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ILL) IN THE UNIVERSE
시간의 착각 : 당신은 정말로 24시간을 일정한 속도로 살고 있습니까?
만일 당신이 1582년 10월의 달력을 아이폰으로 찾아본 적 있다면, 아마도 4일에서 15일로 넘어가는 기행에 놀랄지도 모른다. 아니, 스티브 잡스가 실수를 한 것인가? 이게 뭐지?
기원전 45세기, 줄리어스 시저는 기존의 달에 맡긴 시간의 흐름을 뒤로 하고, 태양에 기반한 12개월의 달력을 제작할 것을 요청했다. 이 달력은 놀랍게도 지금의 것보다 한 해의 흐름에 더 정확하게 일치한다. 그러나 이 달력에는 중대한 문제가 있었다. 바로 3년의 365일 이후에 1년의 366일을 회귀년(Leap Year)로 갖는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매 128년동안 잉여 하루를 더하게 되는 달력 탓에 이미 기독교의 행사들은 실제 계절의 흐름과 맞지 않게 되었다. 예를 들어, 밤과 낮의 시간이 12시간으로 정확히 일치하는 춘분이 지나고 보름달이 뜬 후, 첫번째 일요일이 부활절인데, 절기가 앞당겨지니 이것을 맞추기 어려웠다. 그 결과, 1582년의 10월 교황 그레고리 13세는 역법 개혁을 단행한다. 곧 유럽 국가들이 차례차례 그 달력을 차용하면서, 거의 전 인류는 그것을 “시간"의 유일한 방식으로 여기게 된다.
[초현상계]를 비롯하여, 뉴에이져는 종종 현대인들의 그릇된 시간 개념에 대해서 경고한다. 우리는 지구의 관점에서 합의한 태양력의 정보를 시간 그 자체로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 하루는 24시간. 일주일은 7일. 일년은 12개월, 365일. 그러나, 이와 같은 정보는 사회적 약속에 불과하다. 언젠가 고대 로마인은 그리스로부터 영향을 받아 304일이 존재하는 10개월 달력을 사용했고, 에티오피아는 Pagume이란 13번째 달이 있는 13개월 달력을 사용한다.
즉, 대부분 우리가 태양력으로 고정한 시간은 우주의 객관적 정보를 토대로 어느 한 종교의 행사에 맞도록 기준화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완벽히 365일로 정의할 수 없다는 점에서, 더욱이 시간이란 개념 그 자체를 대체하긴 어려워보인다. (정확히 시간은 365일, 5시간, 48분 56초, 즉 365.2422일이다. 이것이 ‘시간’ 그 자체인가?)
지금부터 살펴볼 것처럼, 뉴에이져는 시간을 ‘아는 것’으로 경험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은 감각의 대상에 가깝다. 그리고 그것은 의식의 차원에서 발생한다. 예를 들어, A군은 아침 일찍 일어나 화장실 청소, 부엌 정리, 스마트폰 장보기, 먼지털기, 영어공부 등을 했다. 그렇게 해도 오전 8시 30분이었다. 그 이후, 아침 조깅을 가고, 중국어 회화 전화를 하면서 출근하고, 점심 시간에 샐러드를 먹은 후 인근의 힐링샵에서 안마의자를 받았더니, 오후 1시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시간이 너무 느리게 흘러간다, 고 생각했다. (나머지 동료들은 아침부터 커피로 시작해 피곤한 눈을 8천원짜리 육개장을 먹고 담배를 피우며 왜 이렇게 인생이 눈 깜짝할 새 지나갔나 토로했다.) 반면, B양은 10시 30분에 일어나 스마트폰을 했다. 배가 고파 눈을 들었을땐 이미 오후 2시였다. 그녀에겐 장을 보거나, 요리를 할 '시간이 없었다.' 배달어플을 시킨 후 그녀는 할리우드 영화를 봤다. 유튜브로 예능까지 보니 8시 반이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지? (왜 이렇게 시간이 빠르지?)
가끔 인간은 의식 외부에 놓인 숫자가 객관적인 정보인만큼 모든 것을 말해준다, 고 착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체중의 오류를 낳는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다이어트를 할 때 정확한 수치를 목표로 둔다. 그러나, 3개월 안에 53kg로 동일하게 살을 뺀 A와 B의 상태는 똑같을까? 만일 A의 키와 근육량은 B의 두배라면? 분명히 두 사람의 몸은 다를 것이다. 그런데, 사실 B가 53kg로 빼는데도 유전적으로 A보다 더 많은 노력이 요구됐다면? 그리고 아침부터 과한 운동으로 체중감량을 시도한 A와 달리, B는 가족 전체의 참여 하에 어떻게 음식을 뿌듯하게 섭취하는지, 감사함을 느끼는지, 등 건강한 식이조절까지 경험했다면? 이 때, 그저 3개월 안에 53kg라는 숫자만 본다면, 그저 겉면에 있는 정보만 긁어낸 것 아닐까? 과연 B가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성취감을 느꼈는지,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는다면 손해일 것이다. 보편적 정보라는 이름 하에 지나치게 많은 정당성을 부여한 숫자에만 의존하여 살아가는 것, 그것은 인간의 성장에 '의외로'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미상불 시간을 몸 밖의 24/7이 아니라 의식의 차원으로 돌려놓는 것은 삶의 주권이 내게 있음을 확언하는 길이다. 그러므로, 이것의 적극적 통제는 매니페스테이션의 핵심 요소다. 우선, 모든 목표는 시간이 허락하는 한 가능하다. 또한, 스티븐 호킹이 말한 것처럼 시간이 앞으로만 가는 데 일종의 이유가 있다면, 우리는 거시적인 차원에서 [나]라는 한 사람의 인생밖에 살지 못하는 만큼 이것을 소중하게 통제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렇게 하지 않을때, 우리는 삶이란 것을 낭비하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B양은 일반인들처럼 24/7을 시간의 전부라고 인지했다. 그렇게 자기 삶에 대한 통제를 하지 않다보니, 이미 시간은 성큼성큼 지나가 4월이 9월이 되고, 12월이 될 때까지 아무것도 이룬 게 없는 것 같았다. 분명히 그녀의 목표는 올해 3월까지 원하는 토익 점수를 따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Chapter.1만 풀었을뿐,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완벽하게 해낼 수 없을 것만 같으므로 시작조차 안 하는게 낫다는 자기 변명을 하면서 이유있는 게으름을 피웠다. 아니, 시간을 돌이킬 수만 있더라도. 그래서 2월이라도 된다면. 아니, 지금이라도 서둘러야 하지 않을까? 아무튼, 내년 3월에는 가능하지 않을까? 아, 시간을 붙잡을 수만 있다면 … … 물론, 그런 것은 제 아무리 의식을 통제해도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뉴에이져에게는 특수한 무기가 있다.
타임라인 : 과거, 현재, 미래는 의식의 차원에서 발생한 착각에 불과하다.
People like us who believe in physics know that the distinction between past, present and future is only a stubbornly persistent illusion. - Albert Einstein
언젠가, 아인슈타인은 1955년에 사망한 친구 Michele Besso의 가족을 위로하는 편지에서 이렇게 적었다. 물리학을 믿는 우리에게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구분은 그저 고집스럽게도 일관되게 흘러가는 환영에 불과하다, 고. 물론, 그가 시간이 일정하게 흐르는 현실의 성질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물리적 세계의 독립적인 실재성을 믿었다. 그러나, 최소한 그가 중세의 성직자와는 시간을 다르게 해석할 가능성을 열어놨다는 것은 분명하다.
한 가지, 이것을 '흥미롭게' 설명하는 효과를 살펴보자.
뉴에이져는 종종 지구에 복수의 타임라인이 있음을 주장할 때 만델라 효과를 거론한다. 분명, 넬슨 만델라는 2013년에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20세기에 감옥에서 죽었다고 기억하는 사람들이 전세계 도처에서 발생했다. 그 이후, 피카츄의 꼬리에 검은색 무늬가 있었는지, 도둑 모양의 이모티콘이 있었는지, 모노폴리의 캐릭터가 단안경을 사용했는지 등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곳에 없던 정보를 사실로 기억하는 현상"이 드러나면서, 그 효과가 실재함에 이견을 갖는 이는 없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이것은 그럴듯한 의식의 착각이 집단적으로 발생하는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피카츄의 꼬리에 검은 무늬가 있다고 믿는 것은, 그와 가까운 귀에 검은 무늬에 그것이 더 "어울린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모노폴리의 캐릭터의 단안경은 유사한 부자 또는 노인 캐릭터에 자주 차용하는 상징일 것이고, 넬슨 만델라가 살아있는지, 아닌지 모르는 것은 그 당시 유사한 이유로 투옥된 이들이 대부분 감옥에서 사망했기에 그도 그럴 것이다, 라고 추정했기 때문이다. 즉, 과연 만델라 효과가 복수의 타임라인을 증명할 수 있는 수단인지, 아닌지는 초현상계의 관심사가 아니다.
다만, 시간의 '속도'가 의식의 차원에서 조절할 수 있는 문제라면, 시간의 '양상'은 어떠한가?
모든 뉴에이져는 [시간의 착각]을 경계한다. 시간은 주관적 의식의 차원에서 느리거나, 빠르게 흘러가게 조절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의도하지 않았을 때도 이것을 경험한다. 예를 들어, 어려운 수업을 들을때 시간은 느리게 가는데, 게임을 할 때는 시간이 빠르게 가는 것처럼. 그러나 시간이 하나의 속도를 가진 것은 아니라는 것은 이미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다. 시간은 객관적인 것으로서 우주 전체에 동일하게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그 양상은 서로 다르다. 지구의 1년은 다른 행성의 1년과 같지 않다. 1년에 1000일을 가진 A행성에서 지구의 시간을 보면 너무 빠르게 흘러간다고 느낄 지 모르고, 1년에 10일을 가진 B행성에서 지구를 보면 시간이 느리게 흘러간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시간의 정체는 달라지지 않았다. 마치 서로 환율이 다를지언정, 돈의 개념 자체가 바뀌는 것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아니, 그것은 우주로 넘어갈 필요없이, 지구에서도 동일하다. 애당초 365.6시간이었다, 365.5시간 49분 16초로 바뀔 수도 있고, 1년에 10개월이었다, 12개월일 수 있으며, 한 해의 시작은 3월이었다, 1월로 변할 수도 있는 것이 지구에서 정의한 시간의 내용이다. 그렇다면, 왜 나는 시간이 영원불변하게 나와 독립된 채 실재한다고 믿었던가? 왜 내 삶을 정의할 절대적인 기준이 "하나밖에 없는 24/7"라고 믿고 있었던가?
만일 시간이 서로 다른 속도를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은 시간이 존재할 수 있는 복수의 터가 있음을 상정한다. 바로 이 타임라인의 개념을 이용하여 초현상계는 실천적 삶에 유용하게 쓸 것을 권고한다. 예를 들어, 과거의 인연이나 사건 등이 지속적으로 내 생각의 터에서 나를 놓지 않고 있을때, 그러므로 미래로 건설적으로 향할 수 없게 막는다면? "나는 그 일이 없었던, 또는, 나에게 그렇게 영향을 미칠 수 없는" 타임라인을 머릿속에서 상정한다. 그리고, 단순히 내 인생의 돌이킬 수 없는 역사를 바라보는 행위를 하면서, 마치 양자역학의 이중슬릿 실험에서 관찰에 의해 파동이 입자로 고정되는 것처럼 최소한 그것이 내 의식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범위 하에서 그곳으로 뛰어넘는다.
이것은 물리적인 차원에서 트라우마, 혹은 차후에 살펴볼 것처럼 에너지의 차원에서 '알 수 없는 정신적 고통'을 경험하는 이들이 스스로를 치료하는데 효과적이다. 정확히 말하면, 과거의 A사건이 현재의 내 인생의 주체적 진행을 방해하는 타임라인으로부터 빠져나오되, 내 의식의 차원에서 중력을 내가 원하는 곳으로 옮겨서 새로운 타임라인을 살아가게 해주는 것이다. 시간을 의식적으로 통제한 결과는 물리적 차원에서도 드러난다. 만일 모두에게 시간이 우주의 원리로서 동일하게 적용된다면, 왜 누군가는 유전적으로 동안이 되는 것일까. 우리 몸은 DNA의 영향만 받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식이, 운동량, 흡연 여부 등을 기록하는 후성유전의 영향도 받는다. 마치 시간을 느리게 의식하는 것마저, 최소한 그 과정에 동반되는 안티에이징을 위한 노력들은 우리 몸에 새겨진다. 그 결과, 누군가는 빠르게 늙고, 누군가는 느리게 늙는다. 그것은 너무나 주관인 경험의 차원이라 아직 과학적으로 밝힐 수 없는 비밀, 바로 인간 의식에 그 열쇠가 있는 것은 아닐까. 24시간을 산다고 하더라도, 오늘도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네, 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하루종일 스마트폰을 하며 시간을 아쉽게 산 사람의 정신뿐만 아니라, 몸에도 그 유의미한 차이가 있지 않을까.물론, 나는 내 의식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진 과거의 사건을 바꾸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아마도, 12,800년 전에 빙하기를 내 의식대로 없던 일로 만들 순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 의식이 100% 힘을 발휘할 수 있는 터인 내 삶에선 과거의 사건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얼마나 미칠 수 있을지 인간은 통제할 수 있다.
즉, 눈앞에 펼쳐진 물리적 차원만이 아니라, 의식의 차원에서 발생한 생각이 투영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므로, 그 상호적인 순환의 과정을 이해하고, 내가 어떤 시간(현실)을 살 지 스스로 통제하는 힘을 부여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가 우주의 전체이자, 일부로서 기능하고 있기에 그렇다, 고 믿는 것이 뉴에이지 종교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뉴에이지 종교의 가장 큰 특징은 Abrahamic religions (헤브라이즘) 사상과의 적극적 분리다. 선과 악의 절대적 이분법과 완벽주의에 기댄 사상은 현실을 처벌을 할까, 말까 여부를 결정할 시험대로만 보게 만든다. 그리고 생은 사후세계의 이전 단계에 불과하며, 모든 것은 신의 뜻에 맡긴다, 는 관점은 평균 수명 100세 시대에 지나치게 수동적인 자세로 낮추는 느낌도 든다. 그러나, 단순히 뉴에이지 종교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무한경쟁의 시대에서 죄의식없이 모든 것을 해도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선과 악을 초월한다, 는 것은 가장 나에 가까운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탐구를 통해, 더 나아가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는지 무의식적으로 노력을 기울이겠다, 는 선언과도 같다. 단순히 현실은 내 육체가 담고 있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줄만큼, 이곳에는 기존의 종교적 접근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그렇다면, 실제로 인간은 어떻게 삶과 관계를 맺고 있을까?
이제, 가장 '초현상계' 다운 접근을 통해 우주적 차원의 진실에 접근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