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해보니 지금으로부터 무려 83년 전인 1941년에 쓰신 편지입니다. 일제가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면서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던 바로 그 해입니다.
당시 한창 피 끓는 청년이셨을 20대의 아버지가 아리따운 처녀였던 우리 어머니에게 구구절절 고백하는 사랑의 언어가 80여 년 시공을 초월하여 내 가슴 속에 꽃피듯 활짝 다시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때 이미 대학교육을 받은 엘리트 청년이셨고 어머니도 전문학교를 나온 신여성이었습니다. 그처럼 눈부시게 빛나는 두 청춘남녀가 만나 뜨겁게 연애하고 결혼했으니 실로 그 시대엔 보기 드물게 축복받은 연인이요 축복받은 부부라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격동의 시대를 살아야 했던 두 분의 생애는 순탄치 못했습니다. 해방 후 갓 건국된 이승만 정부에서 공직을 시작한 아버지는 6.25와 4.19와 5.16을 온몸으로 관통하면서 끝없이 분노하고 또 절망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느덧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대꼬챙이 같던 아버지는 특히 서슬 퍼렇던 군사정권과 불화했습니다. 그런 아버지를 조마조마하게 바라보는 어머니의 한숨 소리가 날마다 온 집안을 무겁게 내리덮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아버지는 공직에서 옷을 벗고 나왔습니다. 그 후 평생 공직에만 계시던 순진한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하이에나 같은장사꾼들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바로 그들의 표적이 되고 사냥감이 되었습니다. 이리저리 실컷 이용만 당하다가 헌신짝처럼 버려졌습니다.
완전히 파산해버린 아버지가 뒤늦게 암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암이 전신에 퍼져버린 뒤였습니다. 창창한 젊은 나이에 갑자기 말기 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고도 아버지는 끝까지 나라를 걱정하셨고 우리 가족들을 걱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올망졸망한 자식새끼들과 사십 대의 젊디젊은 아내만 남겨두고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문학과 미술과 음악 등 거의 모든 예술 분야에 뛰어난 재능을 나타내셨고, 대한민국 초대 재무부 정통관료로 탁월한 행정가이셨으며, 손만 대면 못 고치는 기계가 없을 정도로 손재주 좋은 만능 엔지니어요, 어려운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할 정도로 마음 따뜻하셨던 우리 아버지. 뭐가 급해 그 젊은 나이에 그리 일찍 떠나가셔야 했을까? 어머니와 어린 자식들만 남겨놓고 눈을 감으시면서 과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파산자의 최후는 초라했습니다. 파산자는 장례식도 초라했습니다.
아버지가 공직에 계실 때 혹시 떡고물이라도 얻어먹을 게 있을까 하고 아버지 주위를 얼씬거리던 무수한 사람들, 시마다 때마다 아버지께 도움을 청하며 번번이 아버지의 은혜를 입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건만 장례식이 다 끝나도록 누구 하나 코빼기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장례식을 마친 아버지의 유해는 화장장으로 향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사람이 죽으면 매장하는 것이 당연시되던 시대였는데 굳이 우리가 화장을 택해야 했던 이유는 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매장할 장지를 구할 돈이 없었던 어머니는 피눈물 흘리며 남편을 화장해야만 했습니다.
누가 사람의 뼈를 백골이라고 거짓말했을까?
벽제 화장터의 불 구덩이에서 갓 나온 아버지의 유골은 흰색이라기보다는 옅은 회색에 가까웠습니다. 차라리 반짝반짝 빛나는 백골이었으면 덜 슬펐을까? 잿빛 유골은 우중충해서 더 슬퍼 보였습니다.
그때는 미처 다 태우지 못한 유골은 절구에 집어넣고 일일이 빻아야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유골을 절구에 넣고 콩닥콩닥 방아질 하던 아저씨가 갑자기 손을 벌리며 소리쳤습니다.
“차비 내라! 차비들 내야지!”
웬 차비인가 했더니 저승길 가는 차비를 내라는 것입니다. 서둘러 없는 돈을 추렴해서 먼 길 떠나시는 아버지의 차비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제야 아버지의 유골은 고운 가루로 빻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한 줌의 가루로 변해버린 아버지의 유골을 포장지로 싸서 가슴에 안았습니다. 아직 열기가 식지 않은 아버지의 유골은 뜨거웠습니다. 뜨거운 아버지를 품에 꼭 끌어안고 있노라니 뜨거운 눈물만 하염없이 흘러내렸습니다.
내리쬐는 한낮의 햇살도 뜨거웠습니다. 뜨거운 햇살 속에 뜨거운 유골을 품에 안고 뜨거운 눈물을 펑펑 쏟으며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어디에다 아버지의 유골을 뿌려야 하나?
갑자기 아주 오래전, 아버지와 우리 온 가족이 한강 광나루로 소풍 갔던 생각이 났습니다. 아버지와 마지막으로 함께 했던 행복한 추억이었습니다. 거기가 좋을 것 같았습니다.
광나루에 아버지 유골을 뿌리기로 했습니다. 벽제 화장터에서 광나루까지는 엄청나게 먼 거리였습니다. 열여섯 살 소년이 그 먼 길을 수도 없이 버스를 갈아타며 물어물어 찾아갔습니다.
***
70년대 초의 광나루 일대는 온통 갈대숲으로 뒤덮여 었습니다.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모래밭과 갈대숲을 힘겹게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니 마침내 강물 흘러내리는 백사장이 나왔습니다.
어릴 때 아버지와 물장구치며 놀던 곳이었습니다. 강가에 우두커니 서서 강물 흘러내리는 소리를 듣고 있었습니다. 강물 흘러내리는 소리가 꼭 내 이름을 부르는 아버지의 목소리처럼 들렸습니다.
아버지와 물장구치며 놀던 강물에 아버지의 유골을 뿌렸습니다. 처음엔 한 주먹씩 조심스럽게 뿌리다가 나중엔 아버지. 아버지. 울부짖으며 두 주먹 세 주먹씩 멀리멀리 흩뿌렸습니다.
어느덧 노을이 지고 있었습니다. 내 손을 떠난 아버지의 유골이 지는 노을빛에 반짝거리며 시퍼런 강물 속으로 스러져갔습니다. 유골을 다 뿌리고 난 다음 어두워져 가는 강가에 주저앉아 오랫동안 울고 또 울었습니다.
눈을 뜨니까 벌써 사방이 캄캄해져 있었습니다. 손바닥을 펴보니 아직 아버지는 나를 완전히 떠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의 뼛가루가 미련처럼 두 손바닥에 가득 묻어 있었습니다.
잘 가세요. 아버지. 고생 많이 하셨어요. 그러니까 이제는 꼭 좋은 데 가셔야 해요.
내 손에 마지막까지 달라붙어 있던 아버지의 흔적을 탈탈 털어버리고 벌떡 일어났습니다. 집에 가자. 그래. 아직도 나에겐 엄마가 남아 있잖아. 빨리 엄마에게 가야지.
허둥지둥 갈대숲 사이로 걸어 나오다가 그만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아. 큰일 났네. 어디로 가야 하나? 캄캄한 밤에 길을 잃고 이리저리 한참을 헤매고 다녔습니다.
헤매다가 문득 눈을 들어 보니 저 멀리 깜박깜박 십자가 불빛이 빛나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저 십자가 있는 데는 아마 교회일 거야. 교회가 있는 곳엔 동네도 있고 차도 다닐 거야. 그러니까 저 십자가 불빛을 따라 가보자. 저 십자가 불빛을 따라가면 반드시 길이 나올 거야.
십자가 불빛을 따라 갈대숲을 이리저리 헤쳐가며 한참 걸어 나왔습니다. 그러자 정말 차들이 쌩쌩 지나다니는 큰길이 나타났습니다. 그 길에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 불빛이 깜박깜박 비추던 곳은 아차산 기슭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산 중턱에 신학교가 있었고 나는 그 신학교 안에 세워진 교회의 십자가 불빛을 따라 걸어온 것입니다.
아. 인생은 참으로 오묘합니다.
그 후로 오랜 세월이 흘러 사십 중반도 훌쩍 넘어 오십을 바라보는 늦은 나이에 하필이면 바로 그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목사가 될 줄이야 정말 꿈에서조차 생각도 못 한 일이었습니다.
***
저미도록 아픈 그 여름날 강가에서의 추억 이후로 오랫동안 아버지 없이 살아가던 내게 또 다른 아버지가 찾아오셨습니다.
아내의 손에 이끌려 교회란 곳에 처음 발을 내딛기 시작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또 다른 아버지가 찾아오셨습니다. 그분은 바로 하늘 아버지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눈을 감고 가만히 불러보니 별안간 가슴 속이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내 아들아…”
내 영혼의 귓가에 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나는 네가 부르는 아버지 소리를 얼마나 듣기 원했는지 모른다."
느닷없이 눈에서 눈물이 솟구쳐 올라왔습니다. 이윽고 내 어깨를 어루만지는 따스한 손길이 느껴졌습니다. 나는 흐느끼며 그 손을 잡았습니다.
"오오. 아버지."
그리고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이제부터는 아버지 손을 꼭 잡고 가겠어요."
***
장로회신학대학교 언덕길을 오르내리며 한강 쪽을 아련히 내려다보면 워커힐 아파트 너머, 한강호텔 너머, 강물 흘러내리는 광나루가 보였습니다. 그리고 저 멀리 울창한 갈대숲 사이에서 길을 잃고 이리저리 헤매고 다니는 그 옛날 10대 소년의 모습도 어른어른 보이는 듯했습니다.
길을 잃고 헤매던 소년이 십자가 불빛을 발견하고 그 십자가 불빛 따라 굽이굽이 인생길을 돌고 돌아 여기까지 왔습니다. 내 인생은 십자가를 향해 십자가를 바라보며 십자가를 지고 걸어온 인생이었습니다.
그날, 계엄의 밤에 나는 노랗게 탈색된 80여 년 전의 연애편지를 읽었습니다.
어느덧 칠십 노인이 된 아들이 미처 노인도 되어보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나버린 젊은 날의 아버지와 오십 년 세월 남편을 가슴 속에 품고 홀로 살다 가신 어머니를 추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