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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패티 May 18. 2024

조지 오웰 읽기:나는 왜 쓰는가(2)


화요독서모임은 그동안 화요일 저녁 9시에서 11시까지 열었다. 그러다 올해 초 나와 한두 명의 사정이 생기면서 화요일 모임이 어려워 요일을 목요일로 바꿨다. 그게 문제인 듯하다. 참석하는 회원이 많이 줄었다. 이 책 역시 쉽게 읽히는 책이 아니어서인지 참석자는 더 많이 줄었다. 평소 토론이 활발했던 회원의 침묵이 길었고, 토론 역시 중간중간 끊겼다. 의욕만 앞섰나 반성하는 시간이었다.



스페인내전을 돌이켜본다


앞서 '스페인의 비밀을 누설한다'와 큰 줄기에서 겹치는 내용이 있는 글이다. 오웰은 이 글에서 특히 오디언스의 태도를 지적한다. 정치적 편향에 따라 정보를 믿는 태도를 비파하는 글이다.


“그런데 당시에도 그렇고, 그 이후로도 줄곧 인상적이었던 것은 잔학행위를 믿고 안 믿고 하는 것이 순전히 정치적인 편향에 따라 좌우된다는 사실이다. 적의 잔학행위는 믿으면서 자기편의 것은 믿지 않는 것이다.”


이 구절을 읽을 때 떠오르는 사람이 몇몇 있었다. 그들 중 몇몇은 오해나 무지가 불러온 오판이었음이 드러나고 인정되어지기도 하고, 아직도 누구도 쉽게 말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 중 한 사람이 시인 김지하였다. 김지하는 한창 때는 군부독재에 저항하는 저항시인으로 진보예열의 추앙을 받았다. 붙잡혀가서 옥고를 치르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몸이나 정신이 망가졌다고 알려진다. 


그러던 그가 대표적 보수신문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는 내용의 칼럼을 기고한 후 세평이 크게 달라졌다. 좌파들은 그를 변절자라고 손가락질했고, 우파는 그를 이용했다. 시인 사망 후 그와 동시대 작가로 살았던 김훈, 황석영 같은 작가들이 이 사건을 회고하는 글을 기고한 게 있.   (김훈 ‘죽음의 굿판’ 칼럼 언급하며 “김지하, 죽음 만류한 것” / 황석영 “사회와 불화한 채 떠나 안타까워”)


오웰이 지적한 비판은 지금은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고 본다. 모든 사람이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세상에 대해 나서서 비판하는 사람은 드물다. 몸을 사린다. 사리게 된다. 후과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행락지


이 글은 현대 사회에서 행락(쾌락)이 가지는 의미를 설명하며, 사람들이 즐기는 행락에서 드러나는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현대 문명 세계를 사는 사람들이 행락(쾌락)에 대해 갖고 있는 관념(---)은 초대형의 댄스홀이나 극장, 호텔, 레스토랑, 호화 유람선 같은 데서 이미 부분적으로 구체화된 바 있다. (---) 호화 유람선이나 리용 코너 하우스(런던 최대 레스토랑)에 가보면  미래 낙원이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감을 잡을 수 있다. 분석해 보면 그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아무도 혼자 있는 법이 없다.

2. 아무도 자기 힘으로 뭘 하는 법이 없다.

3. 어떤 종류의 야생 초목이나 자연 경관도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4. 빛과 온도는 항상 인공적으로 조절된다.

5. 아무도 음악소리를 벗어날 수 없다."


음악의 기능이 생각과 대화를 막는 것이며, 음악이 새소리나 바람소리 같은 자연의 소리를 차단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물질 세계를 탐사하면서 스스로에 대한 탐사는 하지 않는 다는 점 등을 지적하면서 행락이란 이름으로 의식을 파괴ㅐ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결이 조금 다르지만 통하는 점이 있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호캉스라는 말이 있다. 바캉스와 호텔을 섞어서 만든 합성어로 호텔에서 보내는 바캉스라는 말이다. 우리들은 누가 호캉스를 간다고 하면 부러운 눈으로 보거나 당연히 최고의 휴식을 취하고 올 것으로 예상한다. 그러나 서울에서 최고급 호텔로 호캉스를 간 사람은 대부분은 전혀 쉬지 못하고 온다고 한다. 이유는 호텔에서 제공하는 서비스를 다 사용하려다 보니 오히려 고된 휴식을 된다는 것이다.    



정치와 영어


이 글에서 오웰은  언어의 의도적인 왜곡과 모호성으로 우리의 생각과 관점을 왜곡한다고 비판한다. 


오웰의 글쓰기를 칭찬하는 사람들, 글 좀 쓰는 사람들이 배우고 싶어하는 글쓰기에 대한 오웰의 철학이 담긴 글이다. 그가 주장하는 글쓰기 원칙을 어떤 이는 책상 머리에 붙여 놓고 글을 쓴다고 한다.


1.익히 봐왔던 비유는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

2. 짧은 단어를 쓸 수 있을 때는 절대 긴 단어를 쓰지 않는다.

3. 빼도 지장 없는 단어가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뺀다.

4. 능동태를 쓸 수 있는데도 수동태를 쓰는 경우는 절대 없도록 한다.

5. 외래어나 과학 용어나 전문 용어는 그에 대응하는 일상어가 있다면  절대 쓰지 않는다.

6. 너무 활당한 표현을 하게 되느니 이상의 원칙을 깬다.


오웰의 이 원칙들은 글쓰기의 기본 중의 기본이다. 오웰은 "정치적 언어는 거짓을 사실처럼 만들고 살인을 존중할 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헛소리를 그럴듯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고안된다."고 말한다. "대량 해고"인데 이를 "고용의  유연화"라는 미명으로 "구조조정"이라고 표현한다든가, "최저임금제"는  거꾸로 "최고임금제"로 되어 그보다 많아서는 안되는 것으로 쓰이는 것들이 그런 예이다.  

 

이런 말을 하고 글을 써댔으니 당대 지식인이나 권력층은 오웰을 몹시 불편하게 여겼을 것 같다.



어느 서평자의 고백


 "추우면서도 공기는 탁한 침실 겸 거실. 담배꽁초와 반쯤 비운 찻잔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글, 처음부터 웃음이 새어나온다. 서평자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내 이야기 같아서다. 


"그중 세 권은 그로서는 전혀 무지한 분야라서 적어도 50페이지는 읽어봐야한다. 그래야 저자뿐만 아니라(물론 저자는 서평자의 습성을 훤히 알고 있다) 일반 독자에게까지 자신을 다 드러내 보이는 황당한 실수를 피할 수 있다." 기어이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오웰은 소설과 르포 외에도 엄청난 양의 에세이와 서평을 남겼다. 특히 서평 쓰는 일은 생업이면서 작가적 공부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의미있다. '어느 서평자의 고백'은 그런 그가 서평 쓰는 행위의 무의미함을 지적하면서 회의하는 글이다. 요지는 '우리의 인식과 달리 좋은 책이라고 불릴만한 것은 얼마 없으며, 심지어 모든 책이 서평을 받을 가치가 있다는 생각 자체가 무리'라는 것. 대부분의 책은 형편없고 쓸모없는 것들인데,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여 책을 더 많이 사 보게하려고, 그럴듯하게 글을 조합하는 것이 서평자의 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서평쓰기에 대해  "중요해 보이는 소수의 책에 아주 긴(최소한 1000단어는 되게) 서평을 쓰고, 신간에 대해서는 한두 줄 짧은 소개를 하는 건 유익하다"고 말한다. 


오웰은 언제나 유머가 넘치지만 이 글에 특히 유머와 위트가 넘친다. 멋지다. 



나는 왜 쓰는가


이 책의 표제작이기도 한 <나는 왜 쓰는가>는 글쓰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쯤 새겨보았음직한 글이다.

이 글은 오웰의 작가관, 나아가 가치관까지 살펴볼 수 있게 한다. 그는 글을 쓰는 이유를 크게 4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1. 순전한 이기심 : 똑똑해보이고 싶거나, 유명해지고 싶거나, 복수를 하는 등 개인적인 이유에 비롯된다

2. 미학적 열정 :  세계, 언어, 소리 등 세상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이것을 타인과 나누고자 한다. 

3. 역사적 충동 :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실을 알아낸 뒤 후세를 위해 그것을 보존하려고

4. 정치적 목적 : 세상을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서


오웰이 강조하려는 것은 그가 살았던 시대적 격동기에서는 글쓰기의 정치적 목적이 강조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지난 10년을 통틀어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이다. 나의 출발점은 언제나 당파성을, 곧 불의를 감지하는 데서부터다. 내가 쓰는 건 폭로하고 싶은 어떤 거짓이나 주목을 끌어내고 싶은 어떤 사실이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나의 우선적인 관심사는 남들이 들어주는 것이다.”  


 작가는 자기가 살고 있는 당대 분위기와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 오웰은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이라 하며, 작가로서 느끼는 문제 의식과 메시지를 대중에게 전달하고자 노력한다. 그 결실이 <동물농장>이나 <1984> 와 같은 소설로 결실을 맺었다고 본다.


나는 왜 쓰는가? 거창하여 무슨 답을 내놓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두꺼비 단상


이 책에 담긴 에세이 중 가장 이색적인 글이다. 봄을 알리는 두꺼비와 여러가지 봄 풍경 묘사로 글은 시작한다. 봄을 알리는 절기로 2월초 입춘이 있고 이어서 개구리가 나온다는 경칩이 3월초에 있다. 입춘은 지루한 겨울을 조금만 참으라는 정도의 의미로 다가온다. 그렇다고 개구리 나오는 경립이라해서 개구리를 보기도 힘들다. 딱하게도 도시에 사는 나는 오웰처럼 눈으로 봄을 발견하지 못하고 달력의 문자로 봄을 인식한다. 


봄의 시작을 알리는 두꺼비와 다양한 봄의 풍경을 묘사하며 오웰이 느끼는 봄의 아름다움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글은 자연스럽게 기계 문명이 지배하는 당대의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오웰은 자연에서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야말로 인간다운 것이며, 갈등과 파괴의 시대에서 사람들이 가장 되찾아야 하는 가치라고 주장한다. 두꺼비에 대한 극진한 묘사에도 불구하고 글의 말미에서는 독재와 전쟁 등으로 폭력이 난무하지만 결국 봄이 찾아온다는 이야기로 글을 맺는다.


"좋은 산문은 유리창 같다. 나는 내가 글을 쓰는 동기들 중에 어떤 게 가장 강한 것이라고 확실히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떤 게 가장 따를 만한 것인지는 안다. 내 작업들을 돌이켜보건대 내가 맥없는 책들을 스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호튼 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려되어 있던 때였다." 


우리에게는 오웰과 같은 작가의 수 만큼 좋은 문학을 만날 수 있으며, 인간다움을 지킬 수 있는 거라는 희망을 품게 한다.



정치 대 문학 : <걸리버 여행기>에 대하여


어쩌면 화요 독서회 회원들이 가장 어렵게 읽은  꼭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 글은 표면상 조나단 스위푸트의 <걸리버 여행기>에 대한 비평이지만 오웰의 스위프트 작가론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오웰을 읽어야 하고 걸리버 여행기를 알아야 하고 그 위에 스위푸트까지 알아야 이 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웰은 스위프트에 대해 비판적이면서도 장점을 확실하게 짚어준다. "스위프트는 정상적인 의미의 지혜를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무서울 정도로 강렬한 비전은 확실히 갖고 있었으며, 그것은 숨겨진 진실 하나를 골라내어 확대하고 비틀어서 볼 줄 아는 능력이기도 했다. <걸리버 여행기>가 오랜 생명력을 유지하는 거승ㄹ 보면, 작가의 세계관이 온전함이라는 기준을 겨우 만족 시켜주는 수준일지라도, 작가의 확신이 뒷받침해준다면 위대한 예술작품을 충분히 낳을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오웰은 스위프트가 일생을 우울한 감정에 빠져 살았고, 인생을 비관적으로 여겼다고 지적한다. 스위프트는 지나치게 부정적 인식을 바탕으로 모든 것을 파괴하고 부정하는 데에만 집중했다고 주장을  주장을 뒷받침한다. 그런 이유로 스위프트는 이상적인 사회를 제시하지 못하고 사회 비판적 목적으로  <걸리버 여행기>를 썼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속말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오웰의 말은 작가를 이해하는 것과 작품을 고르는 것은 다른 이야기라는 뜻이다. 종종 혼동하거나 구분하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는 나로서는 수긍이 가는 말이다.   


 이 글을 쓰면서 새삼 느끼는 건데, 어렵게 쓰지 말아야 겠다는 것이다. 서평은 특히 그렇다. 아직 읽지 않은 사람들이 읽는 글이라는 걸 감안할 때 더욱 그렇다. 읽은 사람도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신할 수 없는데 하물며 읽지 않은 사람이라면 더 말할 게 뭔가. 



정말 정말 좋았지


오웰의 유년 시절 이야기다.  제목은 내용에 비해 상당히 반어적이다. 이 글은 오웰이 8살이던 1911년부터 1916년까지 다녔던 세인트 시프리언스 학교에서 경험한 내용이다. 종종 침대에 오줌을 지렸던 오웰이 겪은 권력의 불편한 진실에 대한 이야기다. 


오웰은 이 시절에 벌써 계층에 의해 나누어지는 사회적 관계가 있음을  깨달았던 것 같다. 대개는 약자의 위치에서 느낀 패배주의에 고통을 받은 듯하다.  스승은 아이의 성장을 돕기는 커녕 일부 낮은 계층의 아이가 가진 희망을 깨버려서 어린 나이에도 사회적으로 패배자로 스스로를 인식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이 없는 어린 아이였던 오웰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주어진 상황을 자신의 운명으로 여기고, 그에 맞게 자신을 제한하는 거였다. 오웰이 이 비극적인 학교 생활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은 단지 오웰만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가장 계몽된 공간이라는 학교, 더 나아가 영국 어느 곳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고 말한다. 이때의 경험이 지배 관계가 주는 잔인성과 그 상대적 하위에 속하는 계층이 겪는 비극에 주목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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