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들의 이미지』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여문주 옮김
발제 : 장성권 | 24.08.27.(화)
[해제]
『민중들의 이미지- 노출된 민중들, 형상화하는 민중들』(이하 : 『민중들의 이미지』)는 디디 위베르만의 ‘역사의 눈’ 6권의 총서 가운데 네 번째로 출판된 책이며, ‘역사의 눈’은 조르주 바타유의 소설 『눈 이야기』를 오마주 한 제목이다. 여기서 눈은 이미지로 대체됨으로써 이미지는 눈에 보이는 수동적 대상에서 벗어나 스스로가 바라보는 능동적 주체가 된다. 즉 ‘역사의 눈’은 민중처럼 역사에서 배제된 것을 바라봄으로써 비가시적인 것에 대해 형상을 부여해 가시화하는 것이 바로 ‘역사의 눈’의 ‘집요한 사명’이라고 말한다. 이 책의 이미지론은 모리스 발랑쇼나 조르주 바타유가 말한 ‘인류’와 근접한, 보다 보편적인 개념으로서의 민중과 관련된 이미지론을 개진하고 있다. ‘미디어의 시대’에 민중이라는 개념은 부서지고 조각나 사라지고 있듯이 오늘날 역사적 과거로서가 아니라 현재의 보편적 주체로서의 민중과 민중의 이미지를 사유한다는 것, 즉 시대착오적일 수 있는 작업으로, 이 시대의 ‘이미지 정치학’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미술의 역사에서 지배 계층만이 인간의 형상화로 초상화의 대상이었다. 미술사에서 이미지에 대한 민중의 권리 부재는 민중의 정치적 참여 권한의 부재와 다름없었다. 이 책의 첫 문장 “민중들이 노출된다”(Les peuples sont exposés)는 오늘날 민중들은 “결핍 노출되어”있거나 “과잉 노출되어” 미디어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반복적으로 노출됨으로써 스테레오타입이 되었다. 이러한 결핍과 과잉 사이에서 비가시적인 존재(민중들)는 그들의 미힉적, 정치적 재현 속에서 그들의 존재 자체가 사라질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태는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기술적 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사진이나 영화와 같은 복제 기술에 의해 예술작품의 ‘제의가치’가 ‘전시가치’로 전환된 (상품, 물신화)시대, 벤야민의 ‘전시(Exhibition)’개념은 보다 근본적이고 존재론적인 의미로서 ‘밖으로 드러냄’을 뜻하는 노출에 가깝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은 국가 체계(헌법 등)에 노출시키지만 국가라는 전체성(주의)은 민중들을 잉여들, 노출되지 않는 존재들로 은폐한다. 여성과 남성, 정규직과 비정규직, 정상인과 장애인 등 국가가 통제하고 관리하기 용이한 범주에서 해체·분류되어 민중들은 단순히 국가의 종속되는 관계로 남는다. 또 다른 한편에서 우리는 소셜미디어(SNS) 시대를 살고 있지만 SNS에서 정작 자유로운 의견과 개성을 전시할 것을 강요받는다. 다시말해 노출-흥행의 지표로 수치화되어 그 자체로 하나의 권력이 된다. 결과적으로 소수의 흥행과 다수의 구경꾼을 만들어내는 방식이다. 그런데 소셜미디어의 재현에서 심각한 문제는 SNS에서 다수의 민중들의 목소리와 얼굴이 배제되고 있다는 점을 스스로 망각한다는 점이다.
디디-위베르만의 이미지론에서 ‘이미지로 사유’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는 숭고한 미술이 아닌 하잖고 평범해 보이는 것들, 시간이 지나면서 파괴되고 불완전하고 파편적인 형태로 잔존하는 것들을 살핀다. 이를테면 1944년 8월, 존더코만도라 불렸던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의 절멸 수용소에서 찍은 네 장의 사진과 같은 것들이다. 이 사진들에서 디디-위베르만은 『인류』(L'Esp?ce humaine)의 저자 로베르 앙텔므(Robert Antelme, 1917~1990)의 진술을 토대로 “상상 불가능한 것의 감정을 거쳐 획득한 상상력”을 통해 역사적 사실을 알 수 있게 하는 (잔존하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이 상상력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참담한 상황을 세상에 알리고자 했던 사람들의 위험과 고통을, 그들과 같은 인간, 즉 인류로서 함께 나눌 수 있는 공감적, 실천적 능력이기도 하다. 또한 디디-위베르만의 이미지 사유는 벤야민의 역사 개념, ‘성좌’ 이미지처럼 이미지를 통해 민중들에 대한 사유를 ‘반딧불 = 민중들’의 이미지로 표현했다. 반딧불은 매우 작고 연약한 빛을 발하는 것이자 우리와 가까운 거리에서 갑자기 산발적으로 나타나 사라지길 끝없이 반복하는 빛이다. 디디-위베르만은 이러한 이미지-반딧불-민중의 조합을 만들어냄으로써 민중에 대한 사유로 귀결된다. 즉 강한 서치라이트(국가, 권력 등)가 닿지 않는 곳에서 산발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반딧불처럼, 억압박고 내쫒긴 존재이지만 모든 곳에서 늘 살아남아 있는 존재로서 민중들은 잔존의 “영역”과 “조직망”(이미지 아틀라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는 잔존의 “초영토성(탈영토성)”, “주변화”, “저항과 반항적 자질이 표명된다”고 역설한다. 이러한 잔존하는 이미지의 개념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증상’개념과 바르부르크의 ‘잔존’개념을 끌고와 정치적 차원에서 이미지(론)를 해석한다. 즉 민중들은 잔존의 이미지,‘모든 것을 무릅쓰고’ 살아남은 이미지들이다.
디디-위베르만은 바르부르크의 미술사적 실천에서 ‘시대착오’라는 시간적 모델과 벤야민의 ‘변증법적 이미지’라는 미학적 모델을 무기삼아 역사의 시간성을 여러 시간들의 무질서한 동시적 ‘뒤얽힘’의 복잡성으로 새로운 시간 개념을 제시한다. 다시말해 시대착오적인 시간성은 ‘비연대기적인’ 혹은 ‘탈 연대기적인’(anachronique)시간성이다. 또한 시대착오라는 시간적 모델에 기초한 미술사는 역사화의 작업, 즉 애도나 추모의 작업, 더는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작업을 과거로부터 다시금 불러와 해석한다. 이를 디디-위베르만은 “시대착오가 모든 동시대성을 관통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잔존’의 존재 방식을 통해 역사의 진정한 시간성을 밝혀내고자 한다.
Ⅰ. 휴머니티의 편린
민중들이 노출된(exposés)다. 민중들은 항상 사라질 위험에 노출된다. 그렇다면 민중들이 나타날 수 있는 형상을 갖추기 위해서는 무엇 해야 할까? 민중들은 타인의 시선 속에서 존재하는 대상, 프리모 레비(Primo Levi)는 자신의 아우슈비츠 이야기(에세이)에서 “한 사람으로 존재하다”라는 말은 한 사람(친구)로 보길 희망한다고 귀결할 수 있으며, 그리고 ‘언젠가 다시 보길 희망하기’, 언젠가 그를 다시 보길 바라는 기대의 극단에 민중을 만들 가능성을 내포한 뜻이다. 그렇다면 한 사람을 보길 희망하기 위해 어떻게 조직해야하는가? 첫째, “발언의 권리를 인정하기”, 둘째, “타자 인식의 필요성”이다. 즉 타자를 유사한 자로서, 그리고 말하는 자로서 알아본다는 것을 전제한다. 디디-위베르만은『인류』의 저자 로베르 앙텔므의 글을 통해 “숨막힘을 거쳐 획득한 발언의 필요성과, 상상 불가능한 것의 감정을 거쳐 획득한 상상력의 필요성을 연결”에서 민중들의 잔존(발견)의 필요성을 말한다.
흐릿해진 민중들, 사람들은 초상권을 말한다. 로마시대 이마고(imago)는 ‘조상의 초상’이었다. 즉 이미지(이마고)는 존엄성(dignitas)과 결부되어 있었는데, 자크 랑시에르에 따르면 군사 공포정치의 지배하에서 사라질 위험에 노출된 민중들의 이미지는‘초상권’을 매개로 이미지의 사유재산이라는 질문(것)으로 전환되어 오늘날에는 사적 소유권에 따라 그 어떤 주체도 이론적으로 자기 자신을 소유할 권리가 없다는 점이다. 벤야민은 「사진의 작은 역사」에서 이미지의 가독성에 관한 질문으로 이미지와 말을 상호 동요의 관계, 즉 비판적 관계에서 이미지에 어울리는 말을 부여했을 때, 아니면 저절로 소환될 때, 이미지와 말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으로 축소된다. 결과적으로 이미지의 가독성은 이미지와 언어와의 관계성을 맺을 때에만 이미지가 자신의 주제를 정확하게 노출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에른스트 프리드리히(Ernst Friedrich)가 출간한『전쟁과의 전쟁!』에서 전쟁의 폐허와 상해를 입은 사람들의 사진에서 ‘투쟁하는 민중’으로 표기된 문구(표제)는 민중들의 노출과 의미를 과장하려는 말들에 대해 우리는 그런 사실을 외면하고 싶어 한다. 이를테면 오늘날 ‘피플(people)’로 영어화된 단어는 진짜 민중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것을 지시하는 경향이 있다. 즉 부자나 유명인사처럼 ‘이미지가 있는 사람’들이 이미지를 소유하고 상징하는 목적에 가장 부합하게 관리한다. 이를 상표 이미지, 자기 이미지라는 단어로 사용하면서 본질적 의미로서 민중(peuple)을 지워버렸다. 또한 빅토르 클렘페레(Victor Klempere)의 저서 “LTI(제3제국의 언어)”는 전체주의의 언어(나치즘)가 연설문, 전단지, 포스터나 깃발뿐만 아니라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용례)에서 기계적이고 무의식적인 방식으로 적용되었던 낱말, 관용어, 문형을 통해 진정한 독일성(germanité)를 관찰하고 기록했다. 디디-위베르만은 언어에 저항해야 한다고 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사물’과 구별되는 ‘사건’이라는 개념에서 생성과 변이의 관점에서 새로운 의미, 새로운 사유 가능성의 의지를 여는 것, ‘의미의 논리’에 대해 뒷받침해 전달한다. 최근에 에릭 아잔(Éric Hazan)의 LQR(제5공화국의 언어)에서 ‘완곡어법’, ‘전도된 부정’, ‘의미론적 탈수’를 분석하면서 LTI의 현대적 버전을 진단했다. 이처럼 이미지의 습관, 말의 습관에서도 민중들은 사라질 위험에 처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언어 안에서 저항해야’하며, 민중들이 다시 나타날 조건을 재구성해야 한다.
나타남(apparition)이라는 질문은 우리가 민중들의 본질을 규정하는데, 그들의 외양, 그들의 이미지를 우선시하도록 유도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나 아렌트는 “정신의 삶”이라고 명명했던 외야의 사유를 “존재함과 나타남이 일치한다”고 말한 것처럼 인간적인 것은 “모두 나타난다는 공통점과 [그것을]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고, 냄새 맡는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단언했다. 즉 존재와 외양(apparence)=나타남(apparition)은 하나다. 그렇다면 민중들이 정치적으로 나타나기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아렌트는 얼굴, 다양성, 차이, 간극 등 네 개의 패러다임을 환기 시킨다. 첫쨰, ‘얼굴’은 민중들의 추상이 아닌 그들 자신의 얼굴을 제시하고 노출하는 것이다. 둘째, ‘다양성’은 그 어떤 개념과 종합할 수 없는 유일성으로 이뤄진 무한한 군중이다. 이에 우리는 인간들, 민중들이라고 해야한다. 셋째, ‘차이’는 상이한 존재들의 공동체와 상호성을 생각한다는 것은 결국 정치적 공간 속에서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전체성과 개별성 사이)이다. 마지막 ‘간극’은 바르부르크가 간극의 도상학이라고 명명한 ‘사이 공간’을 탐험하는 것, 벤야민이 말했던 ‘야만’과 ‘문명’의 끊임없는 충돌(재몽타주)과 차이에서 간극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1959년 아렌트는 레싱상 수상 담화에서 “어두운 시대” 휴머니티의 관한 질문으로 민중들의 삶, 공공의 삶이 조직될 때 그 반대편에는 어두운 시간(그늘)이 드리워지고 있다. 인간들 또는 민중들을 희생하고 인간과 민중을 앞세울 수 있는 사회는 사실 비인간성 그 자체이다. 단수로서의 인간, 즉 하나의 종(種)과 기준만 살아야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고유의 인간성(humanitas)에 대한 실천은 얼굴, 다양성, 차이, 간극을 만들어낼 때 나타난다. 그것은 “정치적 삶의 세계와 투쟁의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정치적 삶이 비인간성을 토대로 조직될 때, 그들 자신을 차이, 간극 속에 위치시킨다. 그래서 휴머니티의 편린은 폐허 또는 억압의 한가운데서 모든 것을 무릅쓰고 나타나게 하는 일이다. 이 무릅쓰고 나타나는 사건은 ‘연민의 정치학이자 우정(philia)의 정치학에서 발견된다. 우정의 순수성은 그릇된 죄의식 없이, 그릇된 우월감이나 열등감 없이 유지되는 모든 곳에서, 비인간적으로 되어버린 세상에서 휴머니티의 한 편린이 완성된다.
사라질 위험에 노출된 민중들을 목도할 때이다. 저항 행위가 이뤄진다. 필리프 바쟁(Philippe Bazin)의 <얼굴> 이라는 시리즈 작업에서 초상화나 예술작업과 상관없이 ‘인간적 양상’이라는 장기 요양원에서 ‘죽음을 맞이하러 입원한 노인’의 사진을 기록한다. 인간성의 ‘양상 검토’는 임상이나 진단으로만 발견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반대로 현상학적인 것이다. 바쟁은 이를 ‘셔터 소리’에서 타자를 인식하기 위한 입문적 여행이라고 묘사한다. 셔터 소리는 시선의 사진적 장치를 사용해 임상적 눈과 그의 필요한 기술적 관리를 듣는 눈으로 변형시키기 위한 실험인 것이다. 바쟁은 이를 “그들의 눈에서, 그들의 얼굴에서, 나는 나 자신을 인식하는 법을 배웠다.”고 전했다. <도판1-3>에서 서로 상반되는 두 개의 차원, 하나는 요양원이라는 제도적 공간으로서 장소 상태와, 노인환자의 피부의 연약함, 주름의 선, 피로 등 시간의 상태이다. 바쟁은 장소의 상태는 “청결한 영역”, 몸이 고통 속에 구겨 넣어진 듯한 “불결한 영역”사이에서 충돌을 암시한다.
바쟁의 사진 <도판1-3>에서 휴머니티의 편린은 저항 또는 생존의 방식으로 나타난다. 첫째, 몽타주로서 확장된 프레임, 그것은 환자의 오그라 붙은 몸, 즉 요양 시설의 의료 공간에서 불구가 된 삶의 잔재에 해당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 공간이 견디기 힘들다는 것을 목도하게 된다. 둘째, <도판1-2> 필름 포맷(24x36mm)에 해당하는 수축된 프레임, 아직 살고자 하는 힘과 이미 죽고자 하는 힘이 타인을 향한 생명의 긴장과 자신을 향한 죽음의 침잠 속에서 사방과 싸우는 얼굴이다. 이미지의 프레임이 머리를 제외한 얼굴만 잡아내고 있어, 우리가 보는 얼굴보다 크기 때문에 얼굴을 단순화하는 작업이며, 시간의 운동(chronos)이다. 바쟁의 작업은 윤리적 차원을 주지하는데, “사진의 윤리란, 내가 촬영하는 사람에 대한 나의 책임을 말한다. 내가 찍는 얼굴 각각의 사람에게 수직화된 인간 존재의 존엄성을 되돌려주고자 하는데 있다.” 이런 의미에서 바쟁의 <얼굴>시리즈는 벤야민이 표명했던 “이름 없는 자들을 노출하라”는 요청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바쟁은 1988년 <신생아>시리즈에서 <노인>시리즈 만큼 감동적이었다. 이 두 경우 모두 인류에의 귀속이라는 ‘초상’프로젝트에서 중요한 문제를 부각한다. 이는 바쟁이 “인간 각자의 얼굴에 존재하는 동물성을 보여”줘야 한다는 주장이다. 신생아 또는 노인의 이행의 형태를 통해 인간되기를 고찰하고자 한 것이다. 바쟁이 말한 “동물성”은 아마도 최저 생명선에 집결된 인간성을 뜻한다. 바쟁의 사진을 통해 크리스티안 볼레르는 “모든 외설이 폐지된” 태도의 존엄성으로 본다. 디디-위베르만은 바쟁의 작업에서 인류라는‘인간적 양상’의한 정치적 비전으로서의 민중들을 어떻게 형상화 할 것인가를 자문한다.
Ⅱ. 그룹 초상
브레히트는 1926년 『전쟁과의 전쟁!』사진집을 “휴머니티의 성공적 초상”이라고 말하면서 그 폭력적 차원을 강조하고자 했다. 바쟁의 <신생아> 시리즈에서 얼굴들의 공동체로서 휴머니티의 초상은 결국 그룹 초상이라는 구성 방식으로 존재하게 된다. 크리스티안 볼레르는 바쟁의 사진 작업을 세계의 첨예화(Radicalisation)를 표현을 제안한 바 있다. 디디-위베르만은 첨예화(성)은 인간적 양상의 근원인가? 아니면 휴머니티가 미치지 못 하는 곳인가?라는 질문에서 바쟁이 시리즈와 유일성의 표방을 통해 이 딜레마를 정식화 했다. 바쟁은 “나는 출생부터 죽음까지, 우리 사회, 우리 세계의 상태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통해 보여주려는 야망을 갖고 있다. 나는 항상 시리즈로 작업하는데, 다수의 사람을 사진 찍을 때 그들의 피할 수 없는 유일성(아렌트의 얼굴, 다양성, 차이, 간극)이 저절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휴머니즘’의 단어에서 두 가지 대칭적 오류를 범한다. 첫째는 모든 ‘의식 있는 과학’의 패러다임과 전통적 가치의 전수라는 편파적 주장이다. 둘째는 이른바 ‘인문’과학의 역사에 대한 조사를 통해 이 단어를 편파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바쟁의 작업, 얼굴과 휴머니티의 재현은 우리가 고대와 르네상스 사이의 휴머니즘이라고 부르는 것과 근본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고대의 인문주의의 초상은 민중들의 형상화를 두 번 거부했다. 초상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만 이미지로 존재할 수 있는 것(로마에서는 권력과 혈통이 필연적이었다)이었다. 따라서 초상은 인물 숭배로서 얼굴의 특징에 초점을 맞춰진다. 인문주의로부터 형성된 개체성(군주, 독자적 주체)이라는 지배적 범주로 휴머니티를 의미하게 된다. 따라서 인문주의 초상은 처음에는 정치권력을 가진 인물만 추종하면서, 그 다음에는 오직 개인적 존재(메디치 가문 등)의 심리적 내면성에만 집중한다. 이런 이유로 화가들은 ‘자유 예술’의 특권을 통해 자신의 자화상을 그릴 수 있는 특권을 획득하게 된다. 한편 종교화는 클로즈업에 의한 극적인 과정의 모델에 따라 자화상이 프레임화 된다.
이렇게 우피치 미술관의 자화상 갤러리처럼 그룹 초상화는 철학자의 흉상을 모방한 인문주의의 유명인사, 정치권력과 형톨 사이의 있는 왕조 초상화와 함께 시작된다. 우리는 장르로서의 그룹 초상화의 등장과 동시에 종으로서의 휴머니티가 이상하게도 뒤로 물러났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위엄 있는 배경과 검정색의 주름장식 등의 의복과 함께 연출된 그룹 초상화는 정치권력, 사회적 특권의 가치만을 보여줌으로써 초상화가 갖는 특징이 없다는 것이다. 더불어 그룹 초상은 렘브란트에 의해서 <도판2-5> 노골적 유일성(해부된 시체)에 노출되어 역사의 눈(이미지)로서 유일한 얼굴이 포착된다.
19세기 군중의 출현은 군중을 조사하기 위해 용모(facies) 추출과 재범자의 얼굴을 가려내기 위한 그룹 초상의 기술이 발명되었다. 이를 임상의학적 초상과 인상기록적(signalétiques) 초상으로 만들어냈다. 파리 경찰청에서 근무한 알퐁스 베르티옹(Alphonse Bertillon)에 의해 개발된 인상기록적 초상(범인 몽타주)의 프로토콜은 얼굴의 프레이밍, 입술, 귀, 턱, 코와 같은 세부를 사진으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범인 몽타주는 『아우슈비츠의 앨범』에서 대략 학살을 기록하고 있는 모든 사진을 나치 관점에서 죽음으로 내몰렸던 떼거리의 초상으로 기획된 그룹 초상으로도 나타났다. 반대로 레니 리펜슈탈의 <의지의 승리>에서는 사진의 구도(대각선 상향 촬영)가 신격화 되며, 무엇보다 독재자의 얼굴과 몸에서 구현된다. 이러한 구도는 무솔리니의(benito Moussolini) 사진에서처럼 토마스 홉스의 책 리바이어던의 표지처럼 절대 군주로 구현한 방식과 동일하다. 이처럼 스탈린주의적 도상학은 미국의 군국주의 도상학에도 동일한 전략이 사용된다. 유진 골드벡(Eugene O. Goldbeck) 사진가는 패거리의 초상을 제작하는데, 그것은 스탈린주의자나 모택동주의자들의 퍼레이드처럼 개개인의 구성원을 전체적 배치를 통일시킨다.
이미지는 프레임(cafre)이라는 장치를 수반한다. 이 두 단어는 이미지의 존재에 내재하는 형식적 필연성과, 권력 수행에 내재하는 제도적 구속을 동시에 의미한다. 예를 들어 <도판2-8> 익명의 군중으로 이뤄진 광경, 노동자들의 초상, 그리고 이들이 받은 훈장이 공존하는 프레임에는 당의 간부들이 정한 결정에 의거해 이뤄진다. 제도적 장치 없이 광학적 장치가 불가능한 것처럼, 정치적 프레임 없이 미학적 프레임 역시 불가능하다. 미셀 푸코의 ‘생명권력’에 개념처럼 1976년 푸코는 “내가 보기에 19세기의 중요한 현상 가운데 하나는 권력에 의한 삶의 통제이다. 말하자면 살아 있는 존재인 인간에 대한 권력의 장악, 내가 인류의 ‘생명정치’라고 부르게 될 일종의 생명 현상의 국가 관리(통제장치, 감옥, 병원, 정신병동)이다.” 특히 요한 카스파 라바터(johann kaspar lavater)가 체계화한 관상학적 초상화를 계승한 사진은 ‘인류의 생명정치’의 시각적 장치, 인간적 양상의 생명정치학이라 명명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과거 의사였던 바쟁은 자신의 사진 작업은 의학 수업과 연관되어 있는데, 근접성은 정확성에서 필요한 것인데, 정확성은 인간의 몸과 관련되기 때문으로 거리는 객관성에 필요한 것이다. 이 거리는 환자를 진찰할 때 청진기를 대는 거리와 관련되어 있다고 한다. 또한 바쟁의 모든 사진은 24x36의 직사각형 포맷으로 촬영되는데, 이 정사각형 포맷은 지엽적으로 보이는 모든 것을 제거하는 프레임이다. 나아가 바쟁은 얼굴 시리즈에서 공간 시리즈로 확장되었는데 이는 바쟁이 육체적 양상의 문제와 사회적 공간의 문제(노인, 신생아, 병원)를 함께 바라보는 방식에서 시작된다. 1986년 어느날 바쟁은 아를르의 레아튀 미술관에서 피카소가 그린 얼굴 시리즈를 발견했을 때, 그는 불현 듯 노인들의 얼굴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도판2-12>처럼 피카소의 매체와 노인들의 피부에 새겨진 세월의 흔적 사이에서 하나의 당혹스러운 관계를 보았던 것이다. 디디-위베르만은 이를 인간적 양상에 대한 시간의 작업이자 종의 작업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