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봄’이 천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분노유발’ 영화가 이렇게까지 잘 되다니 놀라운 일입니다. 특히 군사정권을 경험해보지 못한 20~30대 사이에서 ‘n차’ 관람까지 돈다고 하니 놀라움이 더했습니다. 관객들은 돈과 시간을 써가면서까지 ‘스트레스’를 받아냅니다. 자유로운 한국으로서는 상상 불가한, 판타지 같은 전체주의 한국의 실존여부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세대를 넘어선 '스트레스'는 ‘정의의 수호자’들이 정의를 어떻게 무너뜨렸는가에 대한 주권자로서의 ‘책임추궁’입니다. 전두환과 장태완, 스크린의 공간을 두 동강 내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들입니다. 전두환의 정의는 박정희의 죽음 뒤 혼란에 빠진 나라의 질서를 세우는 일입니다. 그것은 헌법을 유린해야만 가능한 질서 수립입니다. 전두환의 정의는 부조리합니다.
<영화 ‘서울의 봄’>
장태완의 정의 또한 전두환 못지않게 나라의 질서를 세우는 일입니다. 수도경비사령관이었으니 그의 최우선 임무는 서울의 안전에 있었던 것입니다. 적들의 서울 침공을 막아내고 섬멸하는 일입니다. 그 적이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상관이고 직속 부하였더라도 상관없습니다. 그것은 헌법상 규정된 국군의 임무입니다. 장태완의 정의는 이치에 맞습니다.
전두환과 장태완을 보면서 서로의 정의가 충돌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두 사람 모두 대한민국의 국군인데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생각건대 장태완이 ‘정의’에 종속되어 있었다면 전두환은 ‘정의감’에 사로잡혀있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장태완의 행위는 국민 모두가 바랄만했지만 전두환은 자신과 일당이 바랄만한 짓을 했던 것입니다.
전두환과 장태완의 대비를 통해, 정의와 정의감에 대한 의미가 조금 더 다가왔기를 바랍니다. ‘서울의 봄’이 천만 이상의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는 것은 일종의 ‘자기 처벌’입니다. 주권자로서 국가폭력이 판치도록 내버려 둔 데 대한 가책이죠. 그러므로 납득하기 어려운 ‘내돈내산짜증’은 책임을 다하지 못한 시민의 ‘도착적 행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정의감에 사로잡힌 강민창, 정의에 속한 안병하
장태완-전두환의 정의 논쟁에서 정의로운 국군의 본연의 임무와 군인의 자세를 보았습니다. 사실 군에 친숙한 용어는 저로서는 정의보다는 충성입니다. 경례 구호 ‘충성’을 많이 들어서 일 겁니다. 한편 정의는 범죄자를 심판하는 경찰에서 주로 씁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그러한 취지로 정의를 본 것 같고요. 그렇다면 ‘경찰’의 정의는 어떨까요?
사회악을 방어하고 제압하는 것이 정의라면 형식적으로 경찰은 정의의 사도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개인의 ‘정의감’에 비롯된 것인지 국민의 ‘정의’에 따른 것인지 따져보면 판단이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정의를 향한 열정이 사사로운 욕망 성취에서 비롯되었을 때, 그 정의는 자신의 배를 채우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한 군인을 통해서 보았기 때문이죠.
이제 경찰의 정의에 말해야 합니다. 아무래도 두 군인의 바통을 이어받을 수 있는 인물들이 나와 줘야 공평할 것 같습니다. 공교롭게도 전두환-장태완과 같은 시간과 공간 위에 강민창-안병하라는 두 명의 경찰이 있었습니다. ‘서울의 봄’의 스크린이 비추지 않는 어딘가에서 그들은 각자 자신에게 다가올 운명을 맞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영화 ‘1987’, ‘택시운전사’>
잘 알려진 대로 안병하 전남경찰국장은 광주민주화 운동과 함께 평가됩니다. 그는 80년, 전두환에 반대하며 시위에 나선 광주시민들을 무참히 폭행하고 살해한 계엄군과 달리, 신군부의 강경진압 방침을 거부하고 심지어 유혈사태를 막기 위해 경찰무기를 다른 지역으로 분산시켜 버립니다. 반면 87년 경찰의 총수였던 강민창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축소 은폐합니다.
법에 따라 경찰은 국민의 생명, 신체, 재산을 보호합니다. 그렇다면 강민창은 ‘정의감’에 복종한 셈입니다. 국가 이익이라는 명분아래 무고한 시민을 죽이는데 공범 역할을 했습니다. 안병하는 ‘정의’에 따랐습니다. ‘4.19’ 때의 무도한 경찰로 돌아갈 수 없다며 시민을 보호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신군부에 의한 고문 후유증으로 순직하고야 맙니다.
정의와 정의감이 하나 되었을 때
지금까지의 논의대로라면 ‘강민창-안병하’를 ‘전두환-장태완’ 위에 중첩해 볼 수 있습니다. 즉 전두환=강민창은 정의감에, 장태완=안병하는 정의에 따랐다고 하겠습니다. 역사를 재평가하고 있는 관객의 ‘증오-숭고’는 대립 인물들 위를 그대로 덮습니다. 그것이 ‘스트레스’로 돌아왔고요. '짜증'을 사서 견디는 이들은 ‘정의감’ 때문일까요? ‘정의’ 때문일까요?
이제 저들의 대립적 구도를 자신에게 돌리는 일만 남았습니다. 즉 나의 위치는 어디인가요? 이미 확인한 사람도 있겠지만 대개는 일관성 유지에 애를 먹겠지요. 정의를 추구했다가 현실에 부딪혀 우회하는 식으로요. 하지만 꺾이지 않고 조금만 더 밀고 나가면 경지에 이릅니다. ‘나의 정의감’이 ‘보편적 정의’에 맞아떨어졌을 때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