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aeyooe Feb 25. 2020

'작은 아씨들' 아씨가 아니라 작가입니다

<작은 아씨들>을 보고


영화의 시간은 원작과 다르게 흐른다

독자이냐 관객이냐에 따라 ‘작은 아씨들’의 조 마치에 대한 첫인상은 다를 것이다. 독자라면 크리스마스 선물이 없어 투덜대는 콩코드의 열다섯 소녀 조와, 관객이라면 뉴욕에서 신문사 편집장과 원고 계약 협상을 하는 성인 조와 만나기 때문이다. 시간순인 원작과 달리 영화 <작은 아씨들>은 조의 성년기와 유년기가 교차로 전개된다.


루이자 메이 올컷의 원작 소설을 살린 영화에서 이러한 시간적 구성의 차이는 특히 두드러진다. 익명에 적은 원고료지만 조가 작가로서 생애 첫 공적 성취를 이루고 뉴욕 거리를 내달리는 오프닝 시퀀스는 그레타 거윅 감독이 확실히 하고 싶은 조 마치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짐작하게 한다. 다시 말해 영화 <작은 아씨들>은 문학소녀 성장담이 아니라 여성 작가 탄생기가 된다.


출처 = IMDb <Little Women>


쓰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은 나의 자매들

작가 조 마치(시얼샤 로넌)에게 세 자매는 혈연관계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극 중 둘째인 조는 첫째 메그(에마 왓슨), 셋째 베스(엘리자 스캔런), 막내 에이미(플로렌스 퓨)를 주축으로 한 자전적 소설 「작은 아씨들」을 펴내면서 비로소 내 책이 있는 작가가 되기 때문이다. 작가 조와 자매들을 연결하려는 감독의 노력은 교외에서 가난하게 사느라 경험이 부족한 조가 어쩔 수 없이 잘 아는 자매들 이야기를 쓴 것이 아니라 매력적인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만든다.

    

감독은 조뿐만 아니라 메그, 베스, 에이미 모두를 생각과 영혼이 있고 재능이 넘치는 여성 캐릭터로 세공한다. 세 자매는 조의 언니 또는 동생으로서 그를 빛나게 하는 명품 조연 역할을 넘어 각자 지켜야 할 자기 삶이 있는 독립적 캐릭터로 격상한다. 조의 개입 없이도 메그의 결혼 생활, 베스의 취미 생활, 에이미의 유학 생활은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가 된다.           


출처 = IMDb <Little Women>


다 같은 마음일 리 없잖아

또한 감독은 특정 한 명을 편애하지 않고 모두가 동등하게 조와 일대일로 깊은 관계를 맺게끔 한다. 덕분에 조는 자매들과 관련된 쓸거리를 고루 수집한다. 조-메그, 조-베스, 조-에이미 각각의 관계에서 발견되는 조의 감정은 각양각색이다. 조는 자신과 함께 언니 그룹에 속하고 밀접한 예술 분야(연극배우)에 재능 있는 메그에게 동질감을 느낀다. 그런 메그가 결혼을 결심하고 독립하게 되자 조는 그에게 안타까움과 실망감 그리고 상실감을 동시에 느낀다.      


겨우 한 살 위지만 좀 더 성숙한 언니는 동생에게 가족을 갖고 싶은 내 꿈과 작가가 되고 싶은 네 꿈이 다른 것일 뿐 자신이 꿈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한다. 영원할 것 같았던 유년 시절이 끝나고 나와 닮은 형제자매의 독립은 너도 어서 달라져야 한다는 재촉처럼 들려 조바심이 든다. 그러나 곧 메그의 한 마디는 불안을 잠재운다. “이건 해피엔딩이야.” 스크린 밖 조와 같은 경험자에게도 효험이 있는 말이다.   

  

출처 = IMDb <Little Women>


애틋함은 베스와의 관계에서 조가 느끼는 지배적인 감정이다. 몸이 약한 베스를 집에서 교육하고 돌봐왔던 조는 그에게 강한 책임감을 느낀다. 뉴욕에서 콩코드로 돌아온 것도 베스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서다. 슬럼프에 빠져 있던 조에게 베스와의 바깥나들이는 터닝 포인트가 된다. 두 사람이 모래사장에 앉아 대화하는 장면에서 동생은 정 그러면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한번 써보라고 언니에게 조언한다. 그리고 그 말은 베스가 죽은 뒤에 효력을 발휘한다. For bath라고 적은 종이를 수호신처럼 세워두고 조는 데뷔작 「작은 아씨들」을 쓴다.


에이미에게 조는 강한 애증을 느낀다. 메그, 베스와 달리 에이미는 상처를 줄 줄 알며 유일하게 경쟁 관계에 있는 자매이기 때문이다. 에이미는 자기를 극장에 자기를 데려가지 않았다고 조가 가장 아끼던 원고를 태워버림으로써 그를 분노케 한다. 조 대신 대고모(메릴 스트립)의 유럽 여행 동반자로 선택받고 조가 사랑하는 로리 로렌스(티모시 샬라메)와 결혼함으로써 그에게 절망감을 안긴다. 자신을 자극하는 에이미 앞에서 조는 평소와는 다른 감정 상태에 놓인다. 이런 유별난 감정을 작가가 놓칠 리 없다. 막냇동생과 있었던 크고 작은 일은 분명 조의 소설에서 가장 감칠맛 나는 에피소드로 쓰였을 것이다.        


출처 = IMDb <Little Women>


남자들로 달라질 조가 아니지

작가 조 마치는 두 남자와의 관계에서도 끄떡없이 지켜진다. 그레타 거윅은 로리 로렌스(티모시 샬라메)와 프리드리히 베어(루이 가셀)에 의해 조 마치가 멜로 영화의 여자 주인공으로 돌변하는 참사가 발생하지 않도록 철통같이 각색했다. 로리의 제1포지션은 어디까지나 마치 집안의 남자 형제다. 그는 자매들에게 탈 것, 먹을 것, 즐길 것 등 자기가 좋아서 하는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으며 믿을 만한 내 편이 되어준다. 로리와 조는 꼭 붙어 다니지만 어떤 신체 접촉에서도 성적 긴장감은 발생하지 않으며 고백 장면에서조차 두 사람은 절교 직전의 친구 사이처럼 보인다.      


소꿉친구라는 연애의 걸림돌이 없는 프리드리히도 기회가 없기란 마찬가지다. 그는 조의 소설을 평가하고 그에게 셰익스피어의 책을 선물하는데 이는 모두 작가 조 마치에게 영향을 끼치는 행동이다. 후반부 프리드리히의 깜짝 방문은 두 남녀가 연인 관계로 발전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지만 곧 영화는 그 가능성을 자근자근 밟아 없앤다. 조가 프리드리히를 쫓아가 재회하는 장면은 이 영화가 유지해온 속도와 맞지 않게 빠르고 모호하게 편집되어 장면의 사실성을 의심하게 한다. 남성의 사랑을 갈구하는 조는 이 환상적인 장면 속에서만 존재한다.      


출처 = IMDb <Little Women>


「작은 아씨들」을 탈고한 조는 에이미에게 이런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를 누가 읽고 싶어 하겠냐고 말한다. 1800년대 말에 사는 그에게 나는 2020년의 반전에 대해 말해주고 싶다. 지금 여기에서는 가난이 지겹고 돈이 필요한, 결혼이 싫고 예술이 좋은 여자가 등장하는 이야기가 중요하다고. 작가 조, 당신의 이야기를 읽고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고.




[chaeyooe_cinema]

작은 아씨들 LITTLE WOMEN

감독 그레타 거윅 Greta Gerwig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의 볼에 입을 맞추고 싶다.
[★★★★]     



매거진의 이전글 '페인 앤 글로리' 덕분에 다시 쓸 수 있게 되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