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개국 간호사 면허시험을 합격하고도 '호주 요양보호사'를 선택한 이유
2017년 두바이에서는 더 이상 나에게 러브콜을 보내주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미국간호사로 방향을 틀어 재활전문병원에서 야간전담(나이트 킵) 간호사로 시작해서 낮에는 아이엘츠학원 다니면서 공부하고 밤에 근무를 했다.
"경력 단절이 6개월을 넘기면 안 된다"는 에이전시의 경고와 두바이 병원들의 조언은 채찍질이 되어 나를 다시 병원으로 몰아넣었다. 가족들의 압박도 심해 병원에 가서 따박따박 월급 받는 모습을 보여줬어야 했다.
돌이켜보면 이때 나에게 ‘여백’을 주지 못했던 것이 몹시 아쉽다. 4년 내내 휴학 없이 졸업해 면허 잉크가 마르기도 전인 2월에 교육을 받고, 3월부터 바로 근무를 시작했다. 근무 기간 내내 휴가나 연차는 나에게 없는 단어였다. 당시 병원에서 근무표를 짜주는 대로만 살았는데, 나중에서야 연차 수당을 돌려받으며 "엄마, 연차가 뭐야?"라고 물었을 정도였다. 그렇게 세상물정 모르고 숨 가쁘게 살았는데도 여전히 나는 조급함에 쫓기고 있었다.
지금 시간이 훌쩍 지나 돌아보니, 숨만 쉬며 일하느라 쓰지도 못한 돈으로 유럽 배낭여행이라도 가서 삶을 환기했다면 어땠을까 싶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해외 간호사라는 꿈을 20대 안에 반드시 이루고 싶다는 욕심이 강했고, 그것만이 내 운명을 바꾸는 유일한 길이라 믿었다. 한국에서의 간호사 생활은 답답하기만 했고, 주변에 본이 될 만한 롤모델도 없었다.
물론 당시 입사했던 재활전문병원은 지금도 좋은 조건의 병원이라고 생각한다. 기숙사, 직원어린이집도 제공해 주었고, 병원전반적인 분위기도 유연한 편이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원하는 바가 워낙 확고하다 보니 현실과의 괴리로 인해 힘들었다.
나이트 킵 근무 한 달에 15-16일 정도 근무하기 때문에 초반에 주변사람들이 세상에 그런 직장이 어디 있냐며 부러워했다. 그러나 밤에 잠을 자지 못하면서 공부를 하며 1년을 넘기자 몸의 면역은 바닥났고, 살도 쭉쭉 빠지면서 오히려 몸이 아파 병원을 다녀야 했다. 마음은 급한데 몸은 따라주지 않으니 공부에 집중이 될 리 없었다. 결국 도저히 견디지 못해 3교대 종합병원 중환자실로 이직을 선택했다.
마음 같아서는 일 자체를 정말 쉬고 싶었다. 몸은 아프고 일도 공부도 제대로 되지 않아 자책만 커졌다. 하지만 이직한 곳을 구해두고 한 달간의 짧은 휴식을 가진 뒤 곧장 다시 일을 시작했다. 내 꿈에 몰입해도 모자랄 시기에, 부모님의 마뜩잖아하는 시선을 견디며 몹시 눈치를 보고 있었다. 타인의 시선 때문에 부모님을 실망시키는 나 자신을 견디지 못했던 것, 그것이 내 20대의 기억 중 가장 아프게 남아있다.
이직을 하고 일하다가 아는 언니한테 연락이 왔다. 첫 대학병원 입사동기지만 나이는 10살 많아 의지를 많이 했던 언니인데 근황을 주고받던 중에 사정을 말했고, 사실 아직 미국간호사로서의 꿈을 버리지 못한 것 같다며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런데 언니가
"외국이라고는 두바이 5일, 오사카에 미국간호사 면허시험 치러 간 게 다면서 이민을 너무 쉽게 보는 거 같아. 이민은 삶을 다시 시작하는 거야. 외국에 잠깐이라도 거주해 본 적도 없는데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거 아니야? 잘 생각해 봐"
그 말을 곰곰이 되새기다 재활병원 시절 월드잡 플러스에서 보았던 '호주 노인복지 자격취득 연수과정'이 떠올랐다. 필리핀에서 어학연수 3개월을 거쳐 호주에서 자격을 취득해 일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자격 취득 후의 행보는 온전히 내 선택에 달려 있었다.
재활병원근무당시 1기를 모집했었는데 이미 한국, 미국, 두바이 간호사 시험에 합격했는데 굳이 단계를 낮춰 요양보호사의 길을 가는 것이 자존심 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도 저도 안 되는 기간이 길어지자 생각이 바뀌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 가서 오직 내 꿈에만 몰두할 수 있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2019년, 20대의 막바지. 나는 마지막으로 나에게 기회를 주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