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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은초 Jul 31. 2020

지금 이 시간 행복을 연습 중입니다, 박선아

내 이름을 불러줘 no.6

<내 이름을 불러줘>는 31개 시군에 거주하고 있는 경기 시민들을 릴레이 인터뷰 형식으로 소개하는 커뮤니티 아트 프로젝트입니다. 프로젝트 기획자는 최초의 인터뷰이만 섭외하며, 이후로는 인터뷰이가 자신의 지인 중 다음 차례의 인터뷰이를 추천하는 방식입니다. 첫 번째 인터뷰이는 다섯 번째 인터뷰이를 전혀 알지 못하지만, 어쩌면 여섯 번째 인터뷰이 혹은 열 번째 인터뷰이와는 어떤 접촉점이 있을 수도 있지요. 이런 방식으로 인터뷰이는 지인의 지인 형식으로 모두 연결되고, 우리가 사는 사회의 축소판을 구현해내게 됩니다. 본 프로젝트의 무대는 경기도이지만, 우리 사회를 이루는 이러한 방식은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일 겁니다. 우리는 실상, 모두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각각의 인터뷰이는 그들 삶을 이루는 행복, 가치, 꿈, 흔들리던 순간 등을 묻는 10가지 질문에 답하며 자신의 경험과 삶을 나누고,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은 다른 누군가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또 다른 모양의 길과 삶을 들여다봅니다. 이것은 나의 이야기, 당신의 이야기, 그리고 익명으로 존재했던 이웃들의 고유한 삶을 품고 있는 도시의 다양한 얼굴입니다.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이웃들의 이야기가 나를 돌아보게 하고, 다른 이의 걸어간 길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엿보며, 불확실한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희망을 만들어갈 힌트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이름과 사는 곳은?

평택시 안중읍에 사는 45살 박선아입니다.



2. 당신이 사는 도시에서 당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요?

경기도 평택과 충청도 아산의 경계에 살고 있어요. 서울에서 18년쯤 살다가 안중읍으로 온지는 5년 정도 됩니다. 기아, 현대, 만도 등 대기업 공단과 평택항만이 있어 해외 물류 거점이자 서해대교를 지나는 교통의 중심지이기도 합니다. 안중은 시골과 공장지대가 조화를 이루고 사는 지역인데요. 처음엔 영화관, 쇼핑몰 같은 문화적 인프라가 없어 답답했지만, 이제 한가하고 여유로운 이곳 생활에 적응하고 있습니다. 

올해 코로나 19 때문에 헬스장에 갈 수 없어 하루 만보 걷기를 시작했는데, 차로만 지나치던 평택호가 저에게는 명소이자 휴식처가 되었습니다. 평택호를 따라 걷다 보면 국악 악기의 조형물들과 산책로를 따라 빛 터널을 조성해서 밤에 걸으면 물빛과 함께 빛나서 예쁘더라고요. 사람들이 다시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3. 어떤 일을 해오셨고, 지금 몰입하고 있는 일은 무엇인가요?

평택으로 내려오기 전까지는 잡지사에서 행정업무를 8년 가까이 했어요. 남편 일로 평택에 오게 되면서 회사일을 자연스럽게 그만두게 되었지요. 결혼하고 처음 가져보는 공백기이자 휴식이었어요. 바쁘다고 못했던 바느질도 하고, 자수도 놓고, 아이들 오는 시간에 맞춰 간식도 만들어 놓고, 조금씩 살이 올라 운동도 시작했어요. 그 시간이 제 인생의 여름방학같이 좋았어요. 그리고 1년쯤 되니까 슬슬 조급해지더라구요. 뭔가를 다시 해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할 때, 남편이 25년 전 땄던 장롱면허를 이제는 봉인해제시켜야 하지 않냐고 하더군요. 이곳은 교통이 불편해서 운전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낄 쯤이었거든요. 두어 달 운전연습을 하고 드디어 첫 차가 생겼어요. 첫 차를 몰고 평택호로 갔어요. 그냥 멍하니 혼자 앉아있는데 좀 더 일찍 운전을 해볼걸 후회가 되더라고요. 이제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 갈 수 있는 게 좋아요. 


이곳에 와서 좋은 분들을 만났는데 ‘밥보다 국시’ 사장님이 가게 앞에 작은 카페를 해보지 않겠냐고 권유하셨어요. 제가 그런 걸 어떻게 하냐고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는데 남편은 경험 삼아 재미로 해보라는 거예요. 돈 번다 생각하지 말고 경험 쌓으며 자신감을 찾아보라고 응원해줘서, 정말 생각지도 않게 노상 카페를 시작했어요. 국도 한쪽에 1.5평짜리 가건물에서 저의 제2의 인생 서막이 시작됐지요. 처음엔 손님이 주문한 커피가 헷갈려 몇 번이나 다시 물어보거나 거스름돈을 드렸는지도 기억이 안 나 허둥대고, 매일매일이 도전 같은 긴장의 나날이었어요. 괜히 시작했나 자신감도 떨어지고 그랬는데 결국 시간이 해결해주더라고요. 차차 커피를 내리는 일도 익숙해지고 얼굴이 익는 단골손님도 늘더라요. 


하지만 바쁜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면서 손님은 뜸해지고 드문드문 오는 손님들을 기다리는 일은 결코 쉽지 않더라고요. 처음엔 내 능력이 부족한지 자책도 해봤지만 하루하루 마인드 컨트롤을 해야 했어요. 손님이 없는 시간을 어떻게 채워가야 할지가 숙제가 되었죠. 그때부터 주변 환경을 바꾸기 시작했어요. 오래 방치된 묵은 짐들을 치우고 흙을 퍼다 메꾸고 화단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주위에 있는 돌을 주워 그림을 그리고, 버려진 물건에도 그림의 생명을 불어넣어 주었어요. 그림은 학교 다닐 때 그려봤던 게 다여서 눈코입 정도만 그려도 재밌더라고요. 검색으로 그림을 찾아보고 똑같이 따라 그리다 보니 조금씩 색이 보태지고 그럴싸한 결과물도 나오더라고요. 그리고 주체하지 못했던 남은 시간들이 금방 채워지더라고요. 매일 하나씩 그렇게 채워갔어요. 그러고 나니 카페에 손님이 없다고 기죽을게 아니라 이곳이 또 하나의 공방이고 놀 궁리를 하는 비밀 장소라는 의미 부여를 하게 되더라고요. 그렇게 1년은 만들고 채우면서 보냈던 것 같아요. 



봄이 오고 다시 손님들이 찾아왔을 때, 일 년 사이 무슨 일이 있었냐며 즐겁게 봐주시고 칭찬해주시더라고요. 그간 카페의 이름은 짓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쓸모>에 대한 화두가 생기더라고요. 돌에 그리는 그림 말고 버려진 것들에 그림을 그려보면 어떨까 싶어서 부러진 삽자루나 깨진 접시에 그림을 그렸어요. 손님들은 그게 신선했나 봐요. 오실 때마다 아들이 제대하고 쓸모없어진 군화를 가져오시기도 하고, 커다란 웍을 가져와 그림을 그려보라고 하시더라고요. 저의 한계를 알고 싶으신 건지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건 아닌지 살짝 부담감이 생겼어요. 그렇게 물건을 가져오면 며칠 뚫어지게 쳐다봐요. 그림을 그리기 전 일종의 교감이랄까. 군화에는 화초를 심고, 웍에는 그림을 그려 걸어두었더니 가져오신 손님들이 뿌듯해하시더라고요. 그렇게 손님들하고 그림에 대한 이야기나 제가 생각하는 쓸모에 대해 이야기하다 통하는 게 생길 땐 너무 신나요. 가게 창고에 몇 년 동안 쓰고 남은 연탄재에도 그림을 그렸어요. 중년의 손님들은 유년의 추억을 이야기하시고, 어린 꼬마 아이들에게는 생전 처음 보는 연탄을 설명해주는 풍경이 생겼어요. 


사실 노점 카페를 시작한 건 우연이었고, 돌그림이나 버려지는 것들의 쓸모를 생각했던 것도 어찌 보면 무료함이 준 또 다른 결과물이에요. 그 무료한 시간을 흘려보냈다면 그냥 시간만 쌓였을 것 같아요. 제가 원래는 생각이 많고 어떤 일을 할 때 주저하는 게 많아요. 그런데 카페를 하면서, 해보고 아님 말지 이렇게 바뀌더라고요. 결과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그 시간 동안 내가 무슨 일이든 하다 보면, 그게 흔적으로 남더라고요. 2년 반이 지난 지금, 처음부터 지켜 보신 손님들이 용 됐다는 말을 해요. 칭찬이 담긴 또 다른 농담이지만 저는 그 말들이 고맙고 좋더라고요. 



그리고 작년부터 지인의 권유로 텀블러 100개를 기증받아 손님들에게 텀블러 사용을 적극적으로 권하고 있어요. 테이크아웃 매장이다 보니 일회용 컵과 빨대 사용이 많은 것이 늘 마음에 걸렸거든요. 텀블러 하나로 100번의 사용이 가능하대요. 손님들에게 텀블러에 커피를 제공하고, 재방문 시에 지난 텀블러를 회수하고 새로운 텀블러에 커피를 제공하는 순환 작업이죠. 플라스틱이 바다 해양환경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이야기로 한 분 한 분 설명해드리는데, 반은 귀찮다 하시고 단골분들은 귀찮더라도 들어주시고 동참해주세요. 매일 10잔씩 한 달이면 300잔의 사용을 목표로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설명하랴 주문받으랴 정신없었지만 작게나마 행동하는 사람이 되는 뿌듯함도 생기더라고요.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잠시 멈추었지만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다시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4. 무엇이 당신의 생각과 행동에 영감/영향력을 주나요? 혹은 그런 사람이 있나요?

저는 사람을 관찰하는 걸 좋아해요. 카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 대화, 말투 이런 걸 보면서 아주 단편적이지만 그 사람들이 살아온 시간을 상상해보죠. 카페를 시작하면서 하루에도 수없이 오가는 손님들의 말투, 표정을 보면서 많이 배워요. 실제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멋진 분들도 많고, 상식 이하의 손님들을 보면 나는 손님으로 가서 그러지 말아야겠다 역지사지의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배려있고 매너 좋은 손님들을 보며 많이 배우게 돼요. 말의 힘이란 게 위로도 되고 칼이 되어 비수를 꽂을 수 있구나 싶어, 말을 예쁘게 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5. <나의 컬렉션> 당신이 아끼는 7가지 아이템으로 당신의 취향을 소개해주세요.

책 : 어린 왕자,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빨간 머리 앤, 키다리 아저씨, 작은아씨들, 그리고 시집 

주로 어릴 때 읽었던 책들이 기억에도 오래 남고, 지금 다시 읽어도 그 감동이 변하지 않는 것 같아요. 아직도 그 감동이 남아있는 책들이에요. 시집은 수집가처럼 서점에 들를 때마다 사게 되는 것 같아요. 요즘은 시를 읽지 않잖아요. 세상의 아름다운 언어는 시에 다 함축되어있는데 사람들이 더 이상 시를 찾지 않는 게 안타까워요. 그래서 저라도 시집을 사고 읽어보자는 오지랖을 부려요.


영화

최근에 영화는 잘 못 봤는데, 작년에 봤던 리틀 포레스트 영화가 좋았어요. 일본 영화 리메이크작인데,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다뤄요. 영상이 너무 예뻐서 한 권의 에세이를 본 느낌이었어요.


음악 : 정태춘, 김범수. 자우림, 바비킴, 리쌍, 임창정 

주로 귀에 익숙했던 노래들을 좋아하고, 가사가 좋은 곡들을 찾아들어요. 오디션 프로그램 영향인지, 요즘은 트로트도 좋더라고요.


연극

8년 전쯤 대학로에서 빨래라는 연극을 봤는데. 그때가 아이들 키우면서 개인적인 시간을 가져본 적 없던 시기였을 거예요. 연극을 보는 내내 울었던 것 같아요. 그 시간 아이들과 떨어져 처음 가진 시간이기도 했고 연극 내용이 제 이야기 같았거든요.



6. 일상에서 행복한 순간은 언제인가요?

아침에 가게 문을 열면 텁텁한 공기로 가득하거든요. 창문을 열고 새로운 공기가 유입되면 이제 시작이구나, 하는 신호 같아요. 물이 끓는 소리, 그리고 첫 에스프레소를 내릴 때 맛과 향이 좋으면 그 날은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아요. 직장 다닐 때 늘 사 먹던 커피를 손님들에게 대접할 준비가 된 일종의 비장함 같은 거죠. 좋아하는 커피를 마시고 업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게 행복해요. 직장 다닐 때는 아침에 눈뜨고 출근하는 발걸음이 늘 무거웠는데 가게를 하면서 달라진 점이죠.

 


7. 삶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나 원칙이 있나요? 그것을 얻게 된 계기가 있나요?

서울에서 살 때는 늘 각박했어요. 집도 없고, 늘 살아도 나아지지 않는 살림살이가 뿌리 없이 둥둥 떠다니는 부유물 같았어요. 비약이겠지만 서울에서 산 20년 동안 2년마다 이사 다니는 일이 엄청 스트레스였죠. 40대에 평택으로 오면서 모든 게 여유로워졌어요. 시간도, 집에 대한 집착도 사라졌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먼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 삶의 원동력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늘 급급했어요. 이제는 내일보다 오늘 행복해지려고 해요. 지금 이 순간 행복하지 않으면서 미래의 행복이 찾아오면, 그게 행복인지도 모르고 지나칠 것 같거든요. 행복도 연습이 필요하지 않나 싶어요.      


8. 인생을 살며 큰 변화가 있었던 일이 있었다면, 어떤 것이고 그로 인해 무엇이 바뀌었나요?

저의 큰 변화는 평택으로 이사 온 거예요. 단순히 공간의 이동이 아닌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일상을 시작하게 된 거죠. 가게를 하면서 매일 웃는 연습을 하고,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이런 말을 손님들한테 하면서 이게 참 좋은 직업이구나 싶어요. 마흔이 인생의 전환점 같다는 생각을 해요. 이 나이에 나만큼 타인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좋은 하루가 되라고 말할 수 있는 동년배가 있을까 싶으면 이 일이 귀하고 소중해요.



9. 언젠가 이루고 싶은 모험, 꿈이 있나요? 그것을 위해 현재 준비하고 있는 게 있나요?

4개월 정도 하루 만보 걷기를 하고 있어요. 틈 나는 대로 걷고 있는데,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지역을 정해놓고 골목골목 걸어보고 싶어요. 걷다 보면 차를 타고 다니면서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더라고요. 계절이 변하는 것도 꽃이 피고 지는 것도 좀 더 자세히 보이더라고요. 명소보다 사람들이 사는 골목길을 순례하고 싶어요. 



10. 삶의 흔들리는 순간들에서 당신을 지켜주는 게 있다면 무엇인가요?

삶이 흔들리는 순간마다 아이들이 저에게는 기적처럼 힘을 줬어요.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얼마나 든든한지 평소에는 모르다가 어떤 어려움이 처해졌을 때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힘을 주는 게 가족이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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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인터뷰이(no.8)를 소개해주세요.  

평택시 현덕면에서 밥보다국시집을 하고 계시는 윤향숙님이요. 국수에 대한 남다른 자부심이 있으시고, 18년째 국수 장사를 하고 계세요. 멀리에서 찾아오시는 분들, 오래된 손님들도 많고요. 윤향숙님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인터뷰에 응해주신 박선아 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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