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와 인정

'우리는 저마다의 고립된 섬이다.'

by Paz

'우리는 저마다의 고립된 섬이다.' 출처가 불분명한 이 문장이 주기적으로 되뇌어지는 것을 보면 나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정곡을 찔렸다는 생각이 든다. 혼자서는 도저히 무리인 사회 속에서 누구보다 돈독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고 있지만, 한 인간으로서 저마다의 고립된 섬이 존재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양한 관계에서 오는 순간의 풍족함도 어쩐지 개인이 짊어져야 하는 온전한 삶의 시간 축 안에서는 초라해진다. 저마다의 섬이 성숙해질수록 외로움은 더 짙어진다. 다만 세월이 흐를수록 그 외로움의 정체는 다른 섬의 가능성이 궁금해서이기보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섬의 초라함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넌지시 깨닫게 된다.



시대도 한 몫한다. 이전의 삶이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AI는 빠르게 생활에 침투한다. 일하는 것의 절반 이상이 AI와의 대화로 이루어진다. 전략을 업으로 삼는 나는 가설을 검증하고 확인하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 말은 즉, 사무실에서 거의 모든 시간 모니터를 보며 독백을 한다는 것이다. 물론 상대는 AI다.

세상의 변화가 조금이나마 눈에 들어오고 어설픈 통찰력이 산업의 핵심을 찌를 때면 그 누구보다 집중해서 모니터를 파고든다. 대화의 스레드는 길어지고 마침내 꽤 그럴싸할 가설이 완성되고 어느 때보다 단단한 논리로 무장하게 된다. 아이디어 정도를 제공했지만 이렇게 멋진 결과가 나오는 것이 어딘가 어색하지만 한편으로 꽤 당당한 느낌도 받게 된다. '이게 사실일까? 나만 아는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아는 느낌은 아니야.' 마지막까지 의심을 기하다가 결국 '음, 이 정도면 나름대로 인정할만한 결과다.'라고 마무리 짓게 된다. 밀도 깊은 외로움은 이 시점에 시작된다. 보이지 않는 나의 섬에 최선을 다해 건물은 지었는데 그것이 마치 홀로그램으로 펼쳐 놓은 영상에 불과한 기분. 그렇게 섬이 흔들린다.



가치(價値) 있는 일은 뭘까? 사전적으로는 사물이 지니고 있는 쓸모. 한자의 한음 한음 모두 '값'의 의미를 가진 이 단어는 무엇보다 차가운 느낌을 준다. 결국 '값'을 치를 만한 것이냐는 질문이다. 모두에게 인정받을 필요는 없지만 최소한 하나 이상의 주체에게는 '값'이 보이거나 '값'을 메기지 못할 만큼의 감정을 가져다주어야 한다. 가치의 핵심의 저마다의 섬의 세계에 있어야 한다면 나 자신이 만족할만한 일이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확신하기가 어렵다. 나 자신의 가치를 쉽게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굉장히 오만한 사람이거나 의심의 여지가 없을 만큼 성숙한 자아를 가진 자 일 것이다. 전자는 되고 싶지 않고 후자가 되기에는 아직 미숙하다. 결국 관계가 개입해야 말이 쉬워진다. 누군가 '값'을 책정해 준다면 그걸로 나도 모르게 안심할 수 있다. 여기서 인정을 생각하게 된다.



인정을 찾아 헤맨다. 온갖 종류의 인정을 찾아 끊임없이 파헤친다. 평소에 내 가치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인정해 주는 친구, 뭔가 결이 맞다고 생각하는 지인들, 과거에 함께 가치를 창출했던 동료들을 찾는다. 그들에게 나의 최신 가치를 내놓고 인정받으려고 했지만 맥락이 길어지고 지친다. 결국 새롭게 마주한 가치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꺼내지 못한 채 '그냥 사는 게 그렇지'라는 어정쩡한 동감으로 인정을 찾는 여정은 마무리된다.

힘이 빠진다. 대체 뭘 위해 헤매는가? 아마도 인정받는다는 것 혹은 이해받는다는 것이 나에게 주는 안도감에 중독되어 버린 걸 지도 모르겠다. 내가 쉽게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을 타인에 의해 이해받는다는 행위를 통해 외로움은 잠시나마 사라진다. 그러나 조금 시간이 지나면 다시 외로움은 '나 여기 있어'라는 느낌으로 뻔뻔하게 제자리를 찾는다. 생각해 보면 인정은 외로움의 크기를 작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찰나의 시간 속에서 외로움을 잠깐 환기시키는 정도의 힘을 가진다. 그것이 '값'이 되어 비로소 누군가 '값'을 지불할 때 비로소 외로움은 작아지는 것처럼 보이나 결국 또 다른 모습의 외로움이 그 모습을 바꾼 채 자리 잡는다. 이번에는 '나 여기 있어. 근데 나 뭔가 바뀐 거 없어?'라고 묻는 느낌이다.



결국 다시 저마다의 섬에 도착한다. 인정을 찾아 떠돌던 돌아온 탕아는 몸과 마음이 지친다. 아무래도 저마다의 섬에 진짜를 세우지 않고서는 이 게임은 끝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면 이제는 생각해 볼 시간이다. 저마다의 섬에 세운 화려하고 웅장해 보이는 건물이 왜 진짜 건물이 아니라 홀로그램으로 느껴질까? 아마도 건물 설계도는 틀림이 없을 것 같다. 다만 저마다의 섬에 본질적으로 어울리는 건물인지가 중요할 것 같다. 40년 동안 크고 아름다운 건물의 설계만 보고 자랐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나도 그런 멋진 건물을 내 섬에 지어야 한다고 응당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내가 세우고 싶었던 것은 유려한 선을 가진 궁전이 아니라 단순히 선과 면 그리고 무채색으로 칠해진, 그러나 재료 하나하나가 진짜의 질감을 가진 그런 작은 오두막이었을지 모르겠다. 언제까지 모르겠다고 변명할지 모르지만 최근의 나는 결정을 요구하는 자아와 마주친다. 이전 몇 년간은 취기를 통해 제어가 되는 듯싶었는데 자아는 이제 분명한 정신을 요청한다. 그리고 요구한다.

'이제는 좀 어울리는 설계를 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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