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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이을정 Aug 07. 2024

도라지꽃이 3년이 되면 그 운명은, 쓰디 쓴 결론이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운동이 숨쉬기라는 데, 요즘 들이쉬는 숨에 어깨가 결린다. 내쉬는 숨을 모아 단어를 말하는 것조차도 힘이 든다. 몇 주 전에 왼쪽 성대가 마비가 되면서부터 숨쉬는 것조차도 힘이 들어졌기 때문이다. 들어가고 나가는 관문을 관장하는 성대의 왼쪽 문이 고장이 난 것이다. 이비인후과에 가서 후두 내시경을 했을 때 보이는 성대의 크기는 손톱만한 것 같은데, 그 작은 틈새로 빠져나가는 숨이 의사소통을 어렵게 한다. 물을 마실 때는 조금씩 끊어 마셔야지 목이 마른다고 마음껏 벌컥  벌컥 마시면 사례에 걸려 결국 기침이 터져나온다.


쇳소리처럼 목을 쪼여서 내뱉는 말은 엄마와의 안부 전화조차도 두렵게 만든다. 그것은 엄마의 딸에 대한 사랑이겠지만, 어릴적부터 부쩍이나 기관지가 좋지 않아 기침을 달고 지내던 나에게 기침과 쇳소리는 엄마를 걱정시키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전화벨이 울린다. 수신자를 보니 엄마이다. 벌써 7번째 전화이다. 전화를 받을지 말지 망설여진다. 분명 지금 목소리로 전화를 받으면 도라지가 될지, 홍삼이 될지 뭐가 될지 모르는 검정 쓴 물을 택배 상자로 보내올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요즘 우울해 하는 엄마, 내가 전화를 안 받으면 무슨 일이 있을까봐 불안해 하는 엄마이기에 나는 전화를 결국 받았다. 왼쪽 성대의 마비로 말을 할 때 성대가 다 닫히지 않아 바람이 새어나가 쉰 목소리로 조음을 만들어 단어를 완벽하게 발음할 수 없는 목소리로 ‘응, 엄마!’라고 전화를 받았다. 역시 예상했던 반응이다.


“목소리가 왜 그래? 어디 아픈 거야?”


나는 괜찮다고,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좋아질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제대로 나와 수화기의 스피커까지 닿지 않아, 모든 말을 다 전하지 못한 채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끊자 마자 다시 엄마에게 전화가 온다.


“말하지 말고 듣기 만 해. 내가 지난번에 준 도라지 달인 엑기스 있지?” 


이번에는 도라지다.     


구옥에서 지내던 어릴적 침대가 아닌 구들장에 이불을 깔고 자던 그때, 겨울이면 코끝을 얼어붙게 만드는 외풍으로 나는 기침을 항상 달고 살았다. 기침 소리 한번은 엄마의 심장을 방망이로 두드리는 것만큼 엄마의 걱정을 달고 왔다. 그러면 엄마는 도라지를 밤새 다려 도라지물을 우려내 나에게 마시게 했다. 어린 입맛에 도라지 물은 쓰고 역했다. 엄마는 그런 돌봄으로 마음을 전했고, 엄마의 그 마음은 나에게 쓰게 다가왔다.


서울에 올라온 이듬해 여름, 성북구의 하수 시설이 좋지 않아 큰 비가 내리자 반지하인 나의 자취방에는 물이 하수구를 타고 역류해 수해를 입었다. 밤새 내린 비가 방보다 높이 있는 화장실에서부터 물을 뿜어내 결국 방까지 밀고 들어와 장판과 벽지, 중고책방에서 사다 날은 나의 책으로 축축하게 스며들었다. 

그 다음날은 거짓말처럼 쨍쨍한 햇빛이 여름날을 자랑하고 있었다. 방 안의 젖은 장판을 들어내 밖으로 내와 쨍쨍한 햇빛에 바짝 말렸다. 처음 겪는 수해는 나에게 즐거운 놀이같았다. 빳빳하게 마른 장판을 다시 들고 반지하 방에 다시 깔았다. 시멘트 틈새로 숨어 들어간 빗물은 아무리 난방을 해도 도망가지 않고 반 지하 바닥에 자리 잡았다. 그 위로 장판을 갈자 다시 축축하게 장판이 풀이 죽었다. 

그렇게 나는 그 장판 위에서 다시 나의 20대의 삶을 살았다. 날이 갈수록 벽지에는 푸르스름한 곰팡이가 올라왔다. 그래서일까? 기침이 조금 더 심해졌다. 엄마는 자신의 곁에서 지내지 못하는 딸이 염려되어서인지 조금 값이 나가는 홍삼 다린 물을 택배로 서울로 올려보냈다. 그러나 철없는 나는 엄마의 마음을, 택배 상자를 버리듯 버려 버리고, 쓴 홍삼물을 냉장고 제일 낮은 곳에 쳐 박아 넣어놓고 잊어버렸고, 다음 해에 일년이나 지나버린 홍삼 다린 물을 하수구에 모두 버려졌다.


닫히지 않는 성대는 한달이 되어 가는 지금도 여전히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말하지 말고, 너는 듣기만 해. 뭐 필요한 거 있어? 요즘 열무가 맛있던데 그거 담가서 보내줄까? 뭐 필요한 거 있으면 바로 엄마한테 말해야 해.”


성대마비는 말을 하는 것만 어렵지 어디가 아프거나 식욕이 사라지지도 않는다. 나는 엄마가 보지 않는 곳에서 더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엄마의 잔소리가 없으니 먹고 싶은대로 먹는다. 이제는 사회인으로 돈을 벌기에 예전보다 더 좋은 걸로 먹고 다닌다. 엄마는 결혼 안 한 미혼의 딸이 마음에 쓰여 돈을 아껴서 죽을 때 주고 간다며 집 앞 텃밭에 농작물을 심어 그걸 뜯어 먹고 산다. 그래서 나는 좋은 걸 먹을 때마다 죄송한 마음이 든다.

사실 기침을 해도 엄마의 걱정과 쓰디 쓴 엄마의 정성이 담긴 물을 마시지 않아도 되는 지금이 참 마음이 편하기까지 하다.

4월의 환절기를 넘어가는 요즘, 일교차가 심해지다 보니 아침에 자주 기침이 난다. 엄마와 떨어져 산 지 20년이 넘었지만 나는 기침을 할 때마다 엄마의 염려와 도라지 물을 떠올린다.

부모님이 이사한 집 앞 텃밭에 엄마가 도라지를 심은 지 올해 3년이 된다. 도라지의 보라색 꽃을 보며 예쁘다며 사진을 찍었던 게 코로나가 시작되기 한 해 전이니까, 꽉 채운 3년이 되어간다. 도라지는 3년이 지나야 캐서 먹을 수 있다는데, 올해에 그 도라지를 내가 다 먹게 되는 건 아닌지 괜시리 신경이 쓰인다. 엄마에게 무슨 핑계를 대야 할지 벌써부터 궁리하느라 거짓말이 늘어간다.


그리고 며칠 전 성대가 마비 된 지 30일이 되던 그날, 마비가 조금 풀렸다. 예전의 꾀꼬리 같던 목소리로 회복된 건 아니지만, 톤이 높아지고 앞으로 뻗어나가는 소리로 식당 종업원을 ‘저기요?’라고 부르면 전달될 정도가 되었다. 그 전에  답답하던 그 상태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나는 기쁜 마음에 엄마에게 제일 먼저 전화를 드렸다.


“엄마! 내 목소리 어때? 잘 들려?”


다행히 아직 엄마는 한의원까지는 가지 않았다. 내가 시간이 해결해 준다고 좀 기다리라고 성대에 힘을 꽉 주고 쇳소리로 힘주어  말했는데, 다행히 이젠  말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번 성대 마비 증상은 나에게 감사의 마음을 일깨워주기까지 했다. 말을 한다는 것,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라, 감사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직 높은 도의 소리는 나지 않고, 진성의 목소리로 엄마를 부를 수는 없지만 숨을 쉬어도 어깨가 결리거나, 단어 하나 말하고 숨을 한번 쉬고 하지 않아도 된다. 문장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이렇게 감사할 수 있는 일이었단 말인가!

엄마와 통화 전에 나는 물을 마셔 목을 축이고 기침 한번을 미리 해서 목을 간지럽히는 가래를 긁어낸다. 엄마와 딸의 사이도 전화 치레를 차려야 한다. 딸은 엄마의 염려가 두렵고, 엄마는 딸의 걱정이 염려스럽기 때문이겠지. 나의 기침은 엄마의 마음을 불안하고 염 려스럽게 만드는 알람음이다. 여전히 엄마에게  ‘아가’로  불리는 마흔의 아가인 나는 엄마를 신경 쓰이게 하는 존재이다.

괜시리 목이 더 간지러운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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