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를 읽고
전혀 눈치채지 못하셨겠지만, 저는 저만의 ‘가지치기 독서법’으로 책을 읽습니다. 한 권을 완독하면 그 안의 키워드나 질문을 ‘브릿지’ 삼아 다음 책으로 가지를 뻗는 식이죠. 가령 이런겁니다. [노르웨이의 숲]을 읽고는 노르웨이가 북유럽 국가라는 이유로, 북유럽 대표 기업 이케아가 제목에 들어간 [이케아 사장을 납치한 하롤드 영감]을 찾아 읽었죠.
이번에도 비슷했습니다. 직전에 읽은 책은 [개발자 원칙]이었는데, 읽고 나니 나만의 원칙을 견지할 강력한 동력이 필요해지더라고요. 그래서 “괴테”라는 키워드를 골랐습니다. 자기 형성을 정진했던 문인이자 정치가, 과학자. 하지만 괴테의 고전을 정면으로 마주할 엄두가 나지 않아, 요즘 핫한 스즈키 유이의 소설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를 집어 들었습니다.
사실, 독서모임에 가야 해서 억지로 끼워 맞춘 겁니다.
이렇게까지 억지 이유를 대며 가지치기 독서법을 유지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요? 저는 이처럼 생뚱맞은 ‘강제 접목’도 나름의 의미는 있다고 봅니다. 아래는 감자가 자라고 위에는 토마토가 열리는 포마토(Pomato)처럼, 생뚱맞은 두 책이 만나 예상치 못한 열매를 맺을지도 모르니까요.
이 책의 주인공 도이치는 일본에서 손꼽히는 괴테 전문가입니다. 평생 괴테를 연구하고 모든 사상을 그와 연관 지어 생각하는 사람답게, 가족 식사 자리에서 마주친 홍차 티백의 글귀는 그를 큰 혼란에 빠뜨립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혼동시키지 않고 혼연일체로 만든다. - 괴테’
평생 괴테를 파헤쳤던 그에게 생전 처음 보는 문장이 나타난 것이죠.
참된 학자인 그는 문헌을 뒤지고 동료들에게 자문을 구하며 집요하게 출처를 추적합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지식의 방대함이나 학자의 진정성이라기보단, 한 지식인의 ‘인용으로 점철된 삶’입니다. 도이치는 매 순간 자신의 언어로 말하기보단 타인의 저술, 심지어 과거 자신의 글을 인용하며 대화를 채워나갑니다. 심지어 “내가 쓴 책에 나를 덧쓰고 있는 건 아닌가” 라는 자조 섞인 질문을 던지기도 합니다.
물론 한 분야에 오래 몸담아 확고한 세계관을 갖는 것이 무조건 잘못된 일은 아닙니다. 괴테만을 파고든 학자 뿐만이 아니라, 어떤 조직이나 환경에 익숙해진 ‘고인물’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니까요. 다만 문제는 세계관이 너무 견고해서 새로움이 들어올 틈조차 막아버릴때 발생합니다.
우리가 이토록 견고한 성벽을 쌓는 이유는, 유명인의 말을 빌려야 주장에 힘이 실린다고 어려서부터 배워서인지도 모릅니다. 오류가 쉽사리 용납되지 않는 사회에서 타인의 권위는 내 목소리를 단단하게 보호해주니까요.
도이치는 괴테의 철학을 잼과 샐러드로 빗댑니다. 모든 재료가 으깨져 형체를 알 수 없는 잼과, 재료 하나하나가 고유의 식감과 맛을 유지하며 어우러진 샐러드로 말이지요. 글이나 말로 나를 표현하는 것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완벽한 밀도에 집착하다 정작 내 목소리의 식감을 뭉개버린 ‘잼’을 만들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흥미로운 점은 소설의 제목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가 사실 엄숙하거나 단언적인 문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작중 현재 시점의 도이치가 문구의 출처를 찾으려 고군분투하는 것과 달리, 유학 시절의 젊은 도이치는 이 말을 유희로 즐겼으니까요. 괴테의 권위를 빌려 모든 말에 "괴테가 그랬다더라"라는 핑계를 대며 웃고 떠들던 시절,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누구보다 자유롭게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회적 지위가 생기고 전문가라는 역할이 주어지면서, 이 유쾌한 농담은 숨 막히는 엄격한 원칙으로 변질됩니다. 원칙에 매몰된 그는 존경하는 스승이자 장인의 새 저작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동료의 기행을 못마땅해하며, 결국 자기 자신조차 믿지 못하게 됩니다.
도이치 집에 있는 10분 틀린 시계는 그의 묘한 심리 상태를 대변합니다. 10분이라는 애매한 시차를 가진 채 방치된 시계는 빠른지 느린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고칠 수 있고, 하다못해 다른 시계와 비교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 수 있었을 텐데 그는 스스로 고치지 못합니다. 세상의 표준을 의식하느라 자기만의 시간을 정할 확신마저 잃어버린 셈이죠.
엄숙한 원칙에 가려졌던 농담이 계시처럼 되살아난 건 바로 그 흔한 홍차 티백의 작은 글귀 덕분이었습니다. 출처도 불명확하고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던 사소한 문장이 도이치를 자기 목소리 내는 사람으로 돌려세운 것이죠.
결국 도이치는 학자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지릅니다. 바로 공식적인 자리에서 그 티백 문장을 괴테의 것이라고 단언해버린 것이죠. 스스로는 그것을 ‘범죄’에 가깝다고까지 표현하는데, 어쨌든 그는 이 학술적 일탈을 통해 묘한 해방감을 맛봅니다. 완벽한 정답이 아니라 내 마음을 건드린 문장을 선택했을 때, 견고한 성벽에 비로소 틈이 생긴 것입니다.
이 해방감은 서술방식에서도 드러납니다. 책의 중반부까지는 인용과 괴테 이야기가 빼곡해 읽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도이치가 글귀의 출처에 가까이 다가가기 시작하면서 이야기는 흡입력을 갖기 시작합니다. 딸의 명언 수집 취미부터 딸의 남자친구의 존재, 아내가 즐겨 보던 원예 블로거까지, 빠르게 전개되는 후반부는 그동안 답답했던 독자들에게 카타르시스와 심리적 여유를 안겨줍니다.
이런 서술의 흐름은 도이치가 느낀 해방감에 박차를 가합니다. 더 이상 딱딱한 학자들의 이름 대신, 그동안 도이치 곁에서 사랑을 주고 있던 사람들의 이름으로 채워집니다. 아내와 딸, 장인어른, 제자와 유학시절의 친구는 괴테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조화를 이루며, ‘사랑은 모든 것을 혼동시키지 않고 혼연일체로 만든다.’라는 티백의 글귀를 현실에서 직접 빚어냅니다.
결국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는 주체성의 회복입니다.
작중에서 색채론이 언급되듯, 빨강·초록·파랑 세 가지 원색이 만나 16,777,216개의 RGB 색으로 갈라지듯이 말입니다.
괴테 또한 누군가를 인용했고, 그 누군가 역시 또 다른 선대를 인용했을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처음 말했는가’가 아니라, 그 말이 어떤 색으로 다시 섞이느냐일지도 모릅니다.
저자 스즈키 유이는 일년에 천 권정도의 책을 읽는다고 합니다. 어쩌면 이 책은 그렇게 축적된 지식이 자연스럽게 발산된 결과물일 수 있습니다.
이 발산은 에리히 프롬이 말한 창의성과 맞닿아 있습니다. 프롬은 창의성이란 단순히 예술 작품을 만들어내는 특별한 재능이 아니라 ‘자발적 활동을 통해 자기 자신을 온전히 표현하는 삶의 태도’라고 정의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직전에 읽었던 ‘개발자 원칙’에서 결론내렸던 저만의 원칙인 ‘태도의 중요성’이 프롬을 거쳐 이 책에까지 이어지는 셈입니다.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는 핑계로 무엇이든 끌어와 본인의 목소리에 힘을 보태는 행위는, 사실은 타인의 지혜에 내 생각을 슬쩍 끼워넣는 주체적인 접목이었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비록 독서모임 때문에 억지로 이어붙여서 읽게 된 책이었지만, 저의 가지치기 독서법은 이번에도 제멋대로 뻗어 나갈 명분을 찾았습니다.
글귀로 균형을 찾은 도이치 다음은, 위태로운 경계에서 진리를 탐구한 청년의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