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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본 Oct 23. 2021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식사>

with 날개 / 이상

나는 불현듯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릿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이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였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일어나 한 번 이렇게 외쳐 보고 싶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 날개 中 / 이상 -




나는 나. 너는 너.


아주 간단하고 당연한 말임에도 불구하고, 나 그 자체로 사는 건 정말 어렵다. 인간이란 게 사회적 동물인 관계로, 수많은 타인과 부딪히고 어울리며 살아야 하고, 그 관계 속에서 자의든 타의든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내 방식대로, 내 기분대로 살고자 하며 무리에서 스스로 나오거나 또는 버려져야 한다. 따라서 오직 100% 나로 살아가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특히, 타인의 관심과 오지랖이 일상인 우리나라에서 타인과 구별되는 나, 오직 나를 지키며 살기란 정말 어렵다. 깜빡이도 켜지 않고 내 차선으로 달려드는 성난 차량들 마냥 가족, 친지, 친구, 동료 등 다양한 이름의 주변 사람들이 내 삶을 규정하고 인도하려 든다. 저마다의 방식을 내세워 나를 변화시키려 한다. 이런 환경에서 나를 지켜내려면 실로 큰 용기와 담력이 필요하다.


사실, 어떤 것에도 정답은 없다. 타인의 지도가 긍정적인 삶의 지표가 될 수도 있고, 내 방식을 고수하는 것이 내 삶을 윤택하게 할 수도 있다. 타인을 배제하거나 타인에 내가 맞춰야 하는 그런 이분법적 논리는 올바르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내 삶의 방식을 타인에게서 찾지 않는 것, 나를 둘러싼 환경 속에서 나의 철학과 소신을 잃지 않는 것,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맞서기도 혹은 함께 나아가기도 하는 것, 그것이다.


틀에 맞춰 진 듯 프랑스 미술을 규격화시킨 아카데미 미술이 유효했던 19세기 초, 에두아르 마네는 환경에 맞서기도 하고 함께 하기도 하면서 자신의 작품세계를 지켜냈는데, 그 대표작이 <풀밭 위의 식사>다.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식사> (1863) 캔버스에 유채, 오르세 미술관


이 작품은 본래 이름이 <목욕>이었다아르장퇴유의 센 강에서 목욕하는 여인들을 본 후르네상스 미술가 티치아노의 <전원음악회>에서 기본 개념을 떠올려 탄생한 작품이다인물의 구도나 구성은 티치아노의 것과 유사하지만마네의 작품은 전혀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그림의 주요 인물로 나체의 여성이 등장하는 것은 같지만티치아노의 여성이 신화 속 뮤즈나 요정처럼 목가적이고 부드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반면마네의 여성은 부도덕한 관계를 맺고 있는 여성처럼 선정적이다바로 이것이 마네가 당대 미술 관습에 맞선 중요한 지점이다.



티치아노 <전원음악회> (1509) 캔버스에 유채, 루브르 박물관


마네가 활동하던 당시, 프랑스 미술은 엄격한 규정을 자랑하는 아카데미 미술의 시대였다. 고상하고 우아한 고전 미술을 지향하는 아카데미 미술 관습상 선정적인 <풀밭 위의 식사> 옳지 않은 것이었다. 때문에 1863년 마네가 이 작품을 살롱에 출품했을 당시 낙선은 예상된 결과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작품은 <목욕> 이라는 원제로 같은 해 <낙선전>에 뽑혀 발표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후폭풍은 강렬했다. 비례, 조화, 구도 등 모든 것이 안정적이고 이상적이어야 했던 아카데미 미술 방식과 달리 극단적인 명암, 조화롭지 못한 인물간의 구도, 무엇보다 성적으로 자극적인 분위기의 이 작품은 아카데미 미술에 익숙한 평론가는 물론 관람객들에게도 불편한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풀밭 위의 식사>는 전통에 맞선 혁명이기도 하다. 마네가 아카데미 미술 방식과 반대되는 자신의 작품 세계를 고수하지 않았다면, 미래의 인상주의 화가들은 날개를 펼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아니, 그 전에 에두아르 마네라는 이름이 미술사에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마네가 주변 환경에 타협하지 않고 자신을 지켜낸 것이 신의 한수다. 


그럼에도, 마네는 결코 인상주의자들과 함께 전시를 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마네가 당시 환경에 100% 맞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마네의 정신을 본 받아 클로드 모네, 카미유 피사로 등 명성 있는 인상주의 화가들이 등장했고, 철옹성같이 높았던 아카데미 미술이 점차 구시대적인 미술로 퇴색되어갔지만, 마네는 꾸준하게도 아카데미 미술의 장이라 할 수 있는 살롱에서 전시하는 것만이 진정한 성공이라 생각했다. 자신의 작품을 비판했던 아카데미 미술에게서 아카데미 미술과 반대되는 작품으로 인정받으려 한 것이다.




모네는 한 방울의 물감이 물의 색을 변화시키듯, 아카데미 미술의 일부가 되어 그 전체를 변화시키려 한 것 같다. 끝까지 전통의 방식에 맞서 모더니티를 추구했음에도 살롱을 통해 작품을 선보이고 싶었던 마네의 고집은 자의든 타의든 근대 미술사에 큰 변화를 이끌어 냈다. 그리고 마네의 작품은 그렇게 '마네 그 자체'를 나타내는 시그니쳐가 되어 독창성과 시장성을 모두 잡은 위대한 근대 화가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


구태의연한 과거의 답습을 끊어내고, 나의 소신을 이어가려면 많은 용기와 힘이 필요하다. 때로는 고통도 감수해야 한다. 사회 뿐 아니라 개인도 그러하다. 내가 속한 환경 속에서 자신만의 생각이나 사고방식을 이어가려면 충분한 절체력과 결단력이 필요하다. 없던 날개를 겨드랑이에서 꺼내어 날아오르기 위한 추진력이 절실하다. 주변에 전복되지 않으려면 내 인생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마네가 자기 그림의 주인이 되었듯이. 천재와 광인 그 사이 어디쯤에서 혁신적이고 전위적인 글쓰기로 우리나라 현대 문학을 개척한 작가 이상처럼 - 아니, 그와 같이 될 수 없더라도 - 결심 없이는 변화도 없다. 추진 없이는 변혁도 없다. 나 자신이 중심이 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자연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화가는 자기그림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 에두아르 마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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