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의 단가

by 김이름

그 시절에 누가 안 그랬겠냐마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보단 내가 무엇을 해야하고 하면 안되는지를 더 듣고 자랐다. 공부를 열심히 안 하면 불행한 삶을 살거라고 했었다. 처음이자 마지막 수능등급제가 실시되었던 때였다. 내신이 강화된 시기라, 첫 중간고사 성적을 비관해 자살이 속출한다는 뉴스가 나온 적도 있었다. 익명의 번호로 불합리한 교육 제도에 맞서 촛불을 들어야한다는 문자가 왔다. 나는 나가지 않았다. 이따금 그 문자를 받았다는 다른 사람을 보았지만, 그 날 몇 명이 모였는지는 나가본 사람을 만난 적이 없어 아직도 모른다. 궁금은 했는데, 두려움이 더 컸다. 아직 학교를 빠지면 세상이 큰일나는 줄 아는 시절이었고, 큰일까진 안 나도 엉덩이 두 대 정도는 맞던 시절이었다.

우리에게 허락된 것은 공부였고 허락되지 않은 것은 그 외의 모든 것들이었다. 썩 가깝게 지냈던 친구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취향이 있는 친구들이었다. 종교를, 영화를, 책을, 그림을, 만화를, 별을, 또 다른 무언가를. 남몰래 어떤 친구는 코스모스를 읽었고 다른 친구는 영화 시나리오를 썼으며 누군가는 그림을 그렸다. 허락되지 않은 것들의 수만큼 빼앗기는 것들의 수도 많았다. MP3, PMP, 만화책, 소설책. 그래도 성경까지 빼앗아가진 않았던 것 같다. 다만 삶의 색채가, 무채색으로 지워진 것 같았다.

어른의 자유는 준비없이 쥐어졌다. 스무살이 된다고 갑자기 말과 창 방패에 말을 타는 서부의 총잡이가 되거나 순례자든 방랑자든 돈키호테도 괜찮은 것은 아니*라서, 그냥 선배들이 이끌어주는대로 끌려다니고는 했던 것이었다. 준코는 팥빙수가 무한리필이 돼. 날씨 좋은 날은 산성에 막걸리지.
전공? 재미도 없고, 뭔지 모르겠어. 더 좋은 데 갈 수 있었는데 수능 망해서 성적 맞춰 왔거든.

술은 약하고, 말재주가 좋은 것도 아니고, 호감형 외모도 아닌 사람을 끼워주는 게 어딘가 하고 다녔지만 내 공간은 없었다. 술에 술탄듯 물에 물탄듯 시간이 흐르고, 몇 군데의 단골집이 생기고, 전공은, 성적맞춰 온 사람에게도 재미가 없었다.

무채색의 인생에 대해 이따금 회의를 느낄 때면 한 문구를 떠올렸다. '제 또래는 딱히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제 아들은 더하겠지요. 어느 날 문득 보니 대부분의 인간들이 너무나 마이크로해지고 소프트해진 거예요.'**뭐, 어쩔 수 없지. 세상이 그렇다는데.

그런데, 너는 어쩜 그렇지.

무채색 세계에 가끔 각자의 색깔과 향기로 나타나는 파스텔톤의 사람들이 있었다. 어느 날은 파란 색으로, 어느 날은 민트색으로, 어느 날은 비누 향기와 달콤쌉싸름한 초콜릿의 냄새로. 파스텔톤의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의 취향이 있었다.

파란색이 좋아요. 에픽하이의 가사가 좋아요. 기형도의 시가 좋아요. 빨래 건조하고 나서 나는 섬유유연제 냄새 너무 좋지 않아요? 요샌 이 만화를 재밌게 보고 있어요. 나뚜루팝의 녹차 아이스크림이 맛있어요. 슈크림은 파바같은데 거 말구, 저 제과점 게 맛있고요. 음료는 콜라보단 사이다가 좋아. 오늘은 영화만 세 편 봤어요. 이번에 극단에서 연극하는데 보러 올래요? 출연은 안 하고 조명만 잡는데 그것도 재밌어요. 대림미술관에 이번에 좋아하는 작가 작품이 올라왔어요. 이 참에 서울 한 번 갔다 오는 거죠.

술은 약하고, 말재주가 좋은 것도 아니고, 호감형 외모도 아닌 무채색의 인간이 파스텔톤의 인간을 만나는데는 명분과 비용이 필요했다. 간단히 물어볼 게 있어서, 혹시 저번에 행사 처리 어떻게 했어? 아 고마워. 답례로 연극이나 영화 한 편 보여줄까? 같이 시험 공부할래? 밥은 내가 살게. 치킨 걸고 학점 내기나 할까? 근데 요샌 어떤 거 보고 있어?

함께 연극을 보러 간 날 내 옆자리는 파스텔톤이었고 그 작은 눈에는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취향을 맞추고싶어 많은 것들을 좇아갔다.
무채색의 세계는 1인분에 2500원의 뒷고기와 한 끼 3500원의 닭갈비와 3900원의 감자튀김으로 구성되어있었는데 파스텔톤의 세계는 한 번에 2만원 가까운 연극과 최대 13만원하는 뮤지컬과 한 잔에 8천원짜리 칵테일과 한 권에 만원 조금 안되는 시집으로 이루어져있었다.

길을 벗어나는 비용은 생각보다 컸지만. 여전히 무채색의 인간인 내 세계는 그들 덕분에 파스텔톤으로 덧칠이 되었더랬다. 죽어있던 시간의 비용보다는, 때 되면 꽃이 피는 삶이 더 싸게 남는 장사였다.

그러니까 역시

사는 동안 많이 써야지.

*버즈 ㅡ <비망록> 가사 중
**박민규 ㅡ <카스테라> 작가 후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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