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재정비해서 나아가려면
오늘은 오후까지 내내 잤다. 습관적으로 사무실에 가서 다음 주에 처리해야 할 루틴한 문서 작업이나 미리 해둘까 생각도 해봤는데, 이내 접었다. 일어나서는 집에서 고속터미널, 그리고 여의도까지 걷고 또 걸었다. 생일이 일월 일일인 덕분에, 연초가 되면 내가 평소 주변에 행한 것 대비 더 많은 인사를 주고받는 편이다. 제대로 답장하는 것도 미룬 채, 핸드폰 알람도 꺼두고, 될 수 있으면 디지털기기에 대한 의존도를 줄였다. 회사 컴퓨터도 사십팔 시간 이상 열어보지 않았는데, 쓸데없이 불안한 마음은 있지만 꾹 눌러놓았다.
사람이 임의로 정한 '年'이라는 단위가 실제 삶에 있어 크게 무슨 의미가 있으려나 싶기도 하지만, 정해진 기간을 반추하고, 반성하고, 또 새로 계획하기에는 이보다 더 적절한 시기가 없다. 따라서, 향후 '一年'이라는 기간을 조금이나마 더 생산적으로 살아내기 위해, 다시 한 번 지난 한 해를 돌아보고 새로운 다짐을 해보려고 한다.
2020년 돌아보기
스타트업에서 성과내기: '스타트업'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현재 내가 일하고 있는 회사가 스타트업의 범주에 속하느냐- 라는 질문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엄밀히 따지면 나는 내가 근무하는 회사가 스타트업의 범주에 속한다고 본다("스타트업"에 대한 정의, 혹은 관련된 이야기는 추후 포스팅에서 조금 더 깊게 다뤘으면 한다). 스타트업은 잔인한 곳이다. 모든 노동자가 그렇겠지만 특히 스타트업에서는 회사가 성장하는 속도에 맞춰 그에 알맞은 성과를 보여줘야 하고, 나의 존재의 이유를 지속적으로 증명해야 한다. 보통 한국 대기업에서 부장급 정도 되었을 때 직면해야 하는 상황을 삼십대 초반부터 경험하게 해 주었다(개인적으로 이는 긍정적인 측면이라고 생각한다). 이 과정에서, 향후에도 계속 함께 할 동료들이 생기는 것과 동시에, 내 진심과 달리 상처도 주고받고, 멀어지는 사이도 생기기 마련이다. 이는, 당연한 말이지만 그렇게 유쾌한 경험만은 아니다(언젠가 맥주 한 잔 하면서 풀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한다). 여하튼, 주위 가까운 동료가 우스갯소리로 "넌 주식도 얼마 없는 게 roi도 안 나오게 무슨 일을 이렇게 열심히 일하냐"라는 말을 정도로 일도 죽어라 하고, 나름 유의미한 성과도 냈다고 생각한다. 돌이켜 보면, 여러 가지로 쉽지 않은 한해였다. 현 직장으로 이직하기 전에 운 좋게 여러 곳에서 오퍼를 받았는데, 연봉도 제일 낮고 여러 가지로 처우도 안 좋았던 이 곳을 선택했다(직장을 선택하는 것에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있겠지만, 나 같은 생계형 직장인에게는 연봉과 처우가 굉장히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나름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뿐인가, 대학생 때 이후 그리 즐기지 않고 있던 술자리를 다시 찾게 될 정도로 막판에는 스트레스도 굉장히 많이 받았던 것 같다(사실 여전히 많이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로 돌아갔을 때 동일한 선택을 할 것이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yes라고 대답할 것 같다. 그 정도면 나름 유의미한 2020년을 보낸 게 아닌가 싶다.
생산성 및 스트레스 관리: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제대로 실천은 하지 못했다. 내가 일을 컨트롤하는 것이 아닌, 조금씩 끌려다녔던 한 해였던 것 같다. 물론 절대적인 양이 많기도 했지만 이를 내 의지대로 조절하는 법을 조금 더 고민해봐야겠다. 사실 더 큰 문제는 스트레스 관리다. 최근 체중이 다시 조금씩 불어나서 왜 그럴까 생각해봤더니, 내가 기존에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이었던 세 가지가 다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는 야식이나 폭식으로 이어졌다. 코로나는 우리 모두에게 많은 것들을 앗아갔지만, 내겐 공교롭게도 주짓수, 라이딩, 종교생활 등 정신적 도피처 역할을 해줬던 것들을 가져갔다. 이제는 대체제를 찾아야 한다. 존경하는 하루키도 장편 소설 집필 중에는 다른 것들에 시선을 돌리진 않는 편이지만, writer's bloc에 빠질 것을 대비해 틈틈이 번역 작업 등을 하는데, 이는 뇌의 밸런스를 유지하기 위함이란다. 일은 중요하지만, 동시에 너무 함몰되지 않고 온연히 집중할 수 있으려면, 이를 간간히 대체할만한 것을 찾아야 한다. 한 해에 소진된 마음을 다시 채울 줄 알아야, 또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사람들: 20년에 가장 유의미한 것 중 하나는, 새로 알게 된 사람들이, 다양성이란 측면에서 굉장히 폭이 넓어졌다는 것이다. 업을 돌아봐도, 오전에는 동네에서 자영업을 하는 사장님을, 오후에는 글로벌 회사 임원을 만나 뵙는 등 새로운 경험들을 많이 했다. 이는 기존 직종 했던 회사들은 아무래도 나와 비슷한 결의 사람들과의 접점을 많이 발생시켜 줬다면, 현재는 새로 만나게 된 이들의 색을 굉장히 diversify 해준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결에 상관없이 모두에게 배우겠다는 마음으로 다가가겠다..
회복 탄력성: 이 역시 긍정적인 부분 중 하난데, 거절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첫 회사가 공기업이었던 만큼 갑>을>병>정에 사이클을 다 경험해 볼 수 있었다. 내가 거절을 할 때는 예의를 갖춰서, 반대로 당할 때는 낙담하지 않고 담대하게 next step을 고민하는 법을 배울 수 있게 되었다.
Karma: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카르마는 분명 존재한다는 느낌을 받은 한 해였다. For those around me, you know what I'm talking about.
2021년 다짐
부모님과의 접점 늘리기: 조금 더 잦은 빈도로, 정해진 시간에 정기적으로 부모님께 연락을 드리도록 노력할 것이다. 사실 마지막으로 부모님과 안부를 주고받은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새해 인사도 안 했다. 그렇다고 관계가 딱히 나쁜 것도 아니다. 가끔 영상 통화를 하면, 30분~1시간 가까이 이야기를 나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연락을 안 하는 불효자 때문에 부모님 역시 별 내색은 안하지만 섭섭하실 것이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나는 부모님과 약 10,000 km 거리에 살고 있다. 돌이켜 보면 아빠(삼십이 넘었지만 아버지라는 표현은 아직 어색하다)는 이민 생활 중에도 매번 정해진 시간에, 딱히 무슨 일이 있지 않아도 정기적으로 연락을 드렸다. 아빠가 할아버지에게 했던 것만큼, 나도 아빠한테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런 것부터 시작해보려고 한다.
책 읽고 독후감 쓰기: 20년에도 비정기적이지만, 꽤 많은 책이나 아티클들을 읽고 삼킨 것 같긴 한데, 그 직후 나름대로의 소회를 적어놓지 않으면 금세 까먹게 되는 것 같다. 요즘 한 가지 절실하게 느끼는 것 중 하나는, 무언가를 소화한 후에 이를 누군가에게 설명하거나 가르칠 수 있지 않으면, 이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부분이다. 활자를 소화한 이후에는 간단히라도 느낀 점들을 서술할 수 있도록 하겠다.
포스팅 남기기: 바로 위 bullet 하고 같은 결에서의 다짐이다. 사실 과거에 내가 쓴 글을 읽는다는 것은 꽤나 민망한 일이다. 무려 하루키 같은 작가도 이미 완성한 소설은 다시 들춰보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낀 점들을 정리하고, 또 나아가기에는 글쓰기만큼 좋은 촉매제 역할을 해주는 것이 없는 듯싶다.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포스팅해 볼 수 있도록 하겠다.
쓰다 보니 하루키를 여러 번 인용하게 되는 것 같은데, 글을 마무리하면서도 한번 더 그의 이야기를 빌리고자 한다. 하루키는, 좋은 소설가가 되고 안되고는 능력이 있고 없고 가 아닌, 글쓰기에 대한 본능이 있느냐의 문제라고 한다(본인을 글쓰기에 재능이 없는 사람으로 묘사한 부분은 일단 차치하도록 하자). 그가 쓴 수필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어 보면, 그 본능과 향상심을 충족하기 위해 일상성과 일관성을 지독할 정도로 추구한 흔적들을 찾을 수 있다.
최근의 나는 향상심, 혹은 잘하고 싶다는 욕구로 가득 차 있지만, 냉정하게 말하면 삶의 90프로는 운에 의해 결정되는 것 역시 사실이다. 하지만 그 나머지 10%를 잡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고,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유의미한 성과를 내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한다. 21년의 삶은 조금 더 다채로웠으면 한다. 조금 더 풍성했으면 한다. 조금 더 많이 배웠으면 한다. 조금 더 많은 인연들이 있었으면 한다.
별다른 노력 없이도 시간은 성실하게 흘렀고, 21년의 새해 역시 밝았다. 그다지 의미 없는 임의의 단위 일지 몰라도, 좋은 일로만 가득한 '一年'이 되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우연한 계기로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시간들도 그렇게 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