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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말록 May 21. 2024

존재의 커트라인 찾기

#깨달음 #비이원 #연기사유 #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것을 보통 존재한다고 믿는다. 이는 우리가 임의로 세운 기준이다. 존재의 정의를 논하면 복잡해지지만, 이 글에서는 '무엇인가가 있다' 정도로 간단히 약속하고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다. 존재하는 것은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동안 우리는 물리적인 것을 존재한다고 생각해 왔다. 정신적인 것도 삶에 영향을 미치지만, 만질 수 없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존재로 간주하지 않는다. 물리적인 상호작용이 존재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쓸모와 존재


돌멩이를 맞으면 아프다. 그래서 돌멩이를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은 유용하다. 돌멩이가 어디서 떨어지는지 미리 관찰하고, 피해야만 고통을 피할 수 있다. 이원적 의식이 필요한 이유다.


이원성 안에서 존재를 구분하고 대응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렇게 사는 것이 문제가 없다고 해도, 삶에 대한 의문과 두려움은 여전히 남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의문과 두려움을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이원적 능력이다.)


망치는 못을 박는 데 쓸모가 있다. 쓸모 있는 망치는 나에게 실체적 존재로 느껴진다. 내 주변의 모든 것은 나에게 중요하다. 쓸모 있거나 쓸모없거나, 좋거나 싫거나, 위험하거나 안전해서 중요하다.


쓸모 있는 것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유용함과 존재는 관련이 없다. 우리는 유용하니까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실수를 범한다. 만질 수 있고 먹을 수 있고 볼 수 있으니까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존재를 밝히기 위해서는 유용성을 배제해야 한다. 왜냐하면 탐구 대상은 망치뿐만 아니라 그 망치를 유용하게 느끼는 나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망치와 내가 한 통속이기 때문에 나의 유용함이 존재의 조건이 될 수 없다. 꿈을 예로 들면, 꿈속의 모든 대상은 꿈속의 나에게 유용하다. 꿈에서 사과를 먹었다면 그 사과는 꿈속의 나에게 유용하다. 그러나 이런 유용함이 사과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꿈속의 나 역시 사과와 마찬가지로 꿈속에 등장하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시간과 존재


유용성을 존재의 판단 기준에서 제외하면, 그다음으로 살펴볼 부분은 시간이다. 사과가 일정 시간 동안 관찰되고 인식된다면 우리는 그것을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무언가가 지속된다는 것은 존재의 조건 중 하나다.


우리 집 앞에는 10년 된 작은 빌딩이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그 건물이 사라졌다. 건물주가 재건축을 위해 빌딩을 허물었기 때문이다. 건물이 분명 있었는데 사라졌다. 있었는데 없어졌다. 빌딩은 지난 10년 동안 존재했던 것일까? 대부분은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건물은 크고 단단해서 쉽게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빌딩과는 달리 아주 짧은 시간 나타났다 사라지는 대상을 상상해 보자. 이를 블링크라고 부르자. 블링크는 약 0.5초 동안 반짝이며 나타났다 사라진다. 하루살이보다 수명이 짧다. 블링크는 존재하는 것일까? 짧은 순간이지만 어쨌든 나타났다 사라졌기 때문에 0.5초 동안 존재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이번에는 이 블링크가 0.01초 동안 나타났다가 다른 모양으로 계속 바뀐다고 생각해 보자. 0.01초 동안 동그라미였다가, 다음 0.01초 동안 네모로 바뀌고, 또 0.01초 동안 세모로 바뀐다. 0.01초라는 시간은 우리가 그 모양 하나를 구분해서 인식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다. '블링크가 나타났다!’라고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미 블링크는 다른 모양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존재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라고 정의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블링크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정의를 내리려는 순간 이미 다른 모양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10년 동안 있었던 건물과 블링크의 존재 시간인 0.01초의 중간 어디쯤에 존재와 비존재를 가르는 경계가 있는 것일까? 분명 그 둘을 가르는 경계가 있어야 할 텐데 그 기준점은 어디일까? 이는 마치 검은색과 흰색을 구분할 때 어디서부터 흰색이고 어디서부터 검은색인지 그 경계를 찾아보는 것과 같다. 겉으로 보기에는 뚜렷하게 두 색을 구분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대충 보면 그렇다. 



그러나 아래의 그림처럼 그 경계 지점을 확대해 보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그 어떤 경계를 마주한다고 해도 그 경계의 모습을 확대해 보면 아래와 같은 그라데이션 형태로 발견된다. 이것은 마치 0과 1 사이의 무한 수가 존재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우리의 눈과 같은 관찰도구의 능력에 따라 흑과 백의 경계는 무한히 확장된다. 이 사실을 골똘히 생각해 보면 시작과 끝이 있는 듯 보이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시작도 끝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조금은 기이한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시작과 끝 그 사이의 무한 공간에 갇혀버리기 때문이다. 긴 시간과 짧은 시간 사이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그와 같은 무한의 블랙홀과 같다. 상황이 이러하니 그것을 나누는 경계를 찾겠다는 야심 찬 포부는 너무나 당돌한 도전인 셈이다. 


길다는 것은 얼마를 길다고 할 것이며, 짧다는 것은 또 얼마를 짧다고 할 것인가? 누가 그 기준을 정할 수 있겠는가. 긴 시간과 짧은 시간을 나누는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10년 동안 모양이 유지된 것과 0.01초 동안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 사이에는 존재와 비존재를 나누는 경계가 있을 수 없다. 건물이 존재한다면 블링크도 존재하는 것이고, 블링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건물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모양이 유지되는 시간에 따라 존재와 비존재를 나누는 것은 불가능하다. 


유용함과 지속성을 제외하고 나면, 남은 것은 대상의 독립성이다. 즉 다른 것과 상관없이 고유함을 유지하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지 여부다. 



연기와 존재


사과 한 알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다고 해보자. 분명 내 눈앞에 동그랗고 붉은 사과가 놓여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볼 수도 만질 수도 먹을 수도 있다. 사과는 일정시간 모양을 유지하고 있으므로 우리에게 유용하며 일정 시간 동안 관찰 된다. 마치 실제로 사과가 눈앞에 존재하는 듯 보이며 내가 사과를 보는 것처럼 당신도 똑같이 그 사과를 볼 수 있다. (간혹 내가 사과를 보지 않으면 사과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알려 주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가르침이다. )


그냥 대충 보면 인식되고 상호 작용 할 수 있으므로 마치 사과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우리가 살펴봐야 할 것은 그 사과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돌이켜 보는 것이다. 사과는 사과 아닌 다른 원인과 조건들로 인해서 생겨났다. 사과가 생겨나기 위해서는 씨앗과 사과나무와 물과 태양과 공기와 적당한 온도 등등 엄청나게 다양한 원인과 조건들이 필요하다. 사과를 꽉 채우고 있는 것은 사과가 아닌 다른 원인과 조건 들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사과는 사과 아닌 다른 원인과 조건들이 돼 버린다. 사과 아닌 다른 원인과 조건들은 이렇게 멈춰서 내 눈앞에 드러나 있지만 반면에 사과라고 하는 것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저 생각이고 개념일 뿐이다. (연기법) 


유용성이 존재의 기준이 될 수 없다. 시간의 길고 짧음이 존재의 기준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지금 나타난 현재 모습 그대로 또한 원인과 조건 그러니까 그것 아닌 것들에 의해서 드러났으므로 그 또한 고유한 존재 성이 없다. 그 마저도 순간순간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고 있으니 그 무엇도 붙들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여기서 모든 가상의 이야기는 끝이 난다. 유용성과 시간 그리고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모든 것들의 존재 성이 사라짐으로 개념으로 만들어진 구속의 이야기는 끝이 나고 자유가 남는다.   


무엇을 존재라고 할 수 있으며, 무엇을 존재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지, 우리는 그 경계를 찾으려고 할 때마다 언제나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모양은 따로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깊고 꾸준하게 연기 사유를 계속하면 분명 이원적 관점에서 벗어나게 된다. 신비를 쫓을 것이 아니라 당신의 이성을 따라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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