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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인메이커 Aug 18. 2016

루시드 드림 I

대낮의 런던과 잊혀지는 밤

항상 그때그때의 1보만이 진보이며
2보도 3보도 n+1보도 결코 진보가 아니다

- 발터 벤야민 <아케이드 프로젝트>


깊은 잠에서 좀처럼 깨어나지 못했다.


영국의 밤은 추분(秋分)을 기점으로 밤의 길이가 하루에 2분씩 빠르게 늘어나다가 동지(冬至)에 이르러서는 오후 4시께부터 낮을 위협하기 시작한다. 겨울의 짧은 햇볕이 선사하는 싱그러움을 한 톨이라도 놓칠세라 하이드파크의 오솔길을 거니는 시민들은 가방에서 얇은 고무매트나 돗자리를 꺼내 깔거나, 그도 아니면 벤치에 아무렇게 자리를 잡고 누웠다. 호숫가의 개들은 주인이 있는 곳에서 일정한 반경을 유지하며 신나게 풀밭을 뛰어 다녔다. 영국인들은 일조권의 욕망이 무척 강하다. 우리가 일주일 동안 런던에 머무르며 비가 내리지 않은 날은 단 하루에 불과했으며, 그 하루도 대서양에서 수증기를 잔뜩 머금고 온 구름이 햇빛의 활동을 수시로 방해해 어둡고 침침한 도시의 분위기가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우리는 희소한 런던의 밝은 빛을 기억하기 위해 오전부터 무거운 배낭을 메고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지정학적, 기후적 특성으로 인해 시민들은 태양이 아직 건재한 대낮에 모든것을 쏟아내었다.



그리고 밤이 되면 시민들은 또 다른 빛이 존재하는 실내ㅡ펍과 축구장과 클럽ㅡ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이 낮에 벌인 일들은 원 파인트 맥주에, 프리미어 리그 경기에, 전자음악에 빨려들 듯 사라졌다. 아직 어두워지지 않은 팔월 초저녁의 브릭레인 거리는 더 어두워지기전에 최대한 젊음을 발산하려는 청춘들의 난장으로 어지러웠다. 우리는 브릭레인의 한 펍에서 매주 화요일마다 열리는 오픈마이크 공연에 참가하였다. 즉석에서 팀 이름을 'Travelers from Korea'로 정하고 계단을 올라갔다. 2층에 있는 작은 공연장은 음악을 사랑하고 약간의 용기가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마이크를 잡을 수 있었다. 춤을 추거나, 피아노를 위시한 각종 악기를 연주하는 것은 물론 드물게 시를 낭송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윽고 기타연주와 함께 두 곡을 연거푸 공연하고 내려온 우리는 서비스로 받은 예거밤 한 잔을 들이키며, 오늘의 공연을 천천히 복기했다. 밤 열시에 빅토리아에 내려 숙소로 돌아가는 골목길은 길고 어두웠다.  


런던에서 보낸 낮과 밤의 소모전이 누적되면서, 내게 특별한 여행의 현재는 점점 멀어졌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기억을 하는 힘이 사라진 것이다. 세븐시스터즈에 갔다온 목요일 밤에도 나는 숙소에 도착한 후 맥주를 한 잔 털어넣고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었다. 밤의 망각은 모든 것을 집어 삼켰다. 런던의 일정이 끝나고 Travelers from Korea는 한국으로, 프랑스로 흩어졌다. 홀로 프랑스로 떠나는 비행기에 몸을 실은 지 삼백육십일이 지났고, 삼백오십아홉번의 밤을 거치면서 여행지에서의 감정과 냄새와 하늘의 색깔도 희미해졌다. 팔월 오일에 하이드파크에 있었던 나를 팔월 육일로 옮겨도 아무런 마음의 동요가 일어나지 않는 기억의 왜곡이 빈번해지고, 나중에는 그 왜곡의 노력조차 기울이지 않게 되었다. 삼년동안 몸담았던 직장을 그만두고 나서 어렵게 떠난 낯선곳에서의 하루. 그 소중한 시간의 원석이 점점 부식되어 가는 것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나는 계속해서 망각했다. 마치 스스로 꿈이라는 것을 알고도 계속해서 꾸는 자각몽처럼 자기결정권이 없는 나의 반추는 허공속에서 속절없이 뒤틀리고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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