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본질은 불안이다."라고 고백했던 카프카는 1883년 7월 3일 체코의 프라하에서 유태인 상인 헤르만 카프카와 뢰비 가문 출신의 율리아 카프카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1924년 6월에 사망하였으니 만 40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요절한 작가라고 할 수 있다. 독일의 유명한 작가 괴테나 토마스 만의 생애에 비하면 거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삶이었지만, 독일문학에 끼친 카프카의 영향은 실로 엄청나다. 근대 이후 독일어로 글을 쓴 작가 중 가장 관심을 불러일으킨 작가 중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프라하의 유태인. 이것은 어린 카프카에게는 커다란 혼란을 주었다. 즉, 유태교 특유의 신비로운 분위기와 부유한 체코 중산층의 생활방식, 이 둘 어느 쪽에도 뿌리 내리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카프카가 살았던 곳은 두 계층의 접경지역인 유태인 빈민가와 도심구역의 경계였다. 당시 유태인은 대부분 가난했지만 카프카의 아버지는 악착같이 장사를 해서 그 빈민구역을 탈출할 수 있었다. 아버지 가게는 날로 번창하였고, 그러다 보니 어린 카프카는 거의 하녀들 손에서 자랐다. 장사를 하느라고 바쁜 부모와는 자연히 소원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동생들과도 각별히 지내는 계기가 되었다. 카프카는 그의 아버지를 가리켜 "수수께끼 같은 폭군"이라고 말한다.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에 보면 카프카가 아버지에 대해 얼마나 많은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는지 잘 알 수 있다.
카프카는 중학교 상급반 시절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외로워서였다. 그래서 카프카는 대학만은 당시 낭만과 생동감이 넘치는 뮌헨으로 가고 싶었다. 아버지를 떠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뜻도 관철시키지 못했다. 카프카는 프라하의 독일계 대학인 카를 페르디난트 대학으로 진학하여 철학, 독문학, 화학 등을 공부하다가 마지막으로 법학을 공부했다. 아버지에게 빚을 갚는다는 심정으로 선택한 타협의 산물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이 법학을 공부하는 것마저 보기 싫었다. 상인이 되어야 한다는 철저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빠져 있는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카프카는 평생의 지기인 막스 브로트를 만나게 된다.당시 카프카는 법학을 지극히 모순된 학문이라고 생각했으며, 법을 공부한 후 국가 관리가 된다는 것은 '수천 명이 씹어 먹은 톱밥을 다시 먹는 것과 같다'고도 고백했다. 만 6년이 채 되지 않아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그 사이 그의 삶의 목표는 글을 쓰는 것으로 변해 있었다. 인생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일이야말로 가장 가치 있는 일이며, 그 결과를 글로 쓰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삶의 목표였다. 다시 말해 인생에 대해 거리를 두고, 인생이란 꿈처럼 지나가는 허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쓰고 싶었던 것이다.
카프카는 대학 졸업 후 이탈리아계 일반보험회사에 취직을 하였으며, 성실하고 유능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지만 전혀 즐겁지 않았다. 그에게서 직장이란 아버지로부터의 경제적 독립을 해결해 주는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9개월간의 짦은 첫 직장생활 이후 카프카가 죽기 직전까지 근무했던 두 번째 직장 '노동자재해보험국'에서 법률가로 근무를 하게 된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업무를 통해 카프카는 관료기구의 무자비성, 공장 근로자들의 위험하고 열악한 노동 여건에 충격을 받았고, 또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개인의 소외와 무력감을 통찰하여 카프카는 직접 근로자의 안전에 발 벗고 나서게 된다. 손가락이 절단된 부지기수의 근로자들을 생각하며 회전톱 대신 안전장치가 있는 기계를 직접 고안해내었던것이다. 그의 뇌리에 잠재해 있던 부조리한 사회 현실의 고발과 사회 혁신에 커다란 관심을 보이기도 하였다.
또한 카프카는 직장생활을 하며 진보적 지식인 모임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그곳에서 단지 몇 명과만 대화를 나눌뿐이었다. 지금도 프라하 시내에 있는 아르코(ARCO)카페가 모임 장소였다. 이 시절 카프카는 친구 막스 브로트 집에서 베를린 출신의 펠리체 바우어를 처음 만나 5년간 3백여통의 편지를 주고받는다. 펠리체와 두 번의 약혼과 두 번의 파혼을 겪는 와중에 그녀와의 평범한 결혼생활을 꿈꾸기도 하였지만, 작가로서의 사명을 끝내 저버릴 수 없었던 카프카였다. 1917년 그의 나이 33세 때 당시로서는 불치병인 폐결핵 진단을 받고 펠리체와 두 번째 파혼을 결심한다. 물론 카프카는 이 폐결핵이 단순히 의학적인 치료를 요하는 육체적인 질병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문학을 위해 삶을 포기하는 카프카의 지난한 몸짓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휴양 차북부 보헤미아의 취라우에서 약 8개월 동안 머물면서 다수의 '잠언'을 쓴다.
"병이 나를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네. 여기는 자유가 있다네."
친구 브로트에게 쓴 편지를 보면 삶과 문학 사이에서 얼마나 치열하게 싸워 왔는지 알 수 있다.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체코 공화국이 탄생하였고, 카프카는 12월 다시 프라하 북부도시인 쉴레젠에서 짦은 요양을 한다. 그 곳에서 유대인 수공업자 집안의 딸인 율리에를 만나고, 이후 프라하로 아시 돌아온 카프카는 본격적인 글쓰기를 시작한다.
"본질적인 부조리가 인간을 죄인으로 만든다."
이 한마디의 결론을 위해 카프카는 치밀한 관찰과 묘사를 하였던 것이다. 오후 2시 직장에서 퇴근하여, 낮에는 잠을 자고 반에 글을 썼다. 카프카는 이때가 글쓰기에 전념했던 가장 건강한 시절이었다고 고백한다. 바로 장편소설 <소송>에 몰두할 떄였다. 이듬해 율리에와의 약혼을 발표하지만 이 약혼 역시 아버지의 반대로 무산된다. 이러한 부자갈등을 계기로 카프카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에게 편지를 쓴다. 의미심장한 편지였다. 바로 아버지와의 관계를 정리한다는 뜻이었다.
1922년 1월 집필하기 시작한 장편소설 <성>의 원고를, 여기자이며 카프카의 작품을 체코어로 번역한 밀레나에게 10월에 넘겨준다. 이듬해 흑해 연안의 뮈리츠로 여행을 떠나는데, 그곳에서 열다섯 살 연하의 마지막 연인인 유대계 폴란드인 도라 디아만트를 만난다. 카프카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도라와 베를린으로 떠난다. 거의 평생을 머물렀던 프라하를 떠난 것이었다. 베를린의 삶이 생애 가장 행복했던 때라고 카프카는 고백한다. 1924년 3월 병세가 악하되어 막스 브로트는 카프카를 프라하로 데려오고, 카프카는 마지막 작품 <여가수 요제피네 혹은 쥐의 종족>을 집필한다. 마지막 작품의 마지막 구절을 음미하면 고독한 이방인 카프카가 금방이라도 우리에게 존재의 부조리를 일깨원주려고 다시 나타날 것만 같다.
"그녀는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별로 아쉬워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곧 보다 높은 차원의 구원을 받으며 자신의 모든 형제들처럼 잊혀지게 될 것이다."
1924년 6월 3일 북쪽 키얼링 시 호프만 요양소에서 도라의 간호를 받으며 사망하였으며, 프라하 외곽의 쉬트라쉬니츠 신유대인 공동묘지에 부모님과 세 여동생과 함께 누워 있다. 카프카가 그토록 떠나고 싶어 했던 도시였지만 평생을 살아야 했던 곳 프라하. 카프카는 죽어서도 그 곳을 떠나지 못하였다. 프라하는 그와 떼려야 떨 수 없는 도시였던것이다. 프라하에서 그는 당대의 작가들과 친분도 거의 없었으며, 프라하가 그를 얼마나 구속했는지 수많은 편지와 일기에서 짐작할 수 있다. 지금도 프라하 여행객들의 필수 코스인 '환상광장'내에서 카프카는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녔고, 심지어 직장까지 잡았다 그 작은 동그라미 안에 카프카의 전 생애가 갇혀 있었던 것이다.
카프카는 이처럼 가장 고독한 장소에서 자신의 자리를 잡고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를 파고들었다. 하지만 죽은 후에도 자신의 조국에서 별로 인정을 받지 못했다. 세계 다른 나라들에서처럼 체코에서도 역시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이다. 카프카가 죽은지 40여 년 후에야 그가 출생한 곳에 기념 표지판이 걸렸을 정도였다. 1960년대에 카프카에 대한 관심은 고조되었지만 1968년 '프라하의 봄' 이후 카프카의 작품은 체코에서 금서가 되어 벼렸다. 그 후 최근까지 정지적인 이유 때문에 카프카에 대한 언급은 자유롭지 못하다. 체코인이었지만 독일어로 글을 썼던 카프카, 또한 1948년 이래 독일에서는 그의 전집이 시도되었고 수많은 미발표 유고들의 연구로 카프카 신드롬을 세계적으로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카프카는 독일문학 작가로서 세계문단에 우뚝 서 있는 것이다.
카프카가 죽어가면서 마지막 남긴 말은 우리에게 긴 여운을 드리운다.
"인간은 부조리하지만 자연만은 완벽하고 아름답다"
2. 변신 - 인간 소외, 천박한 자본주의에 대한 경종
<변신>의 줄거리는 지극히 단순하다. 어느 날 아침 벌레로 변해 버린 한 청년이 그동안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주변과 가족을 벌레의 눈으로 바라보며 극도의 소외감에 빠져버린다는 내용이다. 한 마리 벌레가 관찰한 인간의 행태와 심리,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 그것은 지상에서 가장 우울한 풍경이었다.
이 작품은 거의 카프카의 자전적인 소설로 보아도 무방하다. 작품에 나타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의 모습은 실제 폭군과도 같았던 권위주의의 아버지와 순종적인 어머니, 그리고 유독 카프카가 좋아했고 카프카를 따랐던 막내여동생 오틀라(오틸리에)와 그대로 닮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프카의 작품은 난해하다. 어느 날 아침 벌레로 변신한다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원인 규명도 없이 기정사실화함으로써 어느 새 독자는 카프카의 '인간의 동물화' 내지 '동물의 인간화'에 빠져든다. 독자는 처음부터 은유와 의인화로 시작되는 힘든 글읽기를 시작한다. 하지만 첫 장면에서의 벌레로 변했다는 비현실적인 사실을 제외하고는 작품내내 철저히 현실적인 토대와 현실적인 공간ㅇ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래서 이러한 현실성이 오히려 첫 장면의 비현실성을 덮어 버리는 카프카 특유의 파라독스 속에서 독자는 작품을 단숨에, 흥미진진하게 읽게 되는 것이다.
변신하기 전의 주인공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그것은 회상을 통해 주인공의 기억 속에만 존재한다. 옷감을 파는 출장 영업사원이었고, 전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다. 현대의 모습과도 같은 녹록치 않는 삶의 무게가 주인공을 짓누른다. 돈벌이를 위한 여행, 힘든 직업, 성과와 업적만을 중시하는 현대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이 그래도 주인공에게 녹아 있는 것이다. 사회에서의 냉정한 이익관계가 가족에게서도 발견되자, 더 이상 공동체로서의 가족이라는 의미는 상실하게 된다.
주인공은 사회와 가족으로부터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는 인식을 하게 되고 변신을 꿈꾼다. 한 마디로, 변신은 그의 억압된 소망을 표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주인공이 가장 사랑하고 아꼈던 여동생에게서 사형선고를 받는다. 벌레를 없애 버려야 한다는 말이 가족 중에서 여동생의 입에서 가장 먼저 나왔던 것이다.
또한 그로테스크하게도 그의 죽음은 화해의 성격을 띤다. 자신의 기생충 같은 존재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가족 중 어느 누구도 그가 왜 변신했는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인공 자신도 자신의 변신에 대해서 놀라지도 않으며 변신의 원인을 생각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다만 그 변화를 발견할 뿐이다. 즉, 변신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오히려 주변세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스스로 고립을 원했던 것과 반항하고 싶어 했던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낀다. 카프카의 <변신>보다 훨씬 이후에 등장한 조지 오웰의 '빅 브라더'가 정말 현대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걸까?
주인공의 불행한 실존에 대한 책임은 가족에게 있다. 하지만 가족 자체의 비인간성 또한 삶의 필연이다. '삶은 또 다른 삶이 희생되고 나서야 승리한다.'고 하는 카프카 전문가 엠리히의 분석은 극한으로 치닫는 자본주의의 잔인성을 나타내보이는 무서운 말이다. 그래서 엠리히는 계속해서 말한다.
"변신은 긍정적 발전의 표현이다. 인간은 직업과 가족의 메커니즘적인 세계에서 해방되고 진정한 존재를 성취하면서 삶을 마감한다. 그레고르는 화해하며 죽는다."
하지만 법과 정의가 이상적으로 구현되지 않는 섬뜩한 현실에서 과연 엠리히의 주장으로 '변신'의 합리화를 찾아야 할까?
앞에서 얘기한 카프카 문학의 난해성 해결을 위한 엠리히의 이러한 해석 역시 카프카 문학의 모든 수수께끼를 풀어주지는 못한다. 하지만 변방의 도시 프라하가 지닌 이중성, 불안, 소외, 부자 갈등, 유대주의와 독일 문화전통, 자아의 이중성 등등이 카프카 문학의 난해성을 이해하는 데 충분히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와 같은 벌레로의 '변신' 역시 카프카 문학이 지니는 난해성의 대표적 일면이다. 카프타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변신> 역시 읽는 때와 환경에 따라 전혀 새로운 느낌을 독자에게 준다. 독자들은 단순해 뵈는 그의 작품속에 자신의 체험과 환상을 반영시킨다. 이와 같은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이 카프카의 작품을 살아있게 하고 카프카의 세계적 명성과 영속성을 보장해 준다.
재미있는 사실은, 카프카는 변신된 그 벌레가 눈에 보이기를 원하지 않았다. 초판 표지와 관련하여 그는 출판업자 쿠르트 볼프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그것 외에는 무엇이든 괜찮지만 그것만은 안 됩니다. 그 벌레는 그림으로 묘사되어서는 안 됩니다. 멀리서나마 보여서는 안 됩니다." 왜 카프카는 이런 편지를 썼을까? 이는 아마 변신에 대한 공포를 억제하는 그의 방식이 아니었을까? 카프카가 고백한 다음과 같은 말에서 '변신'에 대한 지푸라기 같은 희망을 기대 해볼 수 있는 것은 아닌지 ......?
"인간은 자신 속에 있는 뭔가 파괴될 수 없는 것에 대한 지속적인 신뢰 없이는 살 수 없다."
<출처: 변신 | 프란츠카프카 지음 | 윤순식 옮김 | 누멘>
문장수집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Gregor Samsa)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침대 속에서 징그럽게 생긴 한 마리 벌레로 변해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Als Gregor Samsa eines Morgens aus unruhigen Träumen erwachte, fand er sich in seinem Bett zu einem ungeheueren Ungeziefer verwandelt.
그는 기분이 완전 우울해졌다. '잠이나 좀더 자면서 이런 바보스런 일을 죄다 잊어버리면 어떨까?'라고 그는 생각했다.
-machte ihn ganz melancholisch. ' Wie wäre es, wenn ich noch ein wenig weiterschliefe und alle Narrheiten vergässe.'
'벌써 7시로군.' 자명종이 또다시 울리는 소리를 듣고 그가 혼잣말을 했다. '일곱시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저렇게 안개가 끼어 있군.' 잠시 그는 가볍게 숨을 쉬면서 조용히 누워 있었다.그것은 마치 완전한 적막 속에서 모든 것이 현실적이며 납득이 갈 수 있는 본래 상태로 되돌아가기를 기대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Schon sieben Uhr, sagte er sich beim nuerlichen Schlagen des Weckers, schon sieben Uhr und noch immer ein solcher Nebel. Und ein Weilchen lang lag er ruhig mit schwachem Atem, als erwarte er vielleicht von der völligen Stille die Wiederkehr der wirklichen und selbstverständlichen Verhältnisse.
<출처: 변신 | 프란츠카프카 지음 | 윤순식 옮김 | 누멘, Die Verwandlung | Franz Kafka | Recl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