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임 경찰 301기 드뎌 나가다
이들의 궤적을 추적하고 싶다
by polisopher Apr 29. 2020
남녀 합반
중앙경찰학교에 남녀 합반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경력채용자들 즉 심리상담, 과학수사, 법학 전공자, 무도 전문가들처럼 같은 분야인 데다 성비 인원에 맞게 선발된, 더욱이 일반 공채자들에 비해 극히 소수여서 특채자들만큼은 합반이 오히려 자연스러웠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1천7백여 명 중 여성 5백여 명과 나머지 남성들이 한 데 어우러진 경우는 처음이 아닌가 싶어 학교 측에서는 큰 도전으로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해보지 않은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게 마련이지만 생각해보면 현장은 남녀 경찰이 어우러져 지혜를 모아 도움을 주고 사건을 해결하는 곳이다. 그렇게 보면 지금까지 경찰학교의 교육체계는 현장과는 다소 괴리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남녀 칠 세 부동석의 잔재인지 남녀 간의 차이를 인정한 맞춤형 교육을 위한 것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301기는 합반 1기라는 역사를 그렇게 또 썼다.
그렇게 약 넉 달을 보냈다. 초기 어색했던 그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누나ㆍ오빠ㆍ동생 하면서 친해져 갔고 또 커플이 자연스럽게 맺어지기도 하면서 섭리에 맞게 흘러갔다. 반면 학급에 따라 융화가 잘 되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이 선명했는데 이는 '수업의 기교'가 넘을 수 없는 벽처럼 여겨졌다. 연장선상에서 서로를 의식해서 일까 질문이든 뭐든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들도 전에 비해 적었다. 남녀 합반, 여러 숙제들을 남겼지만 수업의 다양성과 현장감을 생각해보면 바람직한 시도였다고 본다.
자신과 타인 돌아보기
지난번 글에서 언급했듯이 코로나 탓에 301기는 유례없는 수도원 생활을 하게 되었다. 2-3주까지야 애써 미소를 띠우며 여유를 보여주기도 했지만 외출 외박 금지가 연장되어감에 따라 피로와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이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 이때 장기화 조짐을 예측한 이들, 아울러 이런 상황마저 '한 때'라고 인식한 후보생들은 마음을 추슬러나갔다.
주말 외박이었다면 주로 쾌락으로 소비했을 시간에 독서ㆍ영화보기ㆍ운동 ㆍ 음악ㆍ드론 등 취미와 동아리 활동 등 자신의 라이프와 동료들에게 몰입하면서 정신적 육체적으로는 물론,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고 하는 이가 많았다. 어쩌면 그들은 두 번 없을 '절호의 폐쇄적 삶'이라고 생각을 고쳐 먹었던 모양이다.
특별한 사람들과 만남
개성이 강하여 경직된 관료시스템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우려되던 어떤 후보생은 초반부터 주 특기인 드론과 영상 촬영을 통해 두각을 나타낸다. 여러 동료들에게 도움과 즐거움을 주며 동시에 경찰학교 생활의 재미와 감동을 카메라에 담아내더니 오 마이 갓! UCC 경연에서 대상을 거머쥐는 성취를 이루게 된다. 일 낼 줄 알았는데 역시나였다.
또 한 명의 특별한 사람, 앞서 자랑을 늘어놓았던 뮤지컬 배우 출신 후보생은 역할극 동아리를 성공적으로 이끌더니 발표대회인 루키 출사표*에서 2위, PST**에서 상금을, 문화의 밤***에서 뮤지컬 연출을 맡으며 자신의 재능을 유감없이 뽐냈다. 그것도 모자랐는지 밖에 나가서 함께 꿈을 키울 멤버들도 이미 구성했다며 비전을 선보이기도 하였다. 아.. 현기증 난다. ^^
바리스타 2년에 선생님 경력까지 있는 후보생은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으며 동료들을 챙기고 수업을 챙겼으며 교수들과 교류했다. 그러면서도 피곤한 기색을 1도 드러내지 않았다. 어딜 가나 빛과 소금 같은 존재는 있게 마련인데 그에게 그런 작위가 어울릴만하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교육장으로 그 바쁜 와중에도 루키 출사표 입상, 문화의 밤의 중추적 역할을 해내며 끼를 감추지도 않았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제목이 갑자기 떠오른다. 괴물.
수많은 사람의 존재감을 뒤덮을 만큼 역량이 뛰어난 사람을 간혹 만나곤 하는데 한 후보생은 분위기 메이커로서는 단연 최고라고 할 수 있었다. 여러 사람이 모인 곳, 각자 살아온 환경ㆍ가치관 따위가 전부 다를 텐데도 이 후보생의 에너지는 유난히도 밝았던 모양.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학급원들의 성향이 그에게 닮아가고 있었다고 느꼈다. 깜짝 놀랄 이벤트로 냉탕 온탕을 자유자재로 오가게 만드는 반전의 귀재.
이들 외에도 마음을 움직여 주었던 여러 명의 얼굴이 지금 지나가고 있다.
브런치, 연결의 끈
기대는 하고 있었으면서도 설마 했던 일이 생겼는데 브런치를 보던 어느 후보생이 내 글을 발견하고 찾아온 것이다.
브런치의 네트웍, 글의 힘을 새삼 느끼는 순간이었다. 책 읽기를 좋아하고 글쓰기에 관심 많다던 그는 브런치 등재 작가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그 사이 통과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추카추카)
솔직 당당하게 그리고 시종일관 진지한 모습으로 자신의 삶과 경찰을 성찰하던 그, 주제넘지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경관님은 이미 충분히 깨어있는 분이니 자신을 믿고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펼쳐나갔으면 합니다."
소회
3개월을 온전히 학교 안에서 보낼 수밖에 없었던 이들은 남달리 자신에게 집중하며 동기와 깊은 유대관계를 유지했으며 누구보다 학교 구석구석을 활용하고 누렸을 것이다. 불편함이 큰 이들도 있었겠으나 꽤 많은 후보생들이 이를 넘어 주어진 삶에 의미를 부여하며 보냈던 듯하다.
문득, 무인도에 혼자 남게 되어 외로움에 절망하지만 시행착오 끝에 불을 피워내기도 하며 삶의 의지를 발휘하던 톰 행크스****의 모습이 떠오른다. 301기는 어쩌면 이 무인도 같은 곳에서 그들 안에 잠자고 있던 가능성을 그렇게 깨우고 발현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자연스레 따라오는 의문, 1년, 5년 뒤 과연 이들은 어떤 경찰을 하고 있을까?
ㆍ대한민국 파출소 경관ㆍ
■ 표지 사진은 영화 캐스트 어웨이 한 장면(출처=네이버)
■ 주
*루키 출사표 : 중앙경찰학교의 대표적 행사로서 학교장과 동료들 앞에서 어떤 삶을 살아왔고 왜 경찰이 되었으며 어떤 경찰이 될 것인지 출사표를 던지는 장, 세바시를 연상하면 됨
**PST : 경찰 체력인증 프로그램 엄청 빡쎔!
***문화의 밤 : 경찰 학교생활 대미를 장식하는 순간, '대학 축제'라고 이해하면 됨
****톰 행크스 : 미국인의 무인도 탈출기를 그린 영화 캐스트 어웨이의 주인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