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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ydia Jul 15. 2020

늦깎이 천재들의 비밀

조기 전문화된 디자이너의 스타트업 경험기

책 <늦깎이 천재들의 비밀>은 타이거 우즈와 로저 페더러의 예시를 시작으로 일찍부터 하나의 꿈을 선택하여 조기 전문화된 사람들과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자아들을 시험해 보고 뒤늦게 두각을 드러내는 사람들의 사례를 비교해 보여준다. 사례들을 읽으며 나는 열두 살 때 웹 디자이너라는 하나의 꿈을 선택하고 십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쫓으며 스타트업에서 UX/UI 디자이너로 일했던 경험이 떠올랐고 책의 여러 사례들에 대입해보았다.






"라슬로의 실험은 성공했다. 너무나 성공했기에, 1990년대 초에 그는 자신의 조기 전문화 방식을 1천 명의 아이들에게 적용한다면, 인류가 암과 에이즈 같은 문제들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할 지경에 이르렀다. ... 세상의 그 어떤 일도 동일한 방식으로 정복할 수 있다는 강력한 교훈인 셈이다.

그런데 이 견해는 아주 중요하지만 거의 언급되지 않는 한 가지 가정에 의존한다. 체스와 골프가 우리에게 중요한 모든 활동을 대표하는 사례라는 가정이다. 사람이 배우고 하고자 하는 것들 중에 정말로 체스나 골프와 비슷한 것들이 얼마나 될까? 즉 세상은 체스나 골프와 얼마나 비슷할까?"

- 데이비드 엡스타인 ⟪늦깎이 천재들의 비밀⟫ 1장 ⟨조기 교육이라는 종교⟩


라슬로는 조기 전문화 실험을 위해 자신의 자녀에게 아주 어릴 때부터 체스를 가르쳤고 뛰어난 체스 전문인으로 길러내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자신의 사례를 들어 조기 전문화의 중요성을 외쳤다.


열두 살 즈음 장래 희망을 적는 란에 웹 디자이너라는 다섯 글자를 적어 제출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늘 채우기 어려웠던 장래 희망 칸을 드디어 남들과 조금 다른 다섯 글자로 채웠다는 사실에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던 것 같다. 그 후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었고 꿈이 무엇이냐는 어른들의 질문에 일관되게 같은 답을 했고 대학 또한 시각디자인학과로 지원하여 입학했다.


그리고 대학 입학 직후, 어릴 때부터 다양한 디지털 툴을 접하고 다루어왔기에 동기들에 비해 툴을 조금 더 잘 다루었던 나는 몇 년 혹은 몇 개월이면 좁혀질 이 사소한 능력의 차이가 어렸을 때부터 꿈을 결정하고 한 번도 바꾸지 않았던 내 선택에 대한 보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취업 시기가 다가올 때까지도 계속 디지털 매체와 프로그래밍에 대한 관심이 이어졌고 UX/UI 분야를 선택해 스타트업에 취업했다.


라슬로가 체스에서의 조기 전문화 실험을 통해 어렸을 때의 반복적인 훈련이 한 분야의 뛰어난 두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가설을 증명한 것처럼, 나 또한 어렸을 때 주변의 누구보다 먼저 구체적인 꿈을 선택하고 그에 맞는 공부와 훈련에 집중했던 것이 디자이너로써 원하던 꿈을 이룬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다 졸업 후 UX/UI 디자이너로 일을 하기 시작하며 디자인은 서비스의 한 부분일 뿐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업무를 경험해보니 나의 일이 즐거운 가장 큰 이유는 의외로 디자인에 기여하는 것보다 서비스를 만들어내는 과정에 깊이 참여할 수 있다는 것에 있었다.


작은 스타트업에서 시작했기에 다양한 매체의 디자인을 모두 진행할 수 있었던 경험, 서비스의 방향을 팀원들과 설정하고 실행하며 크고 작은 성공과 실패를 유저 피드백과 사용률을 통해 맞닥뜨릴 수 있었던 경험이 학부 시절의 디자인 작업만으로는 겪어볼 수 없었던 새로운 즐거움과 성취감을 주었고 일과 관심 분야에 대한 생각을 조금씩 바꾸었던 것 같다.


서비스의 주요한 의사 결정이 있을 때마다 디자이너로써 필요했던 능력은 고도로 전문화된 디자인 지식이나 스킬이라기보다는 다른 부서와 기술, 시장을 이해하고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상황에 빠르고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그리고 주변을 살펴보았을 때 뛰어난 팀원이라면 자신의 분야에 대한 전문성을 갖추는 것은 물론이고 시장이나 자본의 흐름, 효율적인 업무 구조와 조직 내의 문화와 같은 다양한 방면의 동향을 놓치지 않고 읽어내는 능력이 있었다.






"우리 모두는 매일 자기 전문 분야에서 실력을 발휘할 때 덩어리 짓기에 의지한다.
... 우리가 자주 가는 식당의 종업원은 기적 같은 기억력을 가진 것이 아니다. 음악가나 쿼터백처럼 그들도 반복해서 접하는 정보들을 덩어리로 묶는 법을 배운 것이다."

- ⟪늦깎이 천재들의 비밀⟫ 1장 ⟨조기 교육이라는 종교⟩


물론 전문 디자인 지식과 기술이 가장 필요한 능력임은 분명했다. 디자이너가 스타트업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사용자 편의성을 높이는 것이 우선이었다. 사실 UX/UI 디자인 작업의 대부분은 웹/앱에서의 익숙한 사용 패턴과 플로우를 찾아내고, 그중 서비스의 성격에 잘 맞고 페이지의 정보를 잘 전달할 수 있는 배열을 그려내 배치하는 일이었다. 디자이너로써 이 과정을 반복 실행하며 책에서 말하는 ‘덩어리 짓기’ 훈련을 거쳤고 사용자 편의에 최적화된 형태를 빠르게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을 쌓았다. 스타트업에서 발휘할 수 있는 디자이너의 전문화 능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


또한 디자이너가 아닌 다른 개발자, 기획자, 마케터는 각자 자신의 분야에 필요한 전문화 능력을 갖추고 발휘했다. 자신의 분야에서 쌓은 전문화 능력, 덩어리 짓기 능력을 하나의 추상화 메커니즘의 틀로써 견고히 다지며 각자의  무기로 길러냈다. 그런데 서비스의 다음 분기, 다음 기능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각자가 가진 하나의 능력에 더해  다른 새로운 능력,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 대응하고 해결책을 찾는 능력을 다 함께 갖춰야 했다.






"타이거의 조숙성과 명확한 목표 의식을 지닌 이들을 요구하는 분야들이 있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복잡성이 증가할수록—기술의 발전으로 세계가 점점 더 상호 연결된 드넓은 그물망으로 짜여 가면서 개인이 보는 영역은 점점 더 작아질수록—로저의 길을 따르는 이들도 더 많이 필요하다.

애초에 폭넓게 시작하고, 성장하면서 다양한 경험과 관점을 받아들이는 사람들, 곧 레인지 range를 지닌 이들 말이다."

- ⟪늦깎이 천재들의 비밀⟫ 서문 ⟨로저 페더러 vs. 타이거 우즈⟩


스타트업 조직 내에서 모든 팀과 부서들이 합리적인 결정을 하기 위해 각자 최선의 선택을 하지만 그 선택들이 모였을 때 결과적으로 서비스에는 예상치 못했던 안 좋은 영향을 끼치는 경우가 있었다.


서비스의 로드맵에 대해 각자가 이해하는 방향이 조금씩 다른 경우도 있었고, 우리 팀에서 내놓은 해결책이 다른 팀에 어떠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거나, 혹은 다른 팀의 기술이나 실무 과정에 대한 이해가 없어 문제가 생기는 경우도 있었다. 각자의 덩어리 짓기 능력을 통해 자신의 분야의 틀에서는 완벽하게 들어맞는 답이 되지만 다른 팀들의 틀과 함께 포갰을 때 들어맞지 않는 경우였다.






가능한 해결법은  가지였다. 먼저 팀원이 많거나 의사 결정 프로세스가 복잡한 경우, PM이라는 직군에서 절충안을 찾아 해결해 나가곤 했다. PM 개발, 디자인, 기획, 사업 모든 면에 대해 어느 직군의 멤버보다 폭넓게 공부하는 멤버였고  실무자들과 빈번히 커뮤니케이션하며 지식을 얻을 기회도  많았다. PM 가지고 있던, 레인지를 지닌 데이터베이스들이 최선의 결정을 위한 유용한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


 번째 해결법은 팀이 조금  작은 규모일 , 의사 결정을 위한 충분한 시간이 있고 별다른 제약이 없는 경우에 가능했다. 다양한 분야의 팀원들이 모여 토론을 통해 해법을 함께 도출하는 방법이.  회의에서 필요한 것은 고도의 전문 기술이나 해박한 지식이라기보다는 자유로운 분위기와 모두를 존중하는 피드백 문화였다. 예를 들면 개발팀 인턴이 새로운 튜토리얼 UX 제안하여 며칠 만에 최종 실행되기도 했고, 디자이너가 주도하여 다음 주기의 마케팅 콘텐츠 아이디어를 제시하기도 했다.


팀장급이 모여 각자의 팀과 스킬에  들어맞는 틀만 늘여놓았다면 적당한 중재와 양쪽 모두 아쉬움이 남는 협의안으로 끝났을  있지만, 한 분야의 경력이 높을수록 쉽게 생각지 못했을 전혀 다른 아이디어가 모든 분야의 틀에 우연히 들어맞는 경우가 생겨났고  완벽한 해결책이 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스타트업 안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넓은 레인지를 지닌 PM 멤버의 경험을 통한 직관력이 대응책이 되기도 했고 각자의 분야에서 쌓은 능력과 새로운 아이디어가 더해져 해답을 내놓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직접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부딪혀볼 수 있었던 것은 디자이너로써 다양한 문제와 해결 방법을 배워나갈 수 있었던 큰 기회였다.


그리고 이 해결 방법과 과정들은 나에게는 처음 접하는 새로운 형태의 지식이기도 했다. 이전까지 디자이너로써 쌓았던 지식과 기술을 통해 서비스의 정보를 분류하고 적절한 형태를 그려내며  나은 방법을 제시할 있었지만 디자인만으로 모든 사용 패턴을 예측하거나 다양한 상황과 문제를 한번에 해결할 수는 없었다. 저자의 말처럼 체스나 골프와 같은 하나의 분야로써 UX/UI 디자인은  기술 자체만으로는 세상을 넓게 이해할  있는 완벽한 기준이 되지는 못했던 것이다. 하나의 서비스를 만드는 작은 세상 안에서도 내가 가진 디자인 기술 하나만으로는 어떤 문제도 해결하기 어려웠다.






"현대 세계에 노출됨으로써 우리는 복잡한 상황에   적응할  있게 되었고,  점은 융통성이라는 형태로 드러나곤 했다. 그리고  융통성은 우리 지적 세계의 폭에 심오한 영향을 미쳐 왔다."

- 늦깎이 천재들의 비밀 2 사악한 세계는 어떻게 생겨났는가 


UX/UI 디자인이라는 하나의 분야를 선택하고 집중했던  시간이  자신의 자아나 흥미를 충분히 테스트해볼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는 관점에서는 실패했다고 느끼기도 했지만,  선택을 통해 비교적 빨리 스타트업의 팀원으로써 회사의 가파른 성장을 겪을  있었고  다른 프레임으로 세상을 바라볼  있었다.


스타트업 초기 멤버로서 서비스 성공에 대한 꿈을 쌓았지만 결국 퇴사하고  다른 경험을 쫓는  또한, 회사에서의 나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실패가 아니라 지금의 복잡한 세상에   적응할  있는 하나의 방법을 배운 시간이라고 이해하게 되었다.  


현대 세계에 필요한 융통성을 더 크고 다양한 모습으로 키워가기 위해, 과거의 시간과 경험으로 쌓인 한 켠의 모습을 인정하고 조금  힘을 내서, 앞으로도 지금까지 겪어보지 않은  다른 새로운 상황을 즐겁게 쫓는 것에 집중해 보려고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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