6월에만 입음.
3. 2번에서 허리 뒷부분 망사가 사라지고 밑단이 박음질 대신 본딩으로 처리된 것. 2006년 후반기부터 2007년까지 입음.
4. 3번에서 밑단이 박음질로 된 것. 최후기형.
그렇다면 이 셔츠는 월드컵 기간에만 지급된 두 번째 버전이라 할 수 있다. 결정적인 단서는 왼팔에 붙은 월드컵 패치다.
2006년 독일 월드컵 오피셜 패치. 정품은 초록색 얼굴의 오른쪽 입꼬리가 사진처럼 노란색이다. 패치 한 장이 웬만한 유니폼 값보다 비싸다.
중요한 대회에서 소매에 대회 엠블럼을 붙이고 나오는 건 UEFA 유로컵에서 시작한 전통 같다. 유로 96에서 엠블럼 패치가 등장한 이래 월드컵에서도 2002년부터 팔에 패치를 달기 시작했다. 국제대회 때마다 선수들이 달고 나오는 대회 패치는 많은 수집가들의 목표가 되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FIFA는 선수지급용 패치를 유출하는 것을 엄금하고 있다. 그래서 선수들이 달았던 오피셜 패치는 정식 경로로 유통되는 일이 없다. 2006년과 2010년 월드컵 패치가 특히 심했는데, 이 패치들은 매우 정교하게 제작되었으면서도 시장에는 풀리지 않아 마니아들의 애간장을 태우고 있다. 돈독 오른 FIFA라면 한 번쯤 팔아볼 법도 한데...
'K'자가 떨어져 나가고 있길래 다리미로 눌러줬더니 자국이 남아버렸다.
왼팔의 태극기 프린팅은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닳아버렸다.
선수용 프린팅에는 'WC06■1'이라는 위조방지 문구가 새겨져 있다.
14년 전 셔츠지만 생각보다 디테일이 세심하다. 앞뒤 번호 프린팅 아래쪽에는 위조 방지 문구까지 들어 있다. 셔츠 아랫단은 박음질 대신 본드로 마감되어 있다. 선수용 유니폼을 판매용과 구별하는 특징 중 하나다. 이 시즌 선수지급용과 판매용의 원단은 똑같은데, 선수용은 판매용보다 허리라인이 안으로 들어가 있고 아랫단이 높은 확률로 본딩 처리되어 있다는 특징이 있다. 물론 앞서 말했듯 밑단이 판매용처럼 박음질로 된 예외도 있다. 그런데도 선수용은 판매용보다 세 배 정도 비쌌다. 대체 왜 그리 비쌌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위조방지 프린팅은 앞면에도 선명하게 붙어 있다.
판매용 셔츠에서 허리에 붙어 있던 열암 송정희의 '투혼' 글씨는 엠블럼 뒤편으로 숨었다.
이 유니폼의 별명은 '투혼'이다. 2002년의 한국팀을 상징하는 말이 된 이 낱말은 서예가 열암 송정희(1943-)의 글씨로 2006년부터 2010년까지 대한민국 대표팀 유니폼에 인쇄되었다. 원래는 유니폼 허리 오른편에 새겨져 있었지만 FIFA에서 '유니폼에 나라나 팀 이름 외에는 어떤 문구도 쓸 수 없다'라고 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옷 안쪽으로 옮겨졌다는 소문이 있다. 다른 나라 유니폼에서는 볼 수 없는 한국만의 디자인 아이콘이었는데 2010년 이후로 사라져 버린 게 아쉽다.
2006년 6월의 그 새벽, 나는 거리응원에는 나가지 못하고 가족들이 모두 잠든 집에서 혼자 거실에 나와 숨죽여 텔레비전을 보면서 탈락의 눈물을 삼키고 있었다. 14년이 지난 지금, 스물한 살 김진규는 3년 차 지도자가 되었고, 나는 그때의 김진규 선수보다도 더 나이를 먹은 채로 방구석에 걸린 그의 옷을 우두커니 바라보다 문득 이 글을 쓰고 있다. 어쩌면 그의 커리어를, 그리고 한국 축구의 역사를 조금은 바꾸었을지도 모를 그 찰나를 떠올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