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도날]을 읽고
에티오피아의 발레산 트레킹 도중에 한 네덜란드 친구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참 특이한 친구였죠. 며칠 동안 물자 공급없이 어려워서, 필요한 식음료을 미리 구비해 큰 배낭을 가지고 다니거나 짐 말을 빌리는게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크지 않은 배낭에 빵 몇개만 챙겨서 현지 가이드와 함께 슬렁 슬렁 다니고 있었죠.
매일 아침이면 절벽 끄트머리에 조용히 자리잡아 배낭에서 꺼내든 요가 매트를 펼쳐 명상을 하고, 저녁에는 직접 마리화나를 말아 피우는 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 비건이라서, 우리가 음식을 나눠주려 해도 사양했었죠. 네덜란드에서 태어났지만 아프리카 어딘가에서 농장을 경영하고 있고, 지금은 에티오피아를 여행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워낙 독특한 캐릭터이기도 했지만, 우리의 처지와 너무나 대조적이어서 기억에 남습니다. 우리는 정해진 일정에 정해진 코스를 완주해야하는 휴가자였지만, 그는 어떤 규범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를 누리고 있었으니까요. 마치 소설 속의 래리처럼 말입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그 네덜란드 친구가 떠오른 건 우연일까요? 여러 나라를 전전하며 삶의 의미와 해답을 얻으려 했던 래리처럼, 그 친구도 같은 마음으로 그 산을 오르고 있었을까요?
래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구애도, 친구의 일자리 제의도 거절하고는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기약 없는 여행을 떠납니다. 사회적 규범 안에서 성실히 살아가는 우리에게 래리나 에티오피아에서 만난 그 네덜란드 친구 같은 행보는 낯설고 위험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 부럽다는 생각이 빼꼼히 드러나기도 하죠.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삶의 공허함을 마주할 때 유튜브 쇼츠나 각종 도파민거리로 회피하는 것과는 달리, 그들은 고통과 질문에 직접 몸을 부딪치기 때문입니다. 삶의 공백 속에서 정처 없이 방황할 수 있는 그 자유가 때로는 부럽습니다.
동시에 래리에게 묘한 심술이 나기도 합니다. 래리가 빈둥거리며 여행을 떠날 수 있었던 게, 단지 마음만 먹는다고 가능했을까요? 당시 연 3,000달러, 현재 가치로 55,000 달러(약 7,700만 원)의 고정 수입이 보장된 사람이었다는 점에서 고개를 갸웃거리게 됩니다. 심지어 후견인 밑에서 자란 그는 부양해야 할 가족조차 없었습니다. 이런 부담없는 상황이 그에게 ‘자유로울 수 있는 조건’을 선물한 건 아닐까요? 본인은 돈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라든가, 가진 것이 많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다라고 말하는 대목은, ‘빼앗긴 가난’이라는 말까지 생각나게 합니다. 결국, 그의 방황은 완전한 빈손의 모험이라기보다, 최소한의 안전망 위에서 가능했던 실험이 아니었을까라는 못된 의구심마저 듭니다.
물론 조건이 갖춰졌다고 모두가 래리 같은 선택을 하지는 않습니다. 당장 이사벨을 보더라도, 그녀는 래리를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그의 불확실한 삶에 자신을 내던질 수는 없어서 이별을 받아들입니다. 이사벨의 선택은 납득 가능합니다. 이사벨 본인 말마따나 속물이라서가 아니라, 꿈꾸는 자의 뒷수습을 하며 자신의 삶이 증발하는 것을 거부한, 한 인간의 정당한 자기 방어였으니까요.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면도날을 한 자루씩 쥐고 있습니다. 엘리엇은 타인의 인정을, 이사벨은 돈과 명예를, 그레이는 성취를, 수잔은 안정을, 그리고 래리는 삶의 진리를 기준으로 삼고 아슬아슬하게 삶을 이어나가죠. 그들은 자신이 선택한 이 선형적인 가치를 절대적인 진리처럼 여깁니다. 그래서인지 이 소설엔 명확한 선인도, 악인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각자의 날이 무뎌지지 않게 필사적으로 갈고 닦으며 걸어가는 연약한 개인들만 존재합니다.
문제는 이 날카로운 면도날들이 서로를 향할 때 발생합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기준을 정상이자, 건강함으로 규정하고 그 잣대로 타인의 삶을 재단하려 듭니다. 래리가 이사벨에게 “함께 비행기를 타는 듯한 삶을 살자”고 권유하는 제안은, 이사벨이 딛고 있는 땅을 부정하게 만드는 폭력이 됩니다. 이사벨 역시 “마지막 카드를 내보이면 그가 뜻을 굽힐 줄 알았다”고 고백하며 래리를 자신의 기준으로 끌어오려고 했음을 인정하죠.
이런 어긋남과 의도치 않은 폭력은 소설 속에서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 역시도 종종 ‘저렇게 살면 안 되는데…’ 라며 다른 사람을 계몽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시선을 보내는 나 자신을 깨달을 때마다 깜짝 놀랍니다. 나도 모르게 내 기준에 못 미치는 상대의 모습을 하나의 교정 대상으로 보았던 것은 아닐까, 라는 회개를 곧잘 하게 됩니다.
각자가 가진 가치를 타인에게 설득하고 강요하는 행위는, 내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받고 싶은 처절한 몸부림은 아닐까요. 나의 면도날이 나를 지켜줄 유일한 무기가 되기를 바라는 그 두려움은, 타인을 향한 '계몽의 폭력'으로 변질되기 쉽습니다.
주인공 래리는 결국 자신의 선형적인 가치를 벗어나 다시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깨달음을 얻고자 떠났던 방황을 끝내고 일상 속에 스며들기를 선택한 것이죠. 이 변화는 단순한 회귀가 아니라 일종의 ‘나선형 상승’입니다. 외적으로는 뚜렷한 성공도 비참한 퇴보도 없지만, 그의 의식만큼은 세상을 관조하는 차원으로 진화해 돌아왔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으면서, 화자인 서머싯 몸을 포함한 모든 등장인물 중 가장 불편했던 인물은 래리입니다. 작가는 그를 진리를 추구하는 고결한 구도자로 그렸을지 모르나, 제 눈엔 무색무취한 오만을 뿜어내는 관조자처럼 보였거든요.
래리는 타인의 감정과 문화 활동을 자신보다 낮은 차원의 미숙한 것으로 여기는 듯 했습니다. 이사벨의 절박함을 보며 그저 미소만 짓고, 연극이 부자연스럽다며 투덜대며, 소피를 시혜적인 태도로 구원하려고 하죠. 그레이를 치료하는 장면부터 강한 위화감이 들었습니다. 그는 친한 친구의 아픔을 가슴으로 듣고 이해하려 애쓰기보다, 기공 치료라는 기술적인 수단으로 문제를 해결한 뒤 한 발 물러나는 모습을 보입니다.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듯 수잔을 보살피고, 망가진 소피와 결혼하려 한 모든 행위는 세상을 초월한 이가 베푸는 시혜처럼 묘사됩니다. 동등한 인간으로서의 연대보다는,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자비에 가까운 태도입니다.
래리의 얼굴에서 주름 하나 찾을 수 없다는 묘사는 더더욱 공포를 안깁니다. 성장은 반드시 흔적을 남기기 마련인데, 여전히 청년 같은 래리의 얼굴은 삶의 책임을 진 적이 없었던 것 같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아픔에 다가가기보단 평온을 유지하며 웃고만 있는 관객. 그 무결함이 저에겐 이 소설에서 가장 잔인해보이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다른 소설들이 몇가지 떠올랐습니다. 바로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와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입니다. 알고 보니 이 소설들은 모두 전쟁 전후를 배경으로, 근대적인 개인이 사회와 충돌하며 자신만의 가치를 지켜내려 애쓰는 이야기들이더라구요. 삶의 무게를 날카롭게 벼려낸 서사들이지만, 현대에 살고 있는 저에겐 위화감이 느껴졌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더이상 면도날을 사용하지 않으니까요.
우리는 이제 면도기를 씁니다. 나를 지키고 타인을 다치지 않게 할 여러개의 짧은 날에, 안전한 가드까지 덧붙여 조심스럽게 사용합니다. 심지어 주기적으로 날을 교체하며 나의 옳음이 낡은 것은 아닌지 점검하기도 하죠.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선형적인 가치라는 날카로운 면도날 하나에 의지해 아슬아슬하게 살아가지만, 우리는 여러 가치를 저울질하며 명확한 선이 아닌 넓은 스펙트럼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속적인 엘리엇에게도, 현실적인 이사벨에게도, 고독한 래리에게도 동시에 공감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진리를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며 번민하기는 더 쉬워졌지만, 그만큼 다양한 처지의 사람을 품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방황은 덜 비장해 보일지 몰라도, 훨씬 더 복잡합니다. 이 구질구질하고 복잡한 우왕좌왕 속에 진짜 인간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래리처럼 비행기를 타고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위대한 관조자보다는, 자이로드롭에서 부들부들 떠는 서로의 손을 잡아주는 사람이 더 멋져보입니다. 절대적인 하나의 날을 벼려 타인을 재단하기보다는, 서로를 다치지 않도록 안전 가드를 단 면도기처럼 살아가는 쪽이 지금의 우리에게는 더 어울리는 방식 아닐까요. 완벽한 초월 대신 어설픈 연대를 택하는 삶 말입니다.
다음 책은? 고결한 고독 대신, 도시 속의 구질구질한 우왕좌왕을 들여다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