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은 아프다

가난은 아프다 2편

지옥같던 중학교 2학년 시절은 그렇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해 7월 아버지가 사업을 한다고 은행에서 빌린 돈을 갚기 위해 우리는 집을 팔았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혼을 하셨다.


이혼 후 어머니가 수중에 가진 돈은 1,000만원이 안됐다.

이후부터 우리집은 다시 가난해졌다.

그 돈으로 어머니는 급하게 다가구주택의 월세로 들어가셨다.

그리고 생계를 꾸리기 위해 도배를 배우시고, 지방으로 도배를 하러 다니셨다.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아무도 없는 집에 불을 키고 들어와 혼자 저녁을 차려먹고 공부를 했다.

학원은 꿈도 꾸지 못했다.


중3때 담임선생님이 어머니를 면담하자고 했다.

내가 외국어고등학교를 들어갈 실력이 되는데, 보내시는게 어떠냐고 물어보시기 위함이었다.

거기서 어머니는 외국어고등학교의 학비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고 대답하셨다.

그리고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이셨다.


그리고 내게 미안하다고 말씀하셨다.

그 날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집 근처 인문계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다행히 그 학교는 인근에서 주소를 옮겨서라도 가고 싶어하는 고등학교였다.

그에 따라 집이 부유한 아이들도 많았다.


그곳 고등학교는 입학예정인 학생들을 상대로 국,영,수 시험을 봤다.

우등반을 선발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 시험은 중학교 수준의 문제가 아니었다. 영어 단어는 생전 처음보는 단어들이 수두룩했다.

나는 고등학교 선행이 전혀 안되어 있었기에 그 문제들이 너무나 어려웠다.

시험을 치루고 나서 완전히 망했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다행히 반10등으로 입학하게 되었고, 꼴찌로 우등반에 선발되었다.


후에 알았지만 그 고등학교의 상위권 아이들은 중학교 때 고등학교 공부를 선행하고 온 아이들이 대다수였다.

상위권 아이들의 부모님도 서울대 치과 교수, 대기업 임원, 고위직 공무원 이런 직업을 가지고 계신 경우가 많았다.


고등학교 시절 난 학원 하나 다닐 형편이 되지 못했다.

더욱이 우리집은 TV 수신료를 내지 않아 TV에서 EBS도 나오지 않았다.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은 EBS에서 수능출제 비중을 높이겠다는 이야기가 나오던 시절이었다.

어머니는 또 한번 우리집에 EBS도 나오지 않는 현실 때문에 내 앞에서 미안하다며 눈물을 보이셨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이 악물고 공부를 했던 것 같다.

다른 아이들은 학원에서 여러번 듣는 수업내용을 나는 학교에서 듣는 것이 다 였기에 눈을 부릅뜨고 들었다.

그래서 선생님들로부터 '니가 수업태도는 일등이다'라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었다.


그러면서 입할할 때 반10등(당시 한 반은 50명이 좀 넘는 학생수가 있었다)이던 성적은 고등학교 3학년 때 반3등까지 치고 올라갔다.

물론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어머니가 자궁에 혹이 생겨 수술을 하는 등 나의 고난은 쉬지 않고 계속 되었다.

그래도 고등학교 졸업 후 인서울 중상위권 대학에 입학해 지금은 대기업에 다니고 있다.




가난은 아프다

가난은 정말 아프다.

그래서 나는 아이를 낳아서 제대로 키우지 못할 바에는 결혼을 하지 않거나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부모가 부도덕하거나 능력이 없을 때 아이들이 얼마나 고통을 겪는지를 나는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후 나는 좋은 여자를 만나 아이들이 생겼고 지금은 아이들이 어떻게 하면 행복할까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이 나같은 고통을 겪지 않고, 밝고 행복하게 자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정말 자주한다.


와이프가 캐나다에 있는 우리 아이들 소식을 전할 때면 "우리 아이들은 행복하대?" 하고 자주 묻는다.

나는 불행한 청소년 시절을 보냈지만, 그런 악순환은 내가 끊어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릴 때도 많다.


물론 아직은 행복이라는 질문에 진행형인걸 잘 안다.

그래도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 언젠가 이를 완료형으로 바꿀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그날을 꿈꾸며 나는 매일 진행형을 완료형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한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중2병은 개나줘버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