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igner’s travel note : inspiration
창이 국제공항을 빠져나오자 열대의 바람이 뺨을 스쳤다. 시내로 가는 내내 다정하게 줄지어 서 있는 나무들과 항구에 즐비하게 늘어선 높은 빌딩들의 화려한 야경들. 도심의 세련된 풍경을 디지털카메라로 담아내고 있으려니 온갖 재미있는 상상의 나래가 눈을 뜨는 듯했다. 낯선 곳에 발 디딘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자유로움으로 긴 비행의 고단함은 이렇게 서서히 엷어지고 있었다.
싱가포르, 두 개의 이미지를 지닌 나라
싱가포르는 내게 두 개의 이미지를 가진 나라로 기억된다. 잘 닦아두어서 반짝반짝 빛이 나는 안방 같은 느낌의 도시, 혹은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뒷수습이 필요한 도시. 중국인, 말레이시아인, 인도네시아인, 인도인, 일본인, 서양인들이 마치 오래전부터 한나라 사람이었던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모여 사는 도시라 음식도 문화도 언어도 제각각 색다른 구경거리를 제공하지만 그에 따른 강력한 통제 또한 존재하는 나라이기에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이리라. 그래서인지 싱가포르를 흔히 Three Fine 도시라고도 한다. 정돈된 도시, 작은 도시, 벌금의 도시.
싱가포르는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사이에 있는 아주 작은 도시다.
서울만 한 크기지만 서울처럼 여기저기 흩어진 중심가는 별로 없고, 상업지역과 주거지역이 대부분 따로 분리돼 있다. 이 모든 지역들을 작게는 버스 노선들이, 크게는 MRT라고 불리는 지하철들이 연결하고 있는데, 도로들은 거의 일방통행이어서 바로 갈 수 있는 길도 돌아가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작은 싱가포르를 크게 보이게 하는 애교 섞인 방법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일방통행이 아닐까? 그래서인지 여행을 하다 보면 돌아 돌아 찾아간 곳이 출발한 곳의 바로 옆 동네인 경우도 간혹 있다.
벌금으로 말하자면 롤러 블레이드를 길거리에서 타는 것 같은 사소한 것들까지 벌금을 내야 하는 곳이 싱가포르이다. 도시미관을 해치는 대부분의 행위가 벌금의 범위에 들어가는데, 버스나 지하철에서 음식을 먹으면 500달러(약 35만 원), 공공장소나 미용실, 냉방이 되어 있는 레스토랑에서 담배를 피우면 1,000달러 (약 70만 원), 용변 후 물을 내리지 않으면 150달러(약 10만 5천 원), 공공장소에서 침이나 쓰레기를 버리면 1000달러(약 70만 원), 횡단보도에서 50미터 이내의 장소에서 무단횡단을 하면 50달러(약 3만 5천 원) 등의 벌금을 문다. 하지만 이런 무거운 벌금제도에도 불구하고 경찰관이 보이지 않는 곳이면 어디서나 무단횡단을 하는 사람을 발견할 수 있는 곳 또한 싱가포르이다.
대부분의 싱가포리안들은 영어와 중국어를 함께 쓴다. 어려서부터 학교에서 영어로 수업을 하고 모든 관공서의 공식 언어도 영어다. 두 언어를 모두 완벽하게 사용하는 사람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은 중국식 억양을 가진 영어인 싱글리쉬를 쓴다. 거리 또한 정성 들여 쓸어놓은 마당처럼 깨끗이 정돈돼 있지만 이 깨끗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값싼 이웃나라의 인력을 이용해 아침저녁으로 거리 청소를 해야 하고, 여러 인종이 더불어 살아 인종차별이 없는 대신 이들을 통제하기 위한 강력한 정부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오죽하면 형벌 중에 ‘태형’이라는 것이 아직까지 존재하는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가 싱가포르일까.
싱가포르에 오는 관광객이라면 놓치지 않고 들러보는 곳, 싱가포르의 중심가 오차드에는 작은 도로를 사이에 두고 몇몇 쇼핑몰들이 모여 있다. 일 년 내내 더위와 함께하는 도시라 건물들은 냉방이 잘 되어있고, 길가에는 시원스레 키 큰 나무들이 푸르게 그늘을 지으며 줄지어 서있다.
공항으로 가는 길에 늘어서 있는 나무들 하나하나에는 그 나무들을 관리하는 인력들이 따로따로 한 명씩 배정되어 있다고 하던데, 오차드의 나무들도 그런 것일까? 한 그루 나무에도 정성을 쏟아 조금이라도 더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한 싱가포리안들의 노력이 엿보였다. 특히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온통 화려한 전등으로 나무들을 장식해 한여름 밤의 눈부신 거리로 변신하기도 한다.
아이러니하다. 전통을 가진 나라는 다양한 문화가 있는 곳을 그리워하고, 다양한 문화를 가진 곳은 전통을 가진
나라를 부러워한다. 깨끗함과 정돈됨을 가진 사람은 조금은 무절제한 자유를 동경하고, 무절제한 자유를 가진 사람은 깨끗함과 정돈됨을 동경한다.
한국인은 한국을 떠나고 싶어 하고, 싱가포리안들은 한국을 가보고 싶어 한다. 그래서 여행이란 참으로 재미있고 행복한 행위가 아닐까.
싱가포르는 인공적인 계획도시답게 우리나라처럼 정감 있고 독특한 - 혹은 조금은 무절제한 - 노점상들이나 길가를 따라 늘어선 작은 상점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나마 소소한 재미를 느껴볼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일반 서민들이 사는 HDB - 싱가포르에서는 일반 아파트를 이렇게 부른다 - 주위에 간혹 있는 ‘wet market’이 있다. 찾아가기가 좀 힘들긴 하지만 일단 이 재래시장에 도착하면 쇼핑몰의 슈퍼마켓과는 달리 별달리 손질하지 않은 신선한 생선과 과일, 채소, 꽃 등을 중국어와 영어를 섞어가며 싼값으로 흥정하는 싱가포리안을 만나볼 수 있다.
대신 커다란 쇼핑몰을 따로 만들어 모든 상점들을 이 한 쇼핑몰에 집중시켜 놓는데, 그래서인지 싱가포리안들만의 아기자기하고 인간적인 일상을 엿보는 재미가 없는 것이 조금 아쉽다.
음식은 쇼핑몰의 지하나 사무실 혹은 아파트 밀집지역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호커스 센터’ 혹은 ‘커피숍’에 가면 3,000원 내외의 저렴한 가격으로 인도음식이며 중국음식, 말레이 음식 등 다양한 나라의 음식을 손쉽게 골라 먹을 수 있다. 요즘은 한국 드라마와 영화의 붐을 타고 상대적으로 조금 비싼 한국 음식들도 상당한 인기를 얻고 있다.
그러고 보면 문화의 힘이란 참으로 대단하다. 다양한 이야깃거리와 로맨스로 싱가포리안들을 단숨에 사로잡은 한국 드라마와 영화들 덕택에 그들은 음식뿐만 아니라 뚜렷한 사계절을 지닌 한국의 매력에 흠뻑 빠져 우리나라에 무척이나 가보고 싶어 한다. 오죽하면 ‘한류 극장’이라는 고정 코너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따로 배정되어 있을까.
싱가포르는 일 년 내내 지루한 열대성 기후를 보이는 섬나라로 특히나 눈이 많이 내리는 한국의 겨울 거리 풍경과 사시사철 변화무쌍한 한국의 산을 동경한다. 어떤 친구는 태어나서 한 번도 눈을 구경하지 못했다며, 눈이 오면 알맹이를 손가락으로 집듯이 눈도 그렇게 집을 수 있냐고 물어서 나를 즐겁게 했다.
한 번은 택시를 탔더니 운전사가 싱가포르에 와서 제일 좋은 것이 어떤 것이냐고 물었다. 울창한 나무와 깨끗한 거리라고 했더니, 당신 자신은 싱가포르는 이미테이션의 나라라고 생각한다며 웃었다.
싱가포르는 국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유한 것들을 보존하는 대신 여러 나라의 문화와 인종, 종교를 받아들이고, 그 후엔 다양성을 통합하기 위해 영어라는 국제어로 언어를 통일시켰다. 하지만 그 문화와 언어가 완벽하게 융합되지 못하고 제각기 따로 이미지만을 흉내 내 합쳐 놓은 것 같다며, 고유한 언어와 전통이 있는 한국을 부러워했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전통을 가진 나라는 다양한 문화가 있는 곳을 그리워하고, 다양한 문화를 가진 곳은 전통을 가진 나라를 부러워한다. 깨끗함과 정돈됨을 가진 사람은 조금은 무절제한 자유를 동경하고, 무절제한 자유를 가진 사람은 깨끗함과 정돈됨을 동경한다.
한국인은 한국을 떠나고 싶어 하고, 싱가포리안들은 한국을 가보고 싶어 한다. 그래서 여행이란 참으로 재미있고 행복한 행위가 아닐까.
안주한 사람은 낡은 여행가방을 챙겨 떠나고 싶어 하고, 떠난 사람은 다시 고향을 그리워하듯이….
이 글은 2004년 디자인 잡지 '월간 웹디자인'에 기고했던 싱가포르 여행기(designer’s traverl note: inspiration - 짧은 여행 그래서 더 달콤한, 싱가포르-1)를 옮겨 놓은 것입니다.
낡은 서랍에서 꺼내온 추억이 깃든 글입니다. 브런치의 첫 글을 소중히 간직해 두었던 옛글로 시작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