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이었던 것 같다. 마이클 샌델 교수의 '공정하다는 착각'이라는 책을 읽고 그의 의견에 많이 공감했다. The tyrany of merit (직역: 능력주의 폭정) 이 원제인 이 책의 주요 내용은, 성공한 사람은 자신의 능력으로 성공했다고 믿기에 쉽게 교만해지고, 실패자들은 자신의 노력 부족으로 실패했다고 생각하기에 수치심을 느낀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성공한 사람도 순수히 자신의 능력만으로 성공한 경우는 없으며, 그렇기에 성공한 사람이 교만하거나, 실패한 사람이 수치스러워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오히려 이런 분위기가 더 양극화된 위험한 사회를 만든다. 책을 막 출간 했을 당시 마이클 샌델 교수가 한 한국의 언론과 인터뷰를 했던 내용도 기억난다. 인터뷰 중 대학 합격자들을 선발할 때 제비 뽑기로 하자는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제안이 있었는데, 나는 농담을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의 책에서 아주 진지하게 그렇게 해야 할 이유들을 조목조목 설명했고 나에게는 상당히 설득력 있게 들렸다.
한 15년 전쯤이었다. 캐나다 몬트리올에 출장을 갔다.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호텔로 이동하는 중, 택시 기사와 가벼운 대화를 나누었다.
"Where are you from?"
"Korea"
"South, north?"
한국에서 왔다는데, 북한인지 남한인지 묻는다. 다소 어이없게 느껴졌는데, 그 당시 상황으로 서양 사람들에게는 있을 법한 질문이었다. 우리와 같은 아시아인을 보면 Japanese? Chinese? 를 먼저 묻고 다음엔 Where are you from?이라는 질문을 했다는 경험담이 많이 돌던 시절, 한국은 극동 지방에 있는 어떤 나라일 뿐이었다. 캐나다 사람이라면 알법하다고 생각해 김연아를 아냐고 물어봤다. 하지만 그 택시기사는 김연아가 누구인지 몰랐다.
그랬었던 한국의 상황이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처음 홍콩에 왔던 2021년은 코로나가 한창이었고, 오징어 게임이 전 세계를 놀라게 한 해였다. 회사에서 멀지 않은 한 식당 골목에는 3층 높이의 벽 전체에 오징어 게임 벽화가 그려져 있었고, 핼러윈 때 가장 인기 있는 복장이 오징어 게임 복장이었다. 이곳 홍콩 지사장님의 아내는 한국 드라마 팬이고, 한 사업부장은 블랙핑크의 팬이다. 홍콩의 중심에 있는 센트럴 역 환승통로 전체를 블랙핑크가 도배를 하기도 했었고, 사무실이 있는 백화점에 뉴진스 팝업 스토어가 열렸는데 오픈런으로 매일 아침 긴 줄이 서곤 했다. 홍콩 동료들과 파묘를 극장에서 함께 보기도 했고, 한 홍콩 동료는 슈퍼주니어 콘서트에 가서 찍은 사진들을 한 껏 자랑하기도 했다. 홍콩에 살며, 한국 대중문화의 힘을 몸소 체험하며 살고 있다. 문화뿐 아니라 한국 식당, 한국 제품을 어디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요즘처럼 한국이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때가 과연 역사에 있었을까?
최근 들었던 세바시(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 강의 중, 홍콩 과학기술대학교 김현철 교수님의 강의(1848회)가 참 기억에 남는다. 사람이 살면서 이루는 성취의 50%는 어느 나라에 태어나느냐에 따라 결정되고, 30%는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즉, 어떤 사람이 이룬 성취의 최소 80%는 이미 주어진 것이다. 그것을 위해 그 사람이 한 노력은 없다. 나머지 20%도 순전히 자기의 노력의 결과일 수는 없다고 한다.
어차피 한국인으로 태어날 것이었다면, 고려시대나 조선시대 또는 일제강점기, 6.25 때보다는 전쟁 후 태어난 것이 큰 행운임은 분명하다. 영국인이나 미국인으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아프리카나 동남아의 가난한 나라보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더욱이 다소 가난했지만, 아이들을 끝까지 책임지고 지원해 주신 부모님을 만난 것도 큰 행운이었다. 이를 위해서 내가 한 노력은 하나도 없고, 할 수 없었다. 모두가 순전히 운이다.
마이클 샌델교수는 제비 뽑기로 대학 최종 합격자를 선발하는 것을 제안했다. 어느 정도 스크리닝을 거친 최종 후보자들의 능력 차이는 실제로 크지 않다. 여기에서 제비 뽑기로 선발했을 경우, 합격한 학생도 운으로 합격한 것이기에 교만할 이유가 없어지고, 떨어진 학생들도 순전히 운이 나빴을 뿐이므로 수치스러워할 이유가 없게 된다. 현실적으로 이런 제안이 받아들여질 일은 없다고 생각 하지만, 이 제안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김현철 교수는 자신의 노력으로 성공했다고 믿는 사람일수록 세금 저항이 강하고, 사회적 약자들을 노력이 부족한 실패자로 보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성취의 80% 이상이 주어진 것이라고 봤을 때, 성공한 사람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선택이 아니고 의무가 된다.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배려와 돌봄이 더 필요하고 또 이러한 노력으로 우리는 더 안전하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상당히 반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
2023년 7월 29일 KBS에서 방송된 페루 리마의 수치의 벽에 대한 뉴스가 그렇다. 그곳에는 부촌과 빈민촌을 가르는 높이 3m, 길이 10km의 장벽이 있다. 빈민촌의 노동자들이 수치의 벽을 돌아 부촌으로 일을 하러 가기 위해서 일당의 4분의 3을 교통비로 써야 한다. 그곳 주민들을 이 장벽의 이름을 수치의 벽이라고 했다. (이후 이 벽을 허물기로 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마치 SF 영화에서 본 디스토피아적 미래의 장면들과 비슷하다. 돔으로 보호된 깨끗하고 부유한 도시와 그 외부에 사는 빈민들. 영화가 현실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사회 곳곳에는 보이지 않는 수치의 벽이 존재하는 것 같다.
요즘 회사가 뒤숭숭하다. 조만간 큰 조직 변화가 올 것 같다. 어떤 일이 언제 어떻게 일어날지 알 수 없다. 더욱이 요즘 홍콩의 경기는 좋지 않다. 집값은 떨어지는데, 집세는 올라가고 고용은 어렵고 구직도 어렵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다. 마땅한 대책이 없다. 어떻게 더 모을까, 어떻게 아이들 교육에 더 투자하고, 어떻게 노후를 대비할까를 생각하며 통장 잔고를 보면, 역시 계산이 안 선다.
시선을 돌려보자.
나에겐 참 행운이 많았다. 군복무를 마치고 해외경험을 쌓고자 생각 없이 떠났던 어학연수가 나의 삶을 바꾸는 전환점이 되었다. 당시는 부모님의 경제사정이 많이 좋아졌을 때여서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두 번째 회사에서 인재개발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3개월간 중국 파견을 갔던 것도 큰 행운이었다. 원하는 일을 하고자 보다 작은 규모의 회사로 옮긴 것이 지금의 아내를 만나고 새 경력의 기초를 닦는 신의 한 수가 되었다. COVID 기간에 홍콩에서 일자리를 구하게 된 것은 전임자가 승진해 미국으로 갔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기회였다. 덕분에 우리 아이들은 국제학교에서 교육을 받는 큰 혜택을 누리고 있고, 나는 그런 기회를 제공해 준 아버지가 되었다. 이 모든 일에 대해서 내가 계획한 건 하나도 없었다. 어느 순간 그런 기회들이 다가왔을 뿐이다. 과거의 일들도, 지금의 상황도 불평할 것이 하나도 없다. 앞으로 생길 일도 걱정하지 말고 그 때 감당하면 될 일이다. 이미 홍콩에서 이런 기회를 가지고 살아봤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배부른 걱정하지 말고 지금을 열심히 살아야겠다. 지금 가진 것으로도 주변을 도울 수 있다. 주변을 더 돌아보자.
2020년 배우 오정세의 남우조연상 수상 소감을 요약하며 글을 마무리 짓고자 한다.
"지금까지 한 100편 넘게 작업을 해왔는데, 어떤 작품은 성공하기도 하고 어떤 작품은 망하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100편 다 똑같이 열심히 했는데, 제가 잘해서 결과가 좋은 것도 아니고 제가 못해서 망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세상은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꿋꿋이 열심히 자기 일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똑같은 결과가 주어지는 건 아니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그 일을 계속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자책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탓이 아닙니다. 그냥 계속하다 보면 평소처럼 똑같이 했는데 그동안 받지 못했던 위로와 보상이 여러분들에게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