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원 탈출기

116일 고시원을 살면서

by 파타과니아

어머니 생일날에 집을 나왔다. 오늘 딱 120일이 됐다. 전세로 간지는 4일째다. 고시원에서는 116일 살았나. 그리고 스타트업에서 일한지는 3일째다. 늘 생각나면 일단 해보거나, 아니면 해치워야 된다고 생각해서인지 하루 반 만에 이사를 끝내버렸다. 스타트업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바로 일하겠다고 대답했다.


지난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위에 브런치북을.


1. 9월 중순에 나와 고시원에 입실했다. 가장 빠르게 방을 구하는 방법이고, 저렴했기 때문이다.


지금 소제목들을 보니 참 귀엽다. 내가 나를 보고 귀엽다고 하다니 미친 걸까.


불만보다는 불안을. 타인은 지옥인가. 타인은 지옥인가? 루틴이 잡혔다. 외롭지만 다시 살아보자. 처음 주말.

생각이 또 하나 바뀌었다. 나는 박쥐인간. 타인은 지옥 맞다. 비 오고 휴무인 날. 기분이 좋다. 지갑을 잃어버리다. 스타트업 4일 차. 무미건조한 날들...


희로애락이 다 느껴져서 신기하다. 이게 고작 3달 전이다.


2. 그렇지만 해고 후 힘들었다. 사실 해고보다 힘들었던 건, 루틴이 사라졌다는 거였다. 아침 간단히 먹고, 헬스장 가고, 늘 총각 왔냐고 말하는 기사식당에 가서 돼지불백을 먹고, 저녁은 닭가슴살을 먹었다. 밤까지는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거나 글을 썼다. 헬스장이 사라졌고, 거의 비슷한 시기에 해고도 됐다. 아침 7시부터 10시의 루틴이 사라져 버렸다.


3. 좁아터진 방에서 한 3일 정도 누워 모바일 게임과 유튜브로 보냈던 날도 있다. 내가 나를 해치는 느낌은 짜릿하면서도 허무하다. 물론 대부분의 날은 알차게 보냈다.


4. 문득 이렇게 살면 안 될 거 같아 전세로 옮겨야겠다고 결심했다. 공간부터 바꾸면 뭐라도 되지 않을까. 안일한 생각이었지만, 이는 잘한 선택이었다.


5. 전세제도는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회사가 확정되면 집을 옮기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회사가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잘 살고 봐야 했다. 일단 기운을 내야 회사든 일이든 하지 않을까. 좁은 공간은 잠만 자는 공간인데, 잠만 자는 게 아닌 일상인 나로서는 일단 공간을 옮기는 게 더 나아보였다.


6. 모교 근처와, 저렴한 서울대 쪽을 봤다. 서울대 쪽이 모교 쪽 전세의 반값이라 하도 고민돼서 3번 정도 중개사를 만났다. 결국 모교 근처로 정했다. 익숙하고 본가로 가는 버스도 있고, 나중에 살고 싶은 지역이다. 방도 넓다. 서울대 쪽 중개사가 3번이나 방문하고 계약하지 않은 건 아니지 않냐고 해서 차단한 건 미안하긴 하지만.


7. 갖고 있던 주식을 반 정도 팔아서 계약금과 잔금을 마련했다. 보증금은 카카오대출을 이용했고, 잡다한 서류는 네이버 블로그 참고. 전세 빌라왕에 대한 고민은 기우제 중.

8. 금요일 밤에 택배를 보내고, 월요일 오전부터 이사를 시작했다. 큰 옷가지들이나 물건들은 택배로 보내서 크게 정리할 건 없었고, 대신 고시원에 살면서 옷이랑 신발 정도가 다였어서 잡다한 걸 다 당근마켓으로 샀다.


9. 매트리스, 스탠드, 책상, 전자레인지를 당일에 사고, 발매트나 주방용품 등 간단한 걸 다이소로 샀다.

10. 저녁에는 학교 조교로 일하는 친구와 저녁을 길게 먹었다.




고시원에 살았던 게 잘한 걸까. 좋은 기억으로 남을까. 잘 모르겠다. 예전부터 형이 말했던 것처럼 늘 편한 길을 두고 돌아갔다. 그냥 부모님 집에 살면서 돈 아끼며 취업준비나 하지 왜 까분다고 나와서 고생일까.


그래도 고시원에서 살았기에, 스타트업에서 일한다는 리스크 있는 선택을 온전히 고민해서 할 수 있었다. 실직 후 <남의집>을 하거나 에어비앤비를 한다는 생각도 본가에 있었다면 하지 않았을 거다. 기한임박 음식만 골라서 주문하고 튼튼한 위장을 가지게 됐다. 고시원에 살았기 때문일 거다. 실직 후 위로랍시고 전통주를 잔뜩 주문해 마신 것도 고시원에서 살아서 가능했던 거다. 그리고 그래서 1200명의 구독자와 150만의 조회수를 얻을 수 있었다. 보잘것없는 이야기를 보고 필자가 재밌다고 찾아오고, 돈과 시간, 관심을 지불해주신 분들이 계시다. 이 고시원에서 살아남는 게 장하다고 제안을 준 사람도 있었다.


무던한 편이라 고시원에 살면서도, 헬스장이 사라지면서도, 해고당하면서도 그냥 그렇구나. 생각했다. 그러니 해고 당일에 글을 쓰고, 헬스장이 사라진 날에도 글을 쓸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데 지금 다시 보려니 민망해 못 보겠다. 감정 없이 쓴 글인 줄 알았는데 감정이 가득하다. 어쩔 때는 독기고, 어쩔 때는 분노다. 슬픔이 묻어나올 때도 있다.


말로는 스스로의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다. 가족과 애인은 나보다 나를 더 걱정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내게는 그렇게 크지 않은 일들도 그들은 나보다 더 크게 공감하고, 아파하고, 기뻐한다. 그래서 오히려 정말 힘든 일이 있을 때는 잘 말하지 못했다. 정말 기쁜 일 따위는 없었고.


힘들다고 하면, 그들이 나보다 몇 배는 더 걱정하고 힘들어할 거 같았다. 그래서 좁아터진 방에서 술을 마셔야 했던 날에도, 담배를 세네 개 피어도 스트레스가 안 풀렸던 날에도 다 괜찮다고 했다. 대신 앉아서 글을 썼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개운해졌다.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독자분들에게 감정 쓰레기통을 맡긴 건 아닐까 싶은데, 그래도 다들 감정 없이 잘 읽힌다는 걸 보면 아직 감정조절이 잘 되나 보다. 다들 행복하시기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