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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즈 Mar 06. 2023

에세이 05, 종이인형

어린 시절 나는 종이 인형을 아주 좋아했다. 여동생과 거의 매일 종이 인형으로 놀이를 했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집안 형편이 그리 넉넉지 않아서, 당시 유행하던 미미 인형, 바비 인형은 가질 수 없었지만 상대적으로 저렴했던 종이 인형 만큼은 풍요롭게 가질 수 있었다. 


엄마랑 시장에 갔다 오는 길엔 엄마가 장 보는 동안 말 잘 들었다는 선물로 문방구나 점빵에 들러서 내 것과 동생 것 종이인형을 샀다. 아마 내 기억으론 8절 종이 인형 한 장이 20원이었다. 50원짜리 종이 인형은 4절지만한 마분지에 그려진 거였고 100원짜리는 한창 유행하는 TV 만화 영화의 주인공이 그려져 있거나, 진짜 어린 여자애 실사 사진으로 되어 있었다.


집에 와선 엄마와 동생이랑 앉아서 아주 아주 정성을 들여 까만 테두리선을 따라 조심 조심 인형을 오려 냈다. 특히 옷 상단에 붙은 옷걸이 부분을 오릴 때면 입을 참새처럼 오므리고 가위와 인형을 최대한 눈 가까이 붙인 다음 집중해서 오렸다. 옷 걸이 부분이 잘려 나가면 그 옷은 입힐 수가 없어 낭패를 본다.


나는 어릴 때 제법 그림에 소질이 있어서 스케치북이나 연습장, 벽걸이 달력 뒷면 등 하얗고 두꺼운 종이만 있으면 인형 그림과 인형에게 입힐 각종 옷을 이쁘게 그려냈다. 그리고는 오려서 동네 친구들한테 나눠주기도 했다. 물론 20원주고 산 종이인형보단 예쁘지 않았지만 나름 한정판 핸드메이드라 특별한 친구들에게만 줬었다. 그리고 제일 좋아하는 인형을 친구와 바꾸기도 했었고 맘에 들지 않거나 질린 인형에 장식품을 얹어서 물물 교환을 하기도 했었다.


인형 각각마다 이름을 붙이고 인형과 함께 인쇄 되어 있던 악세사리, 살림살이, 음식, 핸드백들을 친구랑 바꿔가면서 놀기도 하고 아나바다를 하기도 했다. 인형이 놀 무대도 학용품을 동원해서 만들었었다. 다 쓴 공책의 표지나 두꺼운 마분지로 종이 의자도 만들고 장농도 만들고 식탁도 만들었다. 가끔은 가전 제품 전단지에 냉장고나 TV, 오디오, 비디오 등의 사진이 있으면 오려서 집 살림살이를 꾸미기도 했다. 


한 장에서 오려진 인형과 인형 옷들, 각종 악세서리들은 싹 간추려서 인형용 종이 봉투를 만들어 한 세트로 보관했다. 나름 하나의 컬렉션인데 다른 인형들과 섞이면 찢어지기도 하고 컨셉이 맞지 않아 인형 놀이 할 때 난감하다. 인형용 종이 봉투는 공책을 찢어서 가로로 아랫 부분을 3센치 정도 한 번 접은 후 접은 상태에서 세로로 3등분 해서 접는다. 그런 다음 가운데 공간에 종이 인형이 흘러 내리지 않도록 끼운다. 손톱으로 세로로 접은 부위들을 꼭꼭 문질러 인형들이 빠지지 않게 하면 된다. 


보물 같은 내 종이 인형들을 담아두기에 가장 좋았던 건 강철로 된 아로나민 골드 케이스였다. 요즘 말로 틴 케이스라고 하는데 제법 뚜껑 힘이 강해서 내 보물을 간직하기 안성 맞춤이었다. 그 통이 부족하면 아빠의 와이셔츠 상자나 내복 상자가 다음으로 좋았다. 철통보다 튼튼하진 않았지만 나름대로 수납할 수 있는 공간이 넓어서 많은 인형을 넣어 둘 수 있었다. 정 수납 도구가 없으면 두꺼운 책 사이 사이에다가 종이 봉투째로 넣어 보관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종이 인형 콜렉션 정도 될까? 


뾰족 구두를 신은 아가씨도, 미스코리아도, 세상에서 최고의 부자 사모님도, 간호사도, 선생님도, 성냥팔이 소녀도 종이 인형과 함께라면 나는 누구든 될 수 있었다. 각 상황에 맞는 인형들을 인형 컬렉션에서 꺼내어서 마음 대로 역할을 줄 수 있었고, 없으면 그려서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고등학교 때 국어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아이들은 인형 놀이로부터 말을 배우고, 연극을 배우고, 그 연극 속에서 사회를 배운다고.. 그리고 소공녀 세라의 다락방에 인디언 아저씨가 매일 새롭게 차려준 식탁처럼 종이 인형 놀이를 할 때 내 안에서는 설레이고 꿈 같은 상상력과 창의력이 폭발했던 것 같다. 


와이셔츠 박스 가득 채우던 내 보물 인형들 다 어디에 갔을까? 따뜻한 단칸방에서 엄마는 뜨개질을 하시고, 동생과 나는 인형 놀이를 하고, 막내는 튀밥을 주워먹던 그 시절, 저 멀리에서 들려오던 아빠의 퇴근 오토바이 소리가 너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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