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을 사기 위해 평일을 지불하는 당신에게

[일과 영성]을 읽고

by 폴라리스

매주 일요일 저녁 6시 즈음이 되면, 단전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한숨이 터져 나옵니다. 심지어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청년부 모임에서 나름의 에너지를 얻고 돌아오는 딱 그 시점인데도 말이죠.


종교가 있든 없든, 대한민국 직장인이라면 이 한숨의 정체를 알 겁니다. ‘내일 또 출근이구나’, ‘이번 주는 또 어떻게 버틸까’ 라는 허탈함과 업무 스트레스가 벌써부터 찾아오죠. 이틀 밖에 안되는 주말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 닷새를 저당 잡혀야 하는 처지가 서글프기까지 합니다. 이미 집에 있으면서도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면서 말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겐 여기에 ‘죄책감’이라는 무게가 하나 더 얹어집니다. 매 순간을 감사하라는 설교를 듣고 온 날이면 마음은 더 복잡해지죠. 행복하지 않은 노동을 하는 내 자신이 혹시 또 다른 죄를 짓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답답한 출근길 동안 기도하며 마음을 다 잡고, CCM을 들어도 그 모든 다짐은 결국 월요일 퇴근하기도 전에 무너져 내립니다.


결국 평일 내내 우리는 냉소적으로 변하거나, 영혼 없이 관성적으로 일을 하게 됩니다. 8년 차 개발자인 저 또한 일터는 ‘버텨야 하는 곳’에 가까웠습니다. 점점 연차가 쌓이면서 ‘일이 정말 이게 전부인가?’라는 질문이 차올랐을 때 집어 든 책이 바로 팀 켈러 목사님의 ‘일과 영성’이었습니다.




일에 대한 회의감은 단순히 과도한 업무량이나 권태로운 일상 때문만은 아닙니다. 내가 공들인 노력이 조직의 비합리적인 결정으로 부정당하거나, 엉뚱한 곳으로 공로가 돌아가는 부조리를 목격할때 이 회의감은 극도로 치닫습니다. 과거 세대가 혈연이나 지연 같은 공동체 안에서 정체성을 찾았다면, 현대인은 오직 ‘직업적 성취’로 자신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증명이 실패하면 어떻게 될까요?


능력주의는 승자에게는 오만을, 패자에게는 굴욕과 원한을 퍼뜨린다. 승자는 자신의 성공을 '나의 능력에 대한 보상'이라 믿으며 자신보다 못한 이들을 경멸하고, 패자는 자신의 실패를 '나의 무능함에 대한 증명'으로 받아들이며 깊은 굴욕감을 느낀다. -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 중


샌델이 지적했듯, 능력주의가 익숙한 우리에게 성과가 가려지는 일은 단순한 보상의 문제를 넘어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듯한 굴욕감을 안겨줍니다.


팀 켈러는 여기서 더 나아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왜 우리는 타인의 평가와 조직의 변덕에 이토록 괴로워해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일을 통해 나를 증명하려는 구원의 서사를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가치를 내가 제어할 수 없는 성공에 걸어두었기에 덩달아 내 행복의 결정권까지 빼앗기게 되는 것이죠.


켈러는 톨킨의 단편 ‘니글의 이파리’를 통해 다른 측면의 보상을 설명합니다. 화가 니글은 평생 골들인 나무 그림을 완성하지 못하고 겨우 이파리 하나만 그린 채 생을 마감하지만, 사후 자신이 꿈꾸던 ‘진짜 나무‘를 마주하고 기뻐합니다.


이것은 현실의 부당함에 눈을 감으라는 값싼 위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부당함이 날 괴롭게 하지 못하도록 ‘내 자존감의 지지대’를 일터 밖으로 옮기는 작업입니다. 내 존재의 기초를 내가 제어할 수 없는 ‘성과‘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인정‘ 위에 두는 것이죠. 이렇게 차츰 ‘회사가 나를 망가뜨릴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방향으로 자존감의 기준이 옮겨가면, 우리는 비로소 짤릴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넘어 부조리에 대해 담담하게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배짱을 얻습니다.




성과라는 굴레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이제 대충 일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타인을 향한 가장 깊은 배려는 일터에서 ‘자신의 일을 능숙하게 해낼 때’ 비로소 실현됩니다.


그렇다면 일을 능숙하게 해내는 건 어떤 걸까요? 저자는 일을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이라고 정의합니다. 나에게 주어진 재능을 오직 연봉을 높이는 도구로만 쓰거나, 짤리지 않을 정도로만 에너지를 배분하고 있다면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이 시간과 재능을 나는 정말 정직하게 쓰고 있는 걸까?


나를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 그 자체의 본질, 그리고 함께 고생하는 동료와 서비스를 사용하는 이들의 편익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전문가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실력이라고 켈러는 말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일을 그저 묵묵하고 능숙하게 수행하는 것만으로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요? 이 대목에서 소설 [스토너]가 생각납니다.


몇 년 전 이 소설로 독서모임을 할 때, 저는 주인공 스토너를 안타깝게 실패한 인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직장에서는 소외받고 커리어는 평범했으며 가정조차 화목한 편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런데 당시 모임원 중 몇 분은 스토너가 제법 행복한 인생을 살았으며, 심지어 저렇게 살 수 있다면 좋겠다고까지 말했습니다. 그때는 본인만 자족하면 충분한건가?라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지금은 어느정도 이해가 갑니다.


스토너가 죽음의 순간 평온할 수 있었던 건, 외부의 풍파가 어떠했든 자신에게 맡겨진 ‘문학’이라는 소명을 결코 외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정치적 요소에 에너지를 소모하는 대신,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역할에 자신을 온전히 불태웠습니다. 소설 속 주인공이라 가능한 초연함일지 모르지만, 내게 주어진 재능을 능숙하게 연마하여 타인을 이롭게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보이지 않는 질서 앞에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품격 있는 응답이 아닐까 싶습니다.




성과주의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제 아무리 실력을 갈고 닦는 다고 해도 내일 아침의 사무실이 갑자기 천국으로 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의사결정은 존재하고, 내 성과는 희미할 것 이며, 시스템은 부조리할 겁니다. 만약 여전히 일을 내 존재를 증명하는 ‘우상’으로 여긴다면, 또 월요일 오후 즈음에 무너지게 될겁니다.


우리는 거창한 영웅이 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톨킨의 소설 속 주인공 ‘니글’처럼, 거대한 나무를 다 그리지 못하더라도 오늘 나에게 주어진 이파리 하나를 정직하게 그리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당장의 성과로 드러나지 않더라도, 그 일을 대했던 나의 신실함은 사라지지 않는 기록으로 남을 겁니다. 일은 내 정체성을 완성하는 활동이 아니라, 그저 내가 세상을 위해 기여할 수 있는 정직한 노동일 뿐입니다.


팀 켈러는 책의 말미에서 이 지점을 ‘쉼’과 연결합니다. 안타깝게도 현대인들은 쉴 틈이 없습니다. 미라클 모닝으로 시작해 점심시간, 퇴근 후, 심지어 주말까지 부업과 자기계발로 빈틈없이 채워야합니다. 마크 코겔버그의 [알고리즘에 갇힌 자기 계발]이나 에리히 프롬의 [우리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에서 지적하듯, 우리는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실체 없는 압력에 등 떠밀려 무언가 하지 않으면 도태될 것 같다는 공포 속에 살아갑니다.


하지만 켈러는 진정한 쉼은 내 가치가 내 성과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을 ‘믿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오늘이 만약 주말이라면 온전히 쉬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잠시 멈춰도 세상은 무너지지 않으며, 내가 아무것도 이뤄내지 않은 순간에도 나의 가치는 충분하다는 그 사실을 온몸으로 누리길 바랍니다. 내일의 이파리를 다시 정직하게 그리기 위해 필요한 건, 더 화려한 스펙이 아니라 오늘을 기꺼이 멈출 수 있는 배짱 섞인 안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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