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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챙 Jun 19. 2024

어쩌다 호퀴엄은 우리 집이 되었나


미국 땅 서쪽에는 태평양 연안을 따라 미국을 위아래로 가로지르는 국도 제101호선이 있다. 고즈넉한 도로 곳곳에 숨은 절경을 감상하며 차를 몰다 보면, 북쪽 끝자락에 다다라 호퀴엄이라는 작은 도시를 만나게 된다.

 

호퀴엄(Hoquiam). 미국인들조차 발음하기 어려워하는 이 도시의 이름은 직역하면 “나무가 고프다(Hungry for Wood)”라는 뜻을 가진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단어다. 그들이 사랑하는 나무를 백인들이 너무 많이 베어 가버려서일까? 늘 푸른 상록수의 주(), 일명 Evergreen State라는 별명을 가진 워싱턴주에서 나무가 고프다는 도시의 이름은 왠지 마음 한편을 아프게 한다. 바로 이 마음 아픈 도시에 우리 집이 있다. 호퀴엄이 우리 집이 된 건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도시와의 인연이었을까.

 

부모님과 아들 셋, 다섯 식구. 미국 이민 10여 년 차 우리 가족이 미국 동부 메릴랜드에 있는 아파트에 살고 있던 어느 날, 20년 넘게 연락이 없던 엄마의 옛 직장 동료에게 집이 딸린 작은 모텔을 인수할 생각 없냐며 연락이 왔다.

 

20년 넘게 연락이 없던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면 안 봐도 뻔해 보였다. 비즈니스가 얼마나 안 팔렸으면 그동안 연락 한 번 없던 친구에게까지 연락을 했을까. 게다가 우리 부모님은 비즈니스 운영 경험은커녕 모텔에서 일해본 경험도 없었다. 하지만 한 번 와서 구경이나 해보라는 옛 직장 동료의 설득에 부모님은 오랜만에 여행 삼아 다녀오자며 미국 동쪽 끝에서 서쪽 끝 워싱턴으로 가는 비행기 표를 끊었다.

 

아주 어쩌면 오랜 이민 생활 끝에 작은 기회가 찾아온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도착한 그곳. 하지만 그곳에 있던 건 그저 작은 시골 변두리 도시였다. 그런데 이런 걸 필연이라고 하는 건지, 부모님은 태어나 처음 본 작은 도시가 자꾸 마음에 들어왔고, 결국 그곳으로의 이사를 결정했다. 어디로 고개를 돌려도 나무가 보이는 곳에서 나무가 고프다던 옛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외침이 풍요로운 미국에서 작은 우리 집 하나 없던 우리 부모님의 마음에 가닿기라도 한 걸까.

 

20대 아들 둘과 이제 막 초등학교를 졸업한 늦둥이 아들까지 다섯 식구. 갑작스러운 이사 결정에 막내는 새로운 곳에 간다는 말에 마냥 좋았고, 무뚝뚝하지만 착한 첫째 아들은 당연하다는 듯 가서 부모님을 돕겠다고 했다. 자기 잇속 잘 챙긴다는 둘째 아들인 나는 혼자 동부에 남겠다고 했지만, 결국 마음을 바꿔 함께 떠나기로 했다.

 

이사가 결정되고 우리 가족은 가지고 있던 승용차 세 대를 팔고 중고 미니밴 한 대를 샀다. 그리고 미니밴이 견인할 수 있는 조그만 이사용 트레일러를 빌렸다. 가장 먼저 트레일러에 실린 건 미국에서 고생하는 첫째 딸과 손자들을 보러 미국에 오신 외할머니가 사주고 가신 삼성 냉장고. 냉장고를 싣고 나니 거의 꽉 차 버린 트레일러에 더 넣을 수 있는 만큼의 짐만을 채워 넣은 후, 우리는 10년 동안 살던 아파트의 물건을 전부 처분하고 3천 마일 이삿길에 올랐다. 우리 가족은 마치 더 나은 삶을 향해 가진 전부를 마차에 싣고 서부로 떠나던 옛 미국 사람들 같기도 했다. 우리는 느긋하게 일주일 남짓 달려 ‘웰컴 투 호퀴엄’ 표지판을 지나 미국 우리 첫 집에 도착했다.

 

미국 이민 10여 년. 처음에는 여기저기 친척집을 오가며 살기도 했다. 미국에서의 삶은 우리 선택보다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의해 이곳저곳 머무를 때가 많았다. 그래서인지 비록 변두리 작은 집이지만 낯선 이 땅에서 처음 자의로 결정한 이사는 조금 특별했다. 미국에 온 지 10년 만에, 우리 가족은 드디어 미국에 정착했다.

 

돌아보면 가족 여행 같았던 그때의 이사. 그 후로 10여 년이 흘렀다. 무뚝뚝하지만 여전히 부모님을 제일 생각하는 첫째 아들 우리 형은 부모님과 3시간 떨어진 곳에 살면서도 부모님을 도우러 자주 왕복 6시간 거리를 운전한다. 워싱턴 대학교에 편입해 공부를 마친 둘째 아들인 나는 시애틀에 산다. 호퀴엄이 고향이 되어버린 막내아들은 이제 그곳을 벗어나 둘째 형 집에 살며 대학원을 준비한다.

 

10여 년 전 다섯 식구가 정착했던 호퀴엄. 이제 그곳 우리 집에는 부모님 두 식구만 남았다. 부모님 곁은 여전히 잘 돌아가는 오래된 삼성 냉장고, 강아지 두 마리, 그리고 고양이 한 마리가 시끌벅적하게 지키고 있다. 

 

이제 나는 홀리데이가 찾아오면 형에게 이렇게 묻는다.

“형, 이번에는 호퀴엄 언제 내려갈 거야?”

 

이제 호퀴엄은 부모님이 계신 곳, 우리 삼 형제가 언제든지 찾을 수 있는 우리 집이 되었다.

 

무엇이 생기 잃은 곳을 따뜻하게 만들고, 낯설었던 곳이 그리워지게 하고, 하나의 지역명을 우리 집과 동일시되게 만들까? 나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우리 부모님은 언젠가 호퀴엄을 떠나 다른 곳이 우리 집이 될지도 모르겠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그러다 보니 이렇게, 호퀴엄은 우리 집이 되었다.

 

가끔 부모님을 뵈러 국도 제101호선을 달리다 보면, 이제는 익숙해진 ‘웰컴 투 호퀴엄’ 표지판이 멀리서부터 눈에 들어온다. 10여 년 전 낯설었던 그 표지판이 이제는 집에 거의 다 왔다고, 어서 오라고 손을 흔들어 주는 것만 같다. 웰컴 투 호퀴엄, 웰컴 홈.






사설


이 에세이는 2024년 2월, 제17회 <시애틀문학 신인문학상> 공모전에서 우수상을 받은 작품입니다.


"다양한 수필을 만날 수 있었던 17회 신인문학상 심사는 매우 즐겁고 기뻤다.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분명하게 주제를 형상화시켰던 폴챙님의 <어쩌다 호퀴엄은 우리 집이 되었나>는 드물게 만난 창작 수필이었다." (심사위원: 김학인, 김윤선, 공순해)


"저 상 받았어요!"라며 떠벌리는 걸 꽤나 부끄러워하는 성격이지만, 요즘 가장 쉽고 친절한 글쓰기 설명서라는 브런치북을 연재하고 있으니, 저도 이렇게 열심히 글을 쓰고 있다고 알리는 것이 글쓰기를 시작하는 분들께 격려가 되지 않을까 하여 이렇게 살짝 제 에세이를 올려봅니다.


이 참에 미국 시애틀에서 글을 쓰고 있는 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작가님들께도 관심을 가져 주시면 감사할 것 같습니다. 참고로 브런치스토리에도 저처럼 미국에서 글을 쓰고 있는 작가분들이 꽤나 많이 계시답니다 (출처: 미국 한인 브런치스토리 작가 모음)


오늘도 당신의 글쓰기를 응원합니다. 저도 매일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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