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기획자가 된 한 사람의 회고록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식당 메뉴를 고르는 것부터 대학 원서까지. 이런 크고 작은 선택이 모여서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삶이 이어지곤 한다. 그리고 현재 나의 위치에서 과거를 돌이켜보면 내가 여기에 있기까지 불필요한 선택은 단 하나도 없었다. 어떤 선택으로 인해 직선거리를 곡선으로 돌아오기도 했지만, 만약 정반대의 선택을 했더라면 내 삶에 큰 영향을 미친 귀인을 그 곡선길에서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어려서부터 무언가를 선택하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신중함과 우유부단함은 한 끗 차이인데, 이제야 깨닫지만 그때의 내 행동은 신중함을 가장한 우유부단함 그 자체였다. 그래서인지 항상 누군가가 나 대신 선택해주기를 바랐고, 정해진 일을 하는 것이 편했다. 학창 시절 나는 무언가를 복잡하게 선택하는 것보다 학생 신분으로써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좋았고, 운이 좋게도 끈기 있는 성격을 타고난 덕분에 원하는 대학에 합격할 수 있게 되었다.
성인이 되어서부터는 선택의 순간들이 이전보다 훨씬 많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선택하는 것을 두려워했고, 누구나 하는 선택을 따라 했다. 학교를 열심히 다니고, 동아리 활동을 하고, 군대를 가고, 인턴을 했다. 그렇게 삶이 흘러갔으면 나는 아마 직선거리를 누구보다 빠르게 주파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태어나 처음 '이게 맞는 선택일까?'라고 의심하는 순간부터 내 삶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군대 전역 후, 돈이 궁해서 이곳저곳 과외를 하기 시작했는데, 한 학생 아버지가 나를 좋게 봐주셔서 본인 회사에서 일해보라고 제안해주셨다. 운이 좋게도 중견기업 정도 규모의 게임회사에서 2개월가량 마케팅 인턴을 하게 되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퇴사하는 날 그 CEO님께 여쭤봤다. '선택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이 무엇일까요?' 그분께서 대답해주셨다. '나도 잘은 모르겠는데, 더 힘들고 더 노력해야 하는 일을 선택하는 게 대개 맞더라고.'
인턴이 끝나고 창업을 시작했다. 예전부터 창업을 해보고 싶었지만, 그동안 그 선택에 있어 두려움이 컸다. 남들이 하지 않는 선택이어서. 나 스스로 처음 하는 선택이어서. 하지만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자신감이 생겼다. 그 당시 내가 가장 많은 노력을 쏟아부어야 했던 선택이었으니까. 그렇게 나는 실전창업 학회에 들어가서 팀을 만났고, 고등학교 시절 불편했던 경험을 해결하기 위한 교육 플랫폼을 창업했다.
그때 처음 서비스 기획을 해봤다. 누군가 나에게 기획을 가르쳐주지도, 혼자 공부하지도 않았다. 서비스를 만들고 키워나가는 데 있어서 필요한 것들을 그때그때 알아서 기획했다. 기능 명세서? 모른다. 화면 UI/UX? 모른다. 사용자 입장에서 필요한 기능들을 만들어내면 된다. 처음부터 100점짜리 답안지를 제출하는 것보다 50점짜리 답안지를 빠르게 제출하고 선생님께 틀린 것을 물어보면서 100점을 만드는 것이 더 빠르다. 내 머릿속에 있는 최소한의 기능만이 포함된 시제품(MVP)을 1달 만에 내놓고 시장에게 물어봤다. '내가 생각한 게 맞니? 이게 너희에게 필요한 거니?' 사용자에게 계속 물어봤다. 우리가 서비스를 어떻게 개선하면 좋겠냐고. 그게 내가 창업을 하면서 깨달은 기획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시장의 반응을 테스트하는 것.
창업을 하는데 돈이 필요했다. 이런저런 대회도 나가고 사업계획서도 쓰면서 스타트업 관련 관계자를 여러 만났다. 그중 한 투자자분께 여쭤봤다. '선택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이 무엇일까요?' 그분께서 대답해주셨다. '음.. 나는 내가 잘하는 것,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해야만 하는 것. 이 세 개 중에서 두 개가 만족하면 바로 시작하고, 모두 다 만족하면 어떻게든 하려고 했던 것 같아.' 집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봤다. 내가 지금 하는 일은 올바른 선택일까? 우선 내가 불편했던 것을 해결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고, 그쪽 시장에 대한 이해가 깊었기 때문에 누구보다 이 분야에선 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교육 관련 일이 언제나 흥미롭지 않았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해야만 하는 것에 대한 판단은 내 가치관과 직결되는 일이었기 때문에 고민의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다. '내 가치관이 무엇이었지?'
고등학교 시절 철학에 관심이 있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답하고 싶었다. 전혀 논리적이진 않지만 본인 스스로 나름 납득할만한 이유를 찾았다. 신은 존재한다. 빅뱅 이론과 진화론이 모든 걸 설명할 수 있어도 태초의 시작을 나에게 설명할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광활한 우주 속 무의미한 알갱이가 아닌 하나의 유의미한 생명체로써 존재의 가치를 부여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왜 나는 소말리아나 아프가니스탄이 아닌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일까? 아니, 애초에 내가 이곳에 태어난 것부터가 불공평한 랜덤 게임이었다.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이었다. 그렇게 난 나름의 존재의 이유를 합리화하기 위해선 이 불공평한 것을 조금이나마 공평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날 나는 내 가치관을 정했다. '나중에 어떤 일을 하건 나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되자. 그렇게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자.'
당시 내가 하는 일은 가치관에 부합하는 일이었다. 세 개 중 두 개가 만족했기 때문에 일을 지속했다. 그리고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팀원 중에 유별난 형이 있었다. 지금까지 만났던 사람들과는 다른 부류였다. 군대에서 가장 감명 깊게 읽은 '그리스인 조르바'에 나온 조르바 같은 사람이었다. 물론 그 정도로 힘들진 않지만. 형이 나에게 주식을 알려주면서 그동안 몰랐던 세상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주식은 곧 정치이며, 경제이고, 사회이기도 하고, 문화일 때도 있었다. 세상에 대해 배운다는 것은 재밌는 일이었고 행복한 일이었다.
창업을 한 지 1년이 좀 지났을 무렵 제 발로 팀에서 나왔다. 번아웃이 오기도 했었고, 이게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인가에 대한 의문도 들었으며, 무엇보다 이전보다 내가 더 힘들고 더 노력해야 하는 일이 더 이상 아니었다. 내가 지금까지 배워온 선택의 기준과는 전혀 부합하지 않았다. 1달간 푹 쉬었다. 그 기간 동안 과 동기인 친한 형을 만났다. 나보다 4살이 많았기에 나름 연륜이 있었다. 형한테도 물어봤다. '선택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이 뭐야?' 형이 대답해줬다. '경제학을 공부하면서 이거 하나는 제대로 배운 것 같아. 우리는 미시적인 흐름은 어떻게든 제어할 수 있지만, 거시적인 흐름은 거스르지 못해. 시대에 맞는 선택을 해야 하지 않을까?' 다음 선택을 어떻게 할지 감이 잡혔다.
빅데이터와 AI가 바꿀 세상을 생각해보니 이게 시대에 부합하는 일이었다. 닥치는 대로 통계학과를 복수 전공하고 빅데이터 학회에 들어가고 데이터사이언스 공부를 시작했다. 생전 처음 하는 것이었지만 많은 노력을 필요로 했고, 해야만 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1년간 머신러닝을 공부하면서 기초를 다졌고, 어느 정도의 지식은 쌓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기서 다음 단계로 대학원 석사 및 박사 과정을 선택한다. 그래야 전문적인 지식을 갖출 수 있기 때문에. 예전의 나였으면 그들과 같은 길을 걸었겠지만 나의 선택은 달랐다. 나는 어서 일을 하고 싶었고, 빨리 무언가를 해내고 싶었다. 근데 나의 머신러닝 기초지식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래서 혼자 개발 공부를 시작했다. 데이터를 분석할 줄 아는 개발자가 되고 싶었다.
그렇게 혼자 공부하던 중에 아는 형이 본인이 하는 스타트업 좀 도와달라고 했다. 그때 나의 선택은 신기하게도 아무런 기준이 없었다. 돈도 궁했고 새로운 곳에서 일도 하고 싶었고 해서 승낙했다. 거기서 2개월 정도 일을 했는데, 옆에 다른 팀 개발자 분과 우연한 계기로 친해지게 되었다. 그분이 생각보다 나를 많이 아껴주셔서 대학을 졸업할 때쯤 본인 팀에 개발자로 일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주셨다. 당시 개발자 뽕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서버 개발자로 일하게 되었다.
개발자로 일해보니 한 가지 확실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개발 쪽 재능은 없구나. 이 세상에는 너무나 뛰어난 프로그래머가 많구나. 이게 과연 내가 잘하는 것일까? 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로 이전 게임회사 CEO님과 밥을 먹게 되었다. 그분께서 근황을 여쭤보길래 스타트업에서 개발일을 한다고 말씀드렸다. 그분이 말씀해주셨다. '일을 배울 거면 스타트업보단 대기업이 낫고, 네가 더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맞아. 왜 많은 성공한 CEO들이 다 대기업 출신 일지를 생각해봐. 그리고 프로그래머는 잘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막상 당신이 우리 회사 들어온다고 해도 개발로는 안 뽑을걸? 잘 생각해봐.'
집에 돌아왔는데 마침 부모님께서도 대기업에 한 번 지원해보라고 하셨다. 그날 따라 왠지 모르게 어른들의 말을 선택의 기준으로 삼고 싶었다. 그리고 운명의 장난처럼 그날 당일 내가 너무 좋아해서 주식까지 대량 보유하고 있는 IT 대기업에 채용연계형 플랫폼 기획 인턴십 모집공고가 올라왔다. 자소서 하나 없던 나에게 해당 공고는 포트폴리오만 작성하면 된다고 해서 이전 회사에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뒀던 것을 제출했다.
그리고 3개월 뒤 나는 그 회사에 기획자로 입사하게 되었다. 내가 그때 CEO님께 선택의 기준을 물어보지 않았다면, 창업을 하지 않았다면, 투자자를 만나지 않았다면, 가치관에 대해 고민해보지 않았다면, 주식을 알려준 형을 만나지 않았다면, 빅데이터를 공부하지 않았다면, 아는 형을 도와주지 않았다면, 개발자 분과 친분을 쌓지 않았다면, 어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지금 내가 기획자의 일을 하고 있을까? 일련의 선택 덕분에 현재의 내가 될 수 있었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은 더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내가 잘하고, 좋아하고, 해야만 하는 일이다. 선한 영향을 미치는 일을 하자는 나의 가치관과도 맞아떨어진다. 선도하는 IT 대기업에서 시대의 흐름에 발맞추고 있다. 내가 살면서 따라왔던 선택의 모든 기준에 부합한다. 여기서 나는 또 어떤 중요한 선택을 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