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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은초 Jul 22. 2020

세상의 변화를 꿈꾸며 한 발 더 내민다, 이태옥

내 이름을 불러줘 no.2

<내 이름을 불러줘>는 31개 시군에 거주하고 있는 경기 시민들을 릴레이 인터뷰 형식으로 소개하는 커뮤니티 아트 프로젝트입니다. 프로젝트 기획자는 최초의 인터뷰이만 섭외하며, 이후로는 인터뷰이가 자신의 지인 중 다음 차례의 인터뷰이를 추천하는 방식입니다. 첫 번째 인터뷰이는 다섯 번째 인터뷰이를 전혀 알지 못하지만, 어쩌면 여섯 번째 인터뷰이 혹은 열 번째 인터뷰이와는 어떤 접촉점이 있을 수도 있지요. 이런 방식으로 인터뷰이는 지인의 지인 형식으로 모두 연결되고, 우리가 사는 사회의 축소판을 구현해내게 됩니다. 본 프로젝트의 무대는 경기도이지만, 우리 사회를 이루는 이러한 방식은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일 겁니다. 우리는 실상, 모두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각각의 인터뷰이는 그들 삶을 이루는 행복, 가치, 꿈, 흔들리던 순간 등을 묻는 10가지 질문에 답하며 자신의 경험과 삶을 나누고,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은 다른 누군가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또 다른 모양의 길과 삶을 들여다봅니다. 이것은 나의 이야기, 당신의 이야기, 그리고 익명으로 존재했던 이웃들의 고유한 삶을 품고 있는 도시의 다양한 얼굴입니다.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이웃들의 이야기가 나를 돌아보게 하고, 다른 이의 걸어간 길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엿보며, 불확실한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희망을 만들어갈 힌트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이름과 사는 곳은?

 고양시 일산에 사는 이태옥입니다. 




2. 당신이 사는 도시에서 당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요?

계획도시의 세련미와 도시를 감싸는 가로수 숲길



3. 어떤 일을 해오셨고, 지금 몰입하고 있는 일은 무엇인가요?

이렇게 살고 있어요

학생운동, 농민운동, 여성운동, 지역복지운동, 환경운동을 하면서 다양한 영역의 사회운동가로 살아왔습니다. 늘어놓고 보니 많이도 돌고 돌았네요. 희망의 아이콘이었다가 지금은 권력의 아이콘처럼 불리는 소위 586세대(50대-80년대학번-60년대생)로 한 시대와 치열하게 한판 벌인 기분입니다. 제가 돌고 돌았던 농촌, 여성인권, 복지, 생태 현장에서 세상의 진일보를 위해 여전히 애쓰고 있는 많은 활동가들에게 동지애를 보냅니다. 이번 생은 세상을 눈곱만큼이라도 변화로 밀고 갈 수 있는 편에 서려고 합니다. 한 번씩 뒷걸음치듯 보여도 그 조차도 구력이 쌓여 조금 더 좋은 방향으로 밀고 가더라고요.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닌 셈이지요. 사람들은 저에게 초 긍정 마인드라고 하는데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변화는 일어나고 있다고 믿는 편입니다. 제가 선 곳에서 한발 더 내밀기를 하고 있습니다.


돌고돌아 생태 

지금 가장 몰입하고 있는 일은 ‘생태’입니다. 동태, 명태의 생선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요.  ‘지구에서 자연과 조화로이 사는 삶을 많은 사람들과 어떻게 구현해낼까?’ 골몰하고 있습니다. ‘생태’는 ‘생존’이니까요. 제 닉네임이 ‘나나’ 또는 ‘우숲’인데요. ‘나이만큼 나무를 심자’, ‘우리는 숲입니다’의 줄임말이라고 말씀드리면 제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아시겠죠? 원불교 환경연대 사무처장 7년을 마치고, 작년부터 생태 강의를 하며 ‘나이만큼 나무를 심자’ 사업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50년생 나무 한그루가 갖는 경제적 가치가 1억 4천만 원입니다. 산소생산 3,400만 원, 물 재생산 3,900만 원 대기정화 6,700만 원의 효과입니다. 큰 떡갈나무는 연간 151,000리터의 물을 뿜어줍니다. 한 사람이 1년에 3그루의 나무를 사용하고 있으니 100세 인생 기준 300그루를 사용하는 셈이지요. 나무 300그루를 심어 420억 가치를 지구에 돌리는 일, 멋지지 않나요?  

장지오노의 소설 ‘나무를 심는 사람’에서 영감을 받은 이들이 수십 년간 나무를 심어 황무지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만드는 사례를 심심찮게 봅니다. 이산화탄소로 황폐화되어가고 있는 지구를 지키는 생태적 삶, 나무 심기로 찾아가고 있습니다. 

 



4. 무엇이 당신의 생각과 행동에 영감/영향력을 주나요? 혹은 그런 사람이 있나요?

단연 ‘기후위기’입니다. 

몇 년 전 만해도 추상적이었던 이 단어가 지금은 제 삶을 규정하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코로나19라는 인류의 선생이 지금처럼 살 수는 없다고 위협적으로 가르침을 주어도, 인간 중심의 편리를 향한 폭주는 멈출 줄 모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는 지구의 안위를 걱정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인간종, 아니 저의 안위가 걱정입니다. 코로나19는 경고에 불과합니다. TV 프로그램에서는 육식을 예찬하고, 우리는 고기를 먹지 않는 날을 손에 꼽을 정도로 과도한 육식 사회를 살고 있습니다. 소와 돼지의 사료를 만들기 위해 열대우림이 파헤쳐지고, 산소를 배출하던 나무들이 쓰러지면서 지구 대기는 균형을 잃습니다. 북극 빙하가 녹아 해수면은 높아지고 탄소 농도가 높아진 바다 산성화로 바다생물들의 멸종 속도도 빨라졌지요. 동토층에 매립되었던 각종 바이러스가 기후온난화로 얼음이 녹으면서 풀려나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하기 힘듭니다.  

문제 해결을 위해 무엇이라도 해 볼 수 있는 시점을 티핑포인트(급변점)라고 하는데, 기후과학자들은 이 속도로라면 티핑포인트가 길게는 8년에서 짧게는 5년 남았다고 합니다. 기후위기를 막아보자고 콘센트를 뽑고, 기후학교를 열고, 거리에 나가 “지구야 그만 변해 우리가 변할게”라는 피켓을 들고 기후행동을 합니다. 뭐라도 할 수 있는 얼마 남지 않는 시간, 뭐라도 해 봐야겠습니다. ‘기후위기’는 제 일상뿐만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지배하는 키워드입니다. 



5. <나의 컬렉션> 당신이 아끼는 7가지 아이템으로 당신의 취향을 소개해주세요.

하나. 퍼머컬쳐(Permaculture) 디자인 과정 수료증 

뽀글이 빠마는 아직도 농촌을 지배하는 헤어스타일입니다. 오랜 시간 ‘뽀글이’를 유지하는 것이 관건인 빠마는 퍼머넨트(permanent), 즉 '지속적'이라는 뜻이죠. 퍼머(Permanent)와 농업(Agriculture)을 더한 퍼머컬쳐를 설명할 때 꼭 ‘뽀글이 펌’이 등장하는 이유입니다. “농사짓는 기술의 하나인 줄 알았어요” 또는 “농민들의 문화를 배우는 것 아닌가요?”라는 질문이 따라붙는 퍼머컬쳐는 1970년대 호주에서 시작되어 현재 전 세계 만여 개 퍼머컬쳐 공동체가 있다고 합니다. 퍼머컬쳐를 지속 가능한 문화와 삶, 또는 좋은 삶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농사짓는 방법은 자연농과 비슷하고 생태적 삶을 지향합니다. 알고 보면 농업이 산업화되기 전 우리네가 농사지으며 살던 삶의 형태입니다. ‘다랑이 논’은 대표적인 퍼머컬쳐 디자인입니다. 

저는 첨단의 디지털 시대를 살고 있는 젊은 층에게 부는 레트로 열풍과 아날로그를 향한 관심이 놀랍습니다. 우리 세대에게는 추억 속의 턴테이블이 10대, 20대들에게는 ‘신상’으로 인식됩니다. 저에게 퍼머컬쳐는 ‘오래된 것’으로 읽히지만 청년들에게는 새로운 삶의 기술, 신상인 셈이지요. 그래서인지 퍼머컬쳐를 배우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청년들입니다. 추억과 신상이 만나 ‘오래된 미래’가 도래하길 바랍니다.


둘. 녹색평론

지난 6월 25일 소중한 생태사상가를 잃었습니다. 돈과 성장을 최고의 목표로 삼던 1980년대부터 생태적 가치를 줄기차게 담아온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선생님이 흙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심플하다 못해 단순한 디자인의 ‘녹색평론’은 세계의 흐름과 현상을 생태적 관점으로 짚어내는 유수한 글들로 잔뜩 채워졌습니다. ‘녹색평론 읽는 독자모임’이 전국에서 자발적으로 이어졌고 5,000여 명의 생태사상에 심취한 독자를 키워냈습니다. “문제는 자본이야. 성장이야. 가난하고 멈춰야 함께 살 수 있어”라고 한평생 외쳤던 생태사상가 김종철 선생님의 목소리, 이제 남은 ‘녹색평론’ 독자들이 그 뒤를 이을 것입니다. 

책꽂이 한편을 채운 녹색평론은 생태운동가들에게는 교과서입니다. 지난해 ‘퍼머컬쳐 디자이너 양성교육’에서 만난 이가 김종철 선생님이 쓴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라는 책을 바이블처럼 조심조심, 가만히, 깊게, 들여다보며 읽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저도 후닥닥 책을 샀습니다. 그동안 말과 글로 남겨져 온 김종철 선생님의 생태사상을 담은 책입니다. 때론 어렵고 무겁지만 핵심을 찌르며 좌표가 되어준 녹색평론. 앞으로도 제 삶의 길잡이 역할을 하겠죠. 자본과 맞짱 떴던 선생의 생에 다시 한번 존경의 인사를 올립니다. 영면하소서 김종철 선생님. 


셋. 소태산 평전 

삼십 대 초반에 원불교를 만났습니다. 처처불상, 사사불공, 원망생활을 감사생활로 돌리자, 공익심 등의 단어와 문장에 끌려 발을 디뎠습니다.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표어는 가야 할 길을 알리는 나침반 같았습니다. 제가 이십여 년을 살았던 전남 영광은 ‘원불교’라는 종교의 발상지입니다. 영광에서 8년을 사는 동안 전혀 내 안에 들어오지 않던 역사를 만나 그 인연 또한 20여 년이 되었네요. 

소태산은 원불교를 창시한 교조의 호입니다. 물질이 과도하게 승해서 정신이 굴복될 것을 100년 전에 예견한 소태산은 매일매일의 수행으로 정신개벽을 이루도록 탄탄하게 법을 짜 놓았습니다. 2016년 김형수 작가에 의해 대중적으로 다시 태어난 ‘소태산 평전’은 큰 스승의 진면목을 알게 해 주었죠. 힘내야 할 때 다시 읽어봐야지 하며 책꽂이 깊이 꽂아 둔 ‘소태산 평전’은 존재만으로도 든든합니다. 책장 위에 놓인 사진 속 젊은 소태산은 “나는 너희들 성불하기만을 기도한다”며 인자한 미소를 날립니다. 소태산 스승의 음성을 듣습니다. "지금, 여기, 깨어있어라"


넷. 기타

한 5년 전에 구입한 기타가 먼지를 뒤집어쓰고 방 귀퉁이에 비스듬히 서 있습니다. 버킷리스트 중 하나가 ‘악기 연주’인데 눈처럼 게으른 것이 없다고 눈으로 매일 쳐다만 볼 뿐입니다. 5년 전 기가 막힌 실력의 기타선생님을 만나 ‘소질 있다’는 꾐에 제 수준에서는 꽤나 값나가는 기타를 질렀었지요. 선생님 성화에 몇 달 뚱땅거려 보았지만, 연습시간이 들쭉날쭉이라 손끝 굳은살이 ‘박혔다 풀렸다’를 반복합니다. 3년 전 선생님이 지방으로 이사를 가면서 가방 속으로 들어간 기타는 세상 밖으로 나올 줄 몰랐죠.

작년 상반기 심기일전, 이번에는 마스터 해보리라 마음먹은 것도 한두 달, 기타는 다시 가방으로 들어갔고 코로나19가 터지면서 기타선생님도, 기타 반도 긴 휴식에 들어갔습니다. 대학교 때 힙합동아리 활동을 했던 큰아들이 대학 친구들과 밴드 활동을 한다며 얼마 전 건반을 집에 들이면서 제 게으른 눈은 기타에서 건반으로 옮아갑니다. 아마도 변심 중 인지 모릅니다. 기타든 건반이든 환갑 전에는 한 곡조 연주해 봐야겠어요. 


다섯. 불어대는 맞바람

참다 참다 올해 창문형 에어컨을 샀습니다. 갱년기를 겪으며 올랐다 내렸다 하는 열이 열대야를 감당하기 어렵더라고요. 일 년 내내 에어컨 살까 말까를 고민하는 저를 보며 결단을 내렸습니다. 꼭 필요한 날이 며칠 되지 않으니 그 며칠을 견디면 되는데, 폭주하는 기후위기 속에 아이러니하게 저도 에어컨 행렬에 동참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앞뒤 베란다에서 불어대는 맞바람 덕에 밖은 찜통더위여도 집에만 들어서면 바람결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그런지 제가 사는 아파트가 대단지인데 에어컨 실외기가 설치된 집이 10%도 안되더라고요. 에어컨은 설치한 것만으로도 일단 심리적 안정은 얻었습니다. 최대한 맞바람과 선풍기로 견뎌 보려고요. 불어오는 바람에 민감해지고 기후를 더 살피게 됩니다. 자연처럼 좋은 에어컨이 있을라구요. 

 


여섯. 삼발이

전자레인지를 집에 들여놓은 적이 없습니다. 왠지 전자파 때문에 싫었던 데다, 어쩌다 사용해본 전자레인지는 음식을 말려버려 두 번은 데워 먹을 수 없더라고요. 전자레인지에 물도 끓이고, 커피까지 끓여내는 마니아도 봤지만 저는 선뜻 손이 가지 않습니다. 

저의 전자레인지 대용품은 스텐 삼발이입니다. 구멍 뽕뽕 뚫린 날개를 쫙 펴면 큰 볼이 되고 그 위에 찬밥이나 떡 등을 올려 가스불에 끓이면 새 밥, 새 떡으로 재탄생되지요. 날개를 접으면 한주먹 만해져서 보관하기도 좋습니다. 환경교육할 때 ‘삼발이 예찬’을 늘어놓지만 냉장고, 세탁기처럼 필수 전자제품이 된 전자레인지를 이겨먹기 쉽지 않네요. 석탄과 우라늄 등 지구 생명을 위협하는 화석연료가 만들어 낸 전기를 조금이라도 줄여보자며 사용하기 시작한 비전력 주방용품 중 삼발이가 으뜸입니다. 2,000원의 행복이랄까요?


일곱. 녹두꽃으로 피어나라

제 방에는 신영복 선생님의 글 ‘녹두꽃으로 피어나라’가 담긴 액자가 있습니다. 책꽂이에는 책 ‘녹두꽃으로 피어나라’가 꽂혀있지요. 농민의 벗, 고 지용진 1주기 추모식 때 만든 책입니다. 추모집을 내면서 신영복 선생님께 받은 글씨가 책 제목이 되었습니다. 

전남 영광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중학교는 검정고시로 패스하고 영광종합고등학교 농과에서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으며 1983년 서울대에 입학한 그는 1990년 농민이 되어 고향 영광 땅으로 내려옵니다. 농민운동 동지였던 아내와 갓 결혼한 그의 신혼집은 농민회와 여성농민회 형님들의 아지트가 되었지요. 영광농민회 초대 사무국장을 맡은 그는 무던히도 논과 밭, 아스팔트 농사를 지으러 뛰어다녔습니다. 면 농민회 총무도 하고, 전농 전남도연맹 정책실장을 맡아 전국을 돌며 쌀값 투쟁, 농산물 제값 받기, 수입농산물 반대운동 등 농민운동에 삶을 던졌습니다. 빈농의 자식이 다시 빈농이 되어 농사짓는 사람이 주인 되는 농촌을 만들어보고 싶었던가 봅니다. 그러는 사이 아이 둘이 태어나고 큰아들이 8살, 작은아들이 3살 되던 해, 마을 형님들과 마실 갔다 돌아오는 길에 그만 교통사고가 납니다. 집에서 100미터도 안 되는 도로에서 논으로 추락한 봉고차에 탄 서너 명은 가벼운 타박상만 입었는데, 지용진 그는 결국 세상을 떠납니다. 그의 나이 34세, 많은 이들의 통곡 속에 농민장을 치렀습니다. 황망함이 무엇인지, 막막함이 무엇인지 그때 다 느껴버렸지요. 

1년이 지나 그의 묘 앞에 다시 모인 지인들은 그를 추모하는 책을 만들었습니다. 

가장 친한 친구였던 동우 씨는 “이 책은 내 친구 용진이를 위한 책이 아니다. 그의 아이들이 성장했을 때 우리 아빠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게 하고 싶었고, 남은 가족에게 그저 위로가 되면 족하다.”라고 했습니다. 제 남편 지용진의 짧았던 생을 담은 책 ‘녹두꽃으로 피어나라’는 있는 듯 없는 듯 책꽂이 한편에 그렇게 자리하고 있네요. 신영복 선생님의 글은 차마 걸지 못하고 서랍장 위에 세워 두었습니다. 이제 멋진 액자에 담아 보기 좋은 곳에 걸어두어야겠습니다. 모두의 바람대로 녹두꽃으로 한창 피어났기를 바랍니다.



6. 일상에서 행복한 순간은 언제인가요?

우리동네 숲길 예찬

박태기꽃, 죽단화, 벚꽃과 목련 가득한 봄 숲길 따라 걷다 보면 탄현역을 거쳐 일산역까지 넘치는 걸음을 걷곤 합니다. 여름철이 되면 옥잠화, 원추리, 라벤더 꽃들이 피어난 길에서 걷기를 중단하고 ‘너 이름이 뭐니?’ 묻고 있는 저를 발견합니다. 제가 꽃알못 (꽃을 알지 못함)이거든요. 덕분에 산책시간이 지체되곤 하지만 ‘모야모’ 어플에서 꽃 이름과 꽃말을 찾아낸 기쁨이 생각보다 큽니다. “아, 그래 너는 수수꽃다리 구나!” 알아차림과 깨달음의 경지에 다가가 봅니다. 

전철역 소음을 줄이기 위해 아파트 단지와 철로 사이에 들어선 이 길에 10년 세월을 담으니 명품 숲길이 되었네요. 한여름을 지나는 요즘 나뭇잎 터널 사이로 살짝 드러난 하늘을 올려다보면, “아, 좋다"는 소리가 절로 나옵니다. 코로나19로 갈길 잃은 사람들이 아이들과 반려견들을 데리고 산책도 하고 이어폰을 낀 젊은이들이 숲길을 조깅하기도 합니다. 피부와 오감을 열어 산소를 들이키며 숲길을 걷는 일은 근사한 일상이 되었습니다. 가을에는 멋진 단풍으로, 겨울엔 고즈넉한 외로움으로 계절마다 위로가 되는 우리동네 숲길이 일상의 즐거움으로 자리하고 있네요. 



7. 삶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나 원칙이 있나요? 그것을 얻게 된 계기가 있나요?

“공익심”

1990년대 끄트머리에 원불교라는 종교를 만났는데요. 매일 수행하는 9가지 약속 ‘일상수행의 요법’ 중 마지막 ‘공익심 없는 사람을 공익심 있는 사람으로 돌리자’라는 문장에 눈이 딱 멈추었습니다. 모든 종교가 함께 사는 공익적 삶을 가르치고 있지만 매일매일 ‘공익적 마음’을 되살피고 나뿐만이 아닌 다른 사람 공익심까지 챙기라는 아홉 번째 약속이 참 신선했습니다. 사회운동가로 그저 살아는 왔는데 나에게 ‘공익심은 무엇일까?’ 물음이 일더군요.

농민이라는 계급의 입장에서, 여성이라는 페미니즘의 입장에서, 빈곤에 선 사람들과 소수자의 입장에서 ‘공익’이 다수의 이익으로 ‘작고 가려진 소외’는 없는지 더 살피게 됩니다. 인간관계에서도 잇속 뻔한 사람들은 멀리하게 되더라고요. 이제는 저에게 공익심은 인간만이 아닌 자연과 모든 생명의 공존을 지향합니다. 탯줄 너머까지 인간 중심, 자아 가득이라 아직도 보는 눈은 낮지만 지향은 지구적 이려고요. ‘생태적 공익심’이 저의 눈을 더 넓게 틔워주고 있습니다. 



8. 인생을 살며 큰 변화가 있었던 일이 있었다면, 어떤 것이고 그로 인해 무엇이 바뀌었나요?

페미니즘에 빠지다. 

25살에 결혼을 하고 영광에서 아이들 낳고 농사지으며 농민회 활동을 열심히 했습니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결혼 7년 차 때 교통사고로 남편과 사별을 하고 말았지요. 아이들은 어렸지만 농촌지역을 떠날 엄두가 나지 않아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농촌형 여성단체를 준비하던 원불교 교무님을 만났습니다. 철학자이며 에코페미니스트였던 하상의 교무님과 마을 여성들이 모여 여성학을 공부했습니다. 

한국여성의전화연합에 영광지부를 만들겠다고 신청하고, 2000년 2월 29일 군 단위에서는 두 번째로 여성단체를 만들었습니다. 올해가 영광여성의전화 20주년 되는 해입니다. 가부장 문화가 강력한 농촌에서 만난 페미니즘은 모든 것을 ‘뒤집어’ 보게 했습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 if’의 모토가 ‘웃자, 놀자, 뒤집자’였는데 제가 만난 페미니즘을 잘 표현한 카피입니다. 무겁고 거칠었던 세상을 향한 문제제기를 재기 발랄하게 뒤집어 버리는 페미니즘과 매력적인 페미니스들과의 만남은 저의 또 다른 자아를 건드려주었죠. 그 힘으로 배우자와의 사별을 이겨내며 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후 농촌마을에서 지역아동센터를 운영하고 8년 전 서울로 올라와 환경운동을 하면서 그때 몸으로 배웠던 페미니즘은 생태감수성을 키우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흐르고 흘러 에코와 페미니즘이 만나 에코페미니즘이 제 삶의 근간이 되었네요. 페미니즘과의 만남, 짜릿했어요.  



9. 언젠가 이루고 싶은 모험, 꿈이 있나요? 그것을 위해 현재 준비하고 있는 게 있나요?

자족 자립이요. 

요즘 집 구하는 TV 프로그램이 인기입니다. 4~5억 원대 전원주택 규모에 입이 떡 벌어지곤 합니다. 천성이 게으른 저는 집이 크면 청소와 관리가 힘들다는 것이 지론입니다. 시골살이 경험으로 큰집과 큰 텃밭의 운명을 알기에 작은 집에 더 작은 텃밭 일구며 자족하고 자립하고 싶습니다.

바닥은 돌나물과 타임 등 멀칭 식물들로 깔아주고 취나물, 방풍나물, 부추 등 나물류와 당귀 같은 약재를 심습니다. 당근이나 감자, 고구마, 옥수수 등 구황작물로 식량도 비축합니다. 베리류와 앵두나무 등 관목류를 심고 매실, 사과, 배, 복숭아, 감, 밤 호두나무를 둘러 풍성한 과일로 식탁을 꾸밀 거예요. 마삭줄과 금은화, 포도나무로 덩굴을 올리면 향기와 과일까지 덤으로 얻게 되지요. 고추, 토마토, 상추, 가지 같은 봄여름 작물을 거둬내고 겨울작물로 면역력 짱 ‘마늘’과 요리 감초 ‘양파’를 왕창 심을 거예요. 마지막으로 풀을 막고 흙을 보호할 멀칭재로 사용할 호밀과 보리를 심어 내년을 기약합니다. 

인간의 노동력은 최소화하면서 자급하고 자족할 수 있는 작은 텃밭과 아기자기한 작은 집에서 매일을 소풍처럼 살고 싶어요. 가끔 길을 나서 ‘웃고, 놀며, 뒤집는’ 삶을 살고 있는 여성들을 인터뷰하고 소소한 삽화를 그려 넣어 책으로 한두권 엮는다면 금상첨화겠지요. 퍼머컬쳐 동지들과 수락산 자락에서 공동체 농사를 짓고, 여농기행을 떠나며 워밍업을 하고 있습니다. 더 simple, 더 small life. 



10. 삶에 흔들리는 순간들에서 당신을 지켜주는 게 있다면 무엇인가요?

1호와 2호

성인 남자 1호, 2호와 오랜만에 복닥거리며 살고 있습니다. 하숙생처럼 밤낮없이 살다가 작년부터 집에서 일하는 시간이 많아지고 코로나19로 집에서 끼니를 해결하게 되면서 세 식구가 밀착 생활을 하게 되었네요. 게임 번역을 하는 프리랜서 번역가인 1호가 혼자 차지하던 집에, 일하던 매장이 임시휴업으로 2달여 문을 닫는 바람에 재택근무하게 된 2호까지 함께하며 이렇게 오랜 시간 일상을 마주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어렸을 때 너무 바삐 살았던 엄마와의 시간을 이렇게 보충해주나 싶습니다. 다 큰 놈들 뒤치다꺼리에 힘들겠다고도 하지만, 실상은 제가 받는 보살핌이 더 큰 것 같습니다. 이렇게 서로에게 버팀목이 될 테지요.  


여자들

여성 운동하면서 만난 페미니스트 친구들과 우정을 나눕니다. 삶을 드러내고 신세 한탄하다, 분노하다, 다 놓고 춤추고 노래하며 한판 웃어제낄 수 있는 ‘쉼’ 같은 여자들입니다. 한국사회에서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가 얼마나 각박한지 절실한 이즈음, 마지막 보루 같은 친구들입니다.


엄마와 엄니는 기록하고 싶은 여자들입니다. 친정엄마는 10남매 맏며느리의 삶이었고, 시엄니는 지독한 가난과 큰아들을 가슴에 묻은 삶이었습니다. 저는 엄마와 엄니 둘 다 친하고, 엄마와 엄니는 서로를 걱정합니다. 생각만으로도 가슴 먹먹해지는 두 여자가 떡하니 제 뒤를 버텨주셨네요. 


법문

매일 아침 6시면 법문 말씀이 ‘카톡’하며 배달됩니다. 하루를 여는 소리지요. 성자들이 죽을힘을 다해 깨달은 바를 쉽고 빠르게 접하면서 어느 날은 울림이 되고 어느 날은 금방 까먹기도 합니다. 가장 오래 장수하는 직업군 중 성직자가 1등이라고 합니다. 깨닫거나 극한 감동을 받을 때 나오는 호르몬 다이돌핀은 엔도르핀의 4,000배 효과라고 하네요. 그래서 그런지 깨달은 사람들이나 철학자, 사상가, 카피라이터가 뽑아내는 한 줄 글에 기분 좋게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을 받습니다. 말씀 하나에 흔들림을 멈추고 마음을 챙겨내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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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인터뷰이(no.6)를 소개해주세요.  

평택에서 재미있게 살고 있는 박선아 님께 바톤을 넘깁니다. 

 

* 이태옥 님에 이은 세번째 인터뷰로는, 첫번째 인터뷰이인 권미영 님께서 지목하신 두 분(이태옥, 최현정) 중 최현정 님의 이야기가 업데이트됩니다. 


인터뷰에 응해주신 이태옥 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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