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심 잡기

잃어버렸던 것

by Paz

장송의 프리렌이라는 만화의 숏폼이 내 SNS 알고리즘에 걸렸다. 어떤 여유에서든 평균 이상으로 애니메이션을 챙겨보는 건 분명하기 때문에 억울할 일은 없다. 해당 애니메이션을 시청하진 않았지만 영상이 '장송의 프리렌' 라는 것을 알아볼 정도의 덕후력도 있다. 특히 애니메이션의 세계관을 좋아한다. 말하자면 길지만 난 아마도 꽤 오리지널파(?)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오늘은 애니메이션 이야기를 할 생각은 없지만 말나 온 김에 하고 싶은 말이 하나 생각난다.

누군가 '진격의 거인'이 좋았다고 하면 꼭 미야자키 하야오의 초기작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만화책으로 챙겨보라고 권한다. 영화는 만화의 일부분만 영상화 시킨 것인데 만화 원본에서 그려내는 초대형 세계관을 보면 마치 이런 류의 시초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심지어 그 '미야자키 하야오'의 초기 작품이다. 물론 루팡 3세가 더 먼저지만 실질적으로 '미야자키 하야오'가 직접 만들어낸 오리지널 세계관으로는 아마도 나우시카가 최초가 아닐까 싶다. 게다가 뭔가 정말 아득함이 깊어지는 OST도 좋다. 아, 이야기가 더 옆으로 빠지기 전에 여기서 우선 끊어본다.



주제로 돌아와서 숏폼의 내용에 대해 설명해 본다. 과거, 너무 강력해서 봉인밖에 할수 없었던 마족이 있었다. 그 마족이 80년 만에 부활하여 활기를 치려는 상황이다. 그런데 그가 잠든 80년간 세계는 그 마족의 마법을 연구했고 80년간 기술의 인플레이션을 말미암아 오랜만에 깨어난 마왕은 아주 쉽게 제거된다.

갑자기 대학 입시 후 얼마 뒤의 시절이 떠올랐다. 한국에서 입시의 관문은 혹독하면서 한편으로 인생의 갈림길로써 강력한 장치로 작용해 왔다. 얼마나 강력한가?라는 질문을 던지면 인생의 목적이 마치 입시인 것처럼 여겨지는 시절이었고 입시 이후부터 입대까지의 세월은 방랑이 암묵적으로 행해지는 시기였다. 나도 다를 바 없었고 이때부터 술을 시작해서 여태껏 마신다고 생각하니 확실히 인생의 분기점이었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그날도 어김없이 친구들과 얼마 길지도 않은 강의를 마치고 대학로 뒷골목에서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생고기라고 불리는 애매한 부위였는데 1인분에 3,300원이었다. 거기에 소주 한 병 값으로 2,000원씩을 계산하면 어쨌든 한 명 당 만원씩만 내도 모두가 만취해서 길을 쏘다닐 수 있었다. 주제는 그렇게 넓지 않았다. 연애이야기, 학교이야기가 주 안주거리였다.

특히 학교 이야기는 오만한 패배자들의 일종의 모의 같은 것이었다. 내가 다닌 학교는 아주 최상위는 아니지만 그래도 등수로 보면 상위에 해당하는 학교였다. 그러다 보니 같이 마시는 그 어떤 친구도 원래부터 이 학교에 올 목적을 가졌던 녀석들이 없었다. 이 오만한 패배자들은 1년 내내 '아, 수능 정말 아쉬웠어. 원래는 더 좋은 곳에 갈 수 있었는데..' 같은 말을 했다. 어쨌든 지금은 술을 마시며 놀 수 있다는 우월함을 근거로 패배감을 지껄이는 어린아이들이었다.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 수많은 날 중 한날, 갑자기 전화가 왔고 발신자는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나는 취한 목소리로 아주 반갑게 안부를 물었지만 상대방은 아주 또렷한 목소리로 내일 입대한다고 했다. 지방 어딘가의 대학은 입학했지만 아무래도 지금은 군대를 해결해야 할 때라고 덤덤히 이야기한다. 전화를 끊고 그때 잠깐 생각했다.

'패배자면 패배자답게 살거나 승리했다고 생각하면 승리자로 살아야 되는데, 나는 그 사이 어딘가에서 애매함을 즐기고 있는 건가'



시간은 야속하게 흘렀고 나도 때가 되어 입대했고 우여곡절 끝에 제대했다. 그동안 취직 시장은 급속도로 얼어붙었고 나를 포함한 고학번들이 슬슬 학교에 남아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이상하게도 제대를 하고 나서는 그 편하던 동아리방이나 과방에 들락날락 거릴 수가 없다. 일단 모르는 친구들이 많은 데다가 '이 선배 아직도 학교 다니네?'와 같은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크다. 그렇게 매해 시간이 지날수록 학교는 강의실만 갔다가 집으로 돌아 오는 장소가 되어가고 있었다.

또 그런 수많은 날 중 한날, 갑자기 전화가 왔고 발신자는 그때 그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나는 또렷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고 영어 시험 점수, 교환학생 준비 등에 대해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아마도 남과 대화하는 게 귀했던 시기였기에 상대방의 안부는 묻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친구는 아주 여유 있게 이야기를 받아줬다. 그렇게 수십 분을 떠들고 나니 갑자기 친구의 안부를 묻는 것을 깜빡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맞다. 어떻게 지내는 거야? 너라면 성실해서 잘 지내겠지?'라는 반쪽짜리 배려도 없는 말을 뱉는 철없는 아이였다. 제대를 하면 사람이 된다던데 나는 아직 멀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아주 어른스러운 말투로 말한다. '어? 너네 학교 가까이에서 회사 다녀. 작년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했어. 우여곡절 끝에 편입했고 이런저런 준비를 해서..' 이미 회사 이름을 듣고 내 정신은 멍해졌다. 대기업 신입사원으로 이 친구가 더 먼저 입사할지는 꿈에도 몰랐던 거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면 그 기업과 이 친구와의 연결고리 자체가 머릿속에 없었다. 그래서 그 친구의 정말 중요한 이야기는 흩어 들었다.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기업보다 중요한 건 그의 피나는 노력이었을 것 같은데 말이다.



80년 만에 마족이 쉽게 제압되는 일은 실제 생활에서 진리처럼 일어난다. 물론 세상 안에서는 가치판단이나 편협한 우월감 따위는 주제가 되지 않는다. 그냥 그렇게 세상이 발전하고 매시간 속에 적응하는 자와 적응하지 못한 자가 나누어진다. 물론 적응하지 못한 자가 되었다고 해서 실패하는 건 아니다. 적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성공하는 사람들도 있고 애초에 실패와 성공에 대한 모든 사람의 기준이 다르다. 다만 분명한 것은 세상은 어떻게든 하나의 방향, 즉 기존보다 더 복잡하고 발전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고 이것은 한 시대 생활을 송두리째 바꾼다.

내 안의 오만한 패배자는 더 이상 살아 숨쉬기 힘들다. 내가 한 인간으로서 더 깊어져서 내 안의 패배자를 물리친 것은 아니다. 그저 세월이 흘러 세상이 변하고 그것에 적응하고 또 성공도 하고 실패도 하면서 여러 가지 부침이 가치관을 변하게 했다. 또 자식을 키우면서 변한 부분도 상당하다. 중요한 것은 그날 내 친구는 아주 정확한 시선으로 본인을 파악하고 행동했다는 사실이다. 분위기에 이끌리지 않고 본인 자신이 바라보는 눈으로 판단하고 실천하고 생존했다. 이것은 생존과 생존하지 못함의 문제지 누가 더 잘나고 잘나지 못함의 문제가 아니다.


어쩌다 무역업에서 시작해서 지금은 IT업계에서 일하고 있고, 어쩌다 프로덕트라는 것을 개발자와 만들어 봤다. 그리고 지금은 어쩌다 전략이라는 업무를 한다. 이러한 많은 '어쩌다'가 만나다 보니 누구보다 더 먼저 AI와 조우했고 그 쓰임이 깊었다. 이렇게 쓰면 해피엔딩 같지만 사실은 현재 상태는 새드엔딩에 가깝다.

너무 자주 많이 쓰다 보니 최근에 크게 번아웃과 우울감이 왔다. 이유는 간단하다. AI가 나와 대화하는 세상은 이미 어딘가에 답이 나와있다. 내가 바라본 업계의 진실과 작은 인사이트를 가지고 적절한 주제와 질문을 던지다 보면 AI로부터 얻는 사실은 명확하다. 너무 명확해서 이것을 내 결과물이라고 부르기도 어렵다. 물론 AI가 이 분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자와 이야기를 나눠서 나올 결과물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분야에 전문가가 한 두 명인가? 내가 아는 것을 남이 모른다고 생각할 만큼 이제는 젊지 않다.

이러한 응당한 사실을 예쁘게 포장해 본다. 그리고 기다리는 것은 오로지 실행하는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자본과 그 자본을 배정받기 위한 의사결정이다. 그런데 그 의사결정에 나는 힘이 없다. 더 큰 문제는 그 의사결정은 AI와 정반대의 사고를 한다. 즉 비이성적이다. 대부분 조직 간의 이권 그리고 영역 나누기 등에 의해 새로운 응당한 서비스는 묻힌다. 실수하는 그들도 너무 잘 안다. 그러나 화끈한 의사결정을 할 만큼 권력이 한 곳으로 모여있지도 않고 또 그럴 만큼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그저 이 흐름 안에서 어느 정도 더 내 것을 지킬지가 중요해 보인다. 아니면 나처럼 AI에 질려 몸이 안 움직이는 것 일수도 있겠다.



그런데 갑자기 또 다른 오만한 패배자가 떠오른다. 내가 AI 엔진을 만드는 수십억 짜리 연봉을 받는 인재가 되지 못했다고 패배자인가? 더 범위를 현실적으로 줄여서 지금 당장 가장 핫한 회사를 다니지 못해서 패배자인가? 아니면 이런저런 정치적 상황이 좀 먹어가는 회사를 가족의 안위를 생각하며 다닌다는 것이 패배자인가? 반대로 이런 시기에도 꼬박꼬박 월급이 밀리지 않고 네 가족 사는데 문제없다는 것으로 승리자인가?

AI는 현상이고 문제는 내가 쥐고 있다. AI는 내가 번아웃이 되는 것을 의도하지도 않았고 나의 우울감 역시 생각지도 못했을 거다. 그냥 나라는 사람이 큰 변화를 목격하면서 겪는 무너짐에 가깝다. 그런데 그 무너짐이 정말 사회나 산업의 무너짐일까?라는 질문에 대답하기 어렵다. 그것은 오히려 애매하게 높아진 사회에서의 나의 자존감이 무너지기 직전의 상황에 가까운 느낌이다. 생존의 문제임을 직시해 본다. 다시 한번 아래의 문장을 20년 만에 내뱉어 본다.


'패배자면 패배자답게 살거나 승리했다고 생각하면 승리자로 살아야 되는데, 그 사이 어딘가에서 애매함을 즐기고 있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