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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말록 May 06. 2024

진실을 드러내는 틈, 연기법

연기사유의 올바른 방법




이원:분리
비이원:분리 그대로 분리 없음


여기서 모든 여정이 시작된다.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궁금증, 인생의 의미에 대한 의문, 영적 성취를 목적으로 하는 모든 종교적인 추구는 이렇게 두 줄로 간단히 정리된다. 이 구조 안에 다양한 신과 인간의 욕망이 형형색색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각자의 믿음에 따라 추구의 여정이 시작된다.  


관건은 이원에서 비이원으로의 전환이다. 여기서 말하는 비이원은 이원의 반대가 아리나 이원을 포함하고 넘어선 비이원이다. 간단히 표현하면 ‘사과’가 ‘사과 아닌 것들’과 다르지 않음을 보면 된다. 나와 네가 다르지 않음을 보면 되는 것이고 그렇게 사과라고 따로 구분되는 것의 진정한 본질을 보면 되는 것이고, ‘나’라는 분리의 착각을 포함하고 넘어서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그토록 삶이라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해탈이고 깨달음이며, 그것이 꿈에서 깨어나 존재의 실상을 바로 보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추구와 이야기들은 모든 것이 분리된 ‘이원’의 구조에서 벌어진다. 이 얘기는 우리가 만일 ‘이원’의 구조가 허구임을 깨닫는다면 그 모든 이야기는 한 여름밤의 꿈처럼 사라져 버린다는 의미다. 신도 악마도 삶도 죽음도 영적 탐구도 그 소중한 무엇도 개별적인 존재성을 유지하지 못한다. 우리는 허구의 이야기 때문에 공포를 느끼고 괴로워할 능력은 없다.


믿기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고작 이렇게 간단한 것을 위해서 손가락을 태우고 동굴에 들어가 십여 년을 수행을 하고 며칠 씩 잠을 자지 않고 참선을 하거나 스스로 문을 걸어 잠그고 수개월동안 수행한다고? 영적 스승의 옆에서 은총을 받겠다고 평생을 바치고, 속세와 인연을 끊고 수도원이나 산속에서 평생을 수행하는 것이 단지 이원에서 비이원으로의 전환을 위한 것이라고? 뭔가 심하게 균형이 맞지 않는다.


이상할 것은 없다. 의식의 성장 여정에는 이 보다 더 기이한 일들이 많이 벌어진다. 묘하게도 이 글을 읽어가는 과정 또한 그런 기이한 일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나는 지금 이원적인 언어를 사용해 엄청나게 분리된 개념들을 조합하며 이야기를 만들고 있는 것을 눈치챘는가? 그렇게 균형이 맞지 않는 추구의 몸부림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이원성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그렇게 분리라는 착각의 바탕 위에서 세워지는 허구와 같다.



연기적 생각
연기사유


어떻게 하면 그런 착각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사람들은 꿈에서 깰 방법을 고민하다 두 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다. 하나는 이 모든 분리를 만들어내는 근원을 탐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원적인 도구를 이용해 이원을 벗어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전자가 심법(선)이고 후자가 연기법(반야)이다. 지구상에 나타난 모든 수행은 이 둘 중 하나다. 나머지는 깨달음과는 상관없는 엉뚱한 길이다.


심법공부는 유튜브만 틀어도 쏟아져 나오니, 따로 언급을 하지는 않겠다.  다만 공부의 보완적인 측면이 분명 있으므로 연기법 공부의 특정 부분에서는 소개하고 다룰 예정이다.


연기법은 생각을 통해서 생각을 벗어나는 아주 특이한 공부 방법이다. 특이하다고 표현한 것은 그것이 실제로 유별나서가 아니라 현재의 공부 풍토가 워낙 심법 일색이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했다. 불교는 연기법이다. 이것을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불교의 시작인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그렇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부터 마치 ‘기억상실증’에라도 걸린 것처럼 연기법 수행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해는 간다. 생각으로 뺑글뺑글 돌다 보니 이론은 늘어가는데 실질적인 깨우침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생각으로 헤아리는 분별이 깨닫는 데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런 부작용 속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조사선이다. 이것은 일정 부분 옳은 판단이기도 하다. 환자에 따라서 다른 약을 쓰듯 생각(분별/이원)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에게는 분명 도움이 됐기 때문이다. 생각이라는 도구를 빼앗아 생각을 넘어 실상을 바로 보게 하려는 좋은 방편이다. 그런데 문제는 3일 처방해 준 그 약을 일 년 열두 달 모든 사람들이 획일적으로 복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연기사유는

어떻게 이원적 관점을

허무는가?


그렇다면 이원적 생각에서 출발하는 연기법은 어떻게 이원을 넘어 비이원으로의 전환을 촉발하게 되는 걸까? 일반적인 생각과 연기적인 생각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이것을 살펴보기 위해서 먼저 *연기사유의 흐름을 아주 간략하게 정리해 보자.


*연기사유: 연기법적 방식으로 생각하는 사유수행


1. 먼저 눈앞에 있는 대상을 하나 선정한다. 내 앞에는 커튼이 있다.  음... 커튼... 커튼. 만질 수도 있고 보이기도 하는 이 커튼이 꼭 실제로 존재하는 것만 같다. 커튼은 과연 무엇일까? (실체적 존재 관념* 자각)


*실체적 존재관념 : 대상이 다른 것들과는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착각된 생각


2. 커튼이 드러나게 된 원인과 조건들을 하나씩 떠올려 본다. 커튼은 공장, 원단, 직원, 목화, 태양, 공기, 기술자 등등의 원인과 조건들이 모여서 커튼으로 드러났다. 커튼이라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볼 때 커튼은 그저 커튼 이외의 수많은 원인과 조건들이다 - 생성적 측면의 본질 탐구


3. 이중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지금 바로 이 커튼은 이것이 아니게 되므로, 그 원인과 조건들이 바로 커튼의 본질이다. 맨 처음 내가 '커튼이 있구나'라고 생각했던 그런 커튼이 아니라 커튼은 원인과 조건들의 모임이라서 그것의 고유하고 변하지 않는 속성, 혹은 자체성이라는 것이 없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원인과 조건이 바뀌면서 커튼은 계속 변한다. 고정적 속성이 없기 때문에 계속 변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때 원인과 조건은 비단 커튼을 이루고 있는 요소적인 것뿐 아니라, 지금 커튼이 내 눈앞에 있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이다. 내부와 외부로 나눈다면 외부적인 것들, 즉 공기나 기압 사람의 노동력 혹은 누군가의 결정 등도 포함된다. 이렇게 원인과 조건에 따라서 계속 변하니, 지금 현재를 놓고 보더라도 커튼의 속성을 정의할 수 없고, 또한 과거에 생겨난 과정을 보더라도 커튼의 고유한 무엇이라는 것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4. 그러면 이것은 대체 무엇인가? 눈앞에 뻔히 보이고 만질 수도 있는 이것! 이때 비로소 "아!! 커튼은 내가 생각으로 만들어낸 고정적인 관념의 커튼이 아니구나. 진실로는 커튼이라고 할 것이 딱히 없이 비어있구나!!"라는 각성이 일어나게 된다.


5. 개별적인 존재관념이 떨어져 나간 커튼은 그 고유한 자체성이 없으므로 그것 아닌 것들과 모양으로는 구분되지만 그 속성으로는 구분되지 않는다. 모양은 분명 다르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그 다른 것들이 결코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이원성의 균열이다. 이것과 저것이 분명 다르다고 알고 있었는데, 그 근간이 무너지는 것이다. 이것을 보통 ‘이름’이 사라졌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것은 마치 꿈을 꾸면서 꿈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이 환영과 같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6. 모양으로 구분되지만 개별적인 존재감이 사라지면 그것을 드러나게 하는 바탕이 자각된다.


7. 커튼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분별하고 존재성을 부여한 그 생각 때문에 ‘커튼 아닌 것’과의 분리가 일어났음을 깨닫는다. 이 분리가 바로 ‘존재감’의 근원이다. 커튼=커튼 아닌 것들의 실상을 마주한다.


8. 계속해서 사유를 이어나가면, 가장 강력한 이원적 분리의 대상인 ‘나’에게 초점이 맞춰진다. 커튼이 분명 비어있음(공)을 본다면 ‘나’역시 커튼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한꺼번에 통찰해야 하지만 이것이 한 번에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나’라는 존재감의 뿌리는 매우 깊지만 이것 역시 이원성의 구조 안에서 일어나는 착각일 뿐이다.  


9. 지속적인 연기사유를 통해 나’라는 것 역시 ‘나’ 아닌 것들과 다르지 않음을 확인하면 이것이 비로소 고통에서 벗어나는 ‘해탈’이며 깨달음이라고 말한다. 엄밀하게는 이것이 공부의 끝은 아니지만 끝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삶을 위한 깨달음은 ‘해탈’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사유의 과정을 다시 한번 요약하자면 이렇다.


1. 대상에 대한 실체적 관념을 자각

2. 대상의 본질을 찾으려는 노력 1 (생성적 존재 측면)

3. 대상의 본질을 찾으려는 노력 2 (지금 이 순간의 존재 측면)

4. 존재성 찾기 실패

5. 대상의 존재관념이 사라짐

6. 경계는 있으나 존재감이 사라짐

7. 커튼 = ‘커튼 아닌 것’ > 이원성 구조의 붕괴 > 바탕이 드러남

8. 연기사유의 대상을 ‘나’에게로 이동

9. 반복적인 연기사유를 통한 해탈



잘못된

연기사유의 방법



1. 요소론적으로 이해하고 사유하는 경우

2. 인과적으로 이해하고 사유하는 경우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이원적 생각 관점에서 시작하는 연기사유이므로 처음에는 무조건 이원적인 관점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러다 보니 위에서 연기사유를 실체적인 방식으로 변형해서 이해하는 일이 벌어진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1. 원인과 조건들을 ‘요소’ 적으로 파악하는 경우2. 시간의 흐름에 따른 인과로 이해하는 경우다.


1. 요소론적인 오류 : 커튼의 원인과 조건을 커튼을 구성하는 원료나 요소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러한 생각은 이미 요소나 원료를 실체시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므로, 실재하는 것들이 모인 실재 = 커튼, 따라서 커튼은 눈에 보이듯이 실재한다는 쪽으로 잘못 흘러간다. 요소적 근원을 찾아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나와서 '커튼'이라는 생각(실체적 존재 관념)의 허구성을 보는 것이다. 요소적 근원을 찾아들어가면 결국 원자 전자 쿼크와 같은 고정적인 요소에서 사유가 멈추게 된다. 이것은 ‘커튼'을 여전히 이원적 기반 위에서 분석하는 것이다. 바른 연기사유는 '커튼이라는 생각' 혹은 '커튼이 존재한다고 믿는 관념'을 깨는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2. 인과법적 오류 : 연기법은 인과법이 아니다. 인과법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A가 원인이 되어 B가 일어난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사과 씨앗이 원인이 되어 사과가 열리는 것은 인과법이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시험에 합격하는 것도 인과법이다. 인과법은 이렇게 시간의 선후관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연기법은 선형적인(시간적인) 1대 1의 관계가 아니다. 시간적인 전후가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사과의 원인과 조건 중에 사과씨가 분명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지금 현재의 관점에서 살피는 것이지, 과거로부터 시간의 흐름을 따라 쭉 이어지거나 영향을 받는 식의 사유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인과 결과를 동시의 관점에서 사유하는 것이다. 인과법은 인과 간의 시간 간격이 존재하지만 연기법은 그런 시간 간극이 존재하지 않는다. 관점은 언제나 지금 살피고 있는 대상에 머물러 있다. 또 하나 차이점은 연기법에서 말하는 원인과 조건이라는 것은 1:1의 대응이 될 수가 없다. 사과 한 알의 원인과 조건을 단지 씨앗이나 사과나무로만 국한할 수 없는 까닭이다. 지금 이 순간 이 사과 한 알이 의지하고 있는 모든 것이 바로 원인과 조건들로 다뤄진다. 그러나 인과법은 나중에 연기법으로 포함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이 대략적인 연기법 공부의 흐름이다. 매우 이성적인 방식을 통해서 이성을 포함하고 뛰어넘는 매우 특별한 공부방법이다. 연기법은 완벽하게 짜인 이원적인 각본에서 우연히 발견한 틈새와 같다. 원래 이원적 사유는 꼬리에 꼬리를 물어 끝이 없이 반복되는 과정을 거치는 구조로 만들어졌지만 뜻하지 않게 허상의 틈을 비집고 실상이 드러나는 기회가 발견된 것이다.


사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런 허구의 증거들이 수 없이 드러나 있다. 세상은 그런 의심스러운 모습을 버젓이 드러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우리를 속일 수 있는 것은 세상이라는 무대가 완벽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이원적 의식이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 투성이지만, 전혀 이상하지 않은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이원의식이다. 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가? 왜 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가? 왜 대상은 그것 아닌 것들에 의지해서만 세상에 드러나는가? 왜 세상은 이것과 저것, 밝음과 어두움 등 쌍으로만 드러나는가? 왜 사람은 늙는가? 무한처럼 아득한 의식과 공간은 왜 이모양인가? 왜 태어나는가? 왜 죽는가? 이 모든 의문이 바로 이상한 세상의 본래모습을 나타낸다.




지금까지 간략하게 연기법 공부를 훑어보았다. 혼란스럽고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요약하자면 핵심은 간단하다. 존재하지 않던 모든 것이 과연 어떻게 존재하게 됐는지 살피는 것이며 그 와중에 과연 ‘그것’이라고 할 만한 무엇이 존재하는지 진심으로 탐구해 보는 것이다.


심법 공부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런 방법으로 과연 공부에 도움이 될까 의문의 들 수 있다. 분별(생각)을 피하는 공부 풍토에서 연기법 공부는 매우 거리가 멀어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우 잘못된 고정관념이다. '연기법'의 가장 큰 장애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불교는 연기법이다. 이 사실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벌어지는 현실은 매우 안타깝다. 그러나 앞으로는 이성을 퇴화시키는 공부 방법 대신 이성을 자극하고 발달시키는 방법으로 공부의 흐름이 바뀔 것이다. 그 중심에 연기법이 있다. 이것은 나의 주장이 아니라 의식의 발달과 진화의 흐름이 그렇게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짧은 글에는 사실상 연기법 공부의 모든 뼈대가 담겨있다. 연기법 자체가 복잡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 더 할 말도 없다. 그러나 공부의 과정에서 마주치게 되는 다양한 어려움이 있을 수 있으므로 도움이 필요하거나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언제든지 댓글로 남겨 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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